49. 고단해라, 인생길
"아범아 보그라."
모내기 끝물에 국회의원 선거바람 타고 니가 번개 치기로 댕겨갈 적에만 해도 꽃피는 봄
이었는디 발써 숨 턱턱 맥히는 삼복 더우 속에 밤이 먼 모구가 지 시상 만낸 한여름이 되얀
다. 항시 공사다망헌 검사 영감님 노리(노릇) 허니라고 금쪽 겉은 몸은 성허냐 으쩌냐. 무소
식이 희소식인지 암스로도 핀지가 하도 드문드문헝게 걱정시럽고 맴이 씨이고 그런다. 고
이쁘고 똑똑헌 아그덜도 별 탈 웂이 잘 크지야? 그것들이 할메 낯 안 잊어뿔랑가 몰르겄
다. 그것들허고 꿈에서 놀아쌌고 그런다.
어이 아범아, 나가 생각허고 또 생각허다가 애가 보타서 이 야그를 또 허게 되얐다. 성가
시다 구찮허다 생각지 말고 맘 널르게 묵고 이 에미 이약 들어줬으면 쓰겄다. 으쩔 것이냐,
미우나 고우나 성제간이고, 부모 성제간 인연이야 띨라야 띨 수가 웂이 귀허고 찔긴 것 아
니드냐. 그라고 가장 웂는 집안에 장자는 그 집안 가장인 법잉께 니가 동상덜 거둬줘야제
워쩌겄냐. 그려, 그간에 아범 니가 집안 거두니라고 몸 고상 맘 고상헌 것을 생각허면 아무
심도 웂는 이 에미넌 낯을 들 면목이 웂고 입이 열이라도 말을 헐 염치가 웂는 사람이여.
근디 말이여, 공사다망허다 봉께로 혹여 청자 냄편 일 까묵은 것 아니다냐? 고 서방이 니
처분 오기만 기둘리고 있다가 요새 맘이 변해 서울로 뜰 작정을 허고 있다. 여그서 자리 한
나 못 구허면 전답 쪼깨 남은 것 폴아갖고 서울로 돈벌이 가겄다는 거이다. 봉사든 귀먹쟁
이든 서울만 가면 돈 잘 벌고 사는 판에 촌구석에서 맨날 밑지는 농사에 목매고 삼서 더는
빙신 팔푼이 안 되겄다는 거이다.
어이 아범아, 일이 그리 되면 큰 탈 아니겄어? 아새끼덜 셋이나 딜꼬 험헌 서울서 쪽박차
기 하로아침일 것이고, 그리 되야 아범 니헌테 손 벌리고 뎀빔서 떼쓰면 워쩔 것이냐. 고
서방을 여그다 묶어두는 것이 질로 상책일 것 겉은디, 어찌 자리 한나 터줘라, 검사 영감님
빽이면 군청이든 읍사무소든 하다못해 수리조합 같은 디라도 한자리 차고 들어가기는 식은
죽 묵기고, 손바닥 뒤집기라는디. 고 서방보담도 많이 못 배운 동상 청자 생각혀서 꼭 잠 애
를 써야 되겄다.
또 듣기 싫은 소리만 담뿍 혀서 미안시럽고 볼 낯이 웂다. 아범도 아그덜도 더우 안 묵게
조심허고, 오늘은 더 허고 잡은 말 여그서 끊는다.
고향땅에서 에미가."
이규백은 어머니의 육성을 들으며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언
제나 고향 말투 그대로였다. 읽기는 하지만 쓰기는 서투른 어머니의 편지는 언제나 동생들
이 대필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신의 말투를 그대로 쓰기를 원했다. 표준어 표기가 당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기 전까지는 남
동생 규상이가 대필했고, 그 다음에는 막내동생 규동이가 대필했고, 막내동생이 금년부터 서
울로 진학하자 여동생 청자가 대필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청자는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대필
한 거였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대필이 아니라 어머니의 입을 빌려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규백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자신에게 어떤 야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부탁이 역겨
워진 나머지 자신은 여동생에게 누명을씌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편지 내용 전부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뜻이고 여동생은 그저 대필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동
생도 제 남편의 뜻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규백은. 어머니가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한 매제 고두석에게 짜증이 일어났
다. 두 동생과 세 조카에게 짓눌려서 사는 맛을 잃고 있는데 시집간 여동생마저 또 그렇게
짐으로 얹히려 하고 있었다. 물론 농사가 공업화의 덫에 치여 가망 없이 되어가고 있는 것
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농고 출신인 매제는 신분을 바꾸기에는 갖춘 것이 너무
없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어찌 보면 은근한 위협이고 협박이었다. 짧지 않은 편지의 핵심은, 어서
빨리 관공서 어디에나 취직을 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논밭 다 처분해 서울로 올라가서 더
큰 두통거리가 될 수 있다, 하는 것이었다.
이규백은 어깨 처져내리는 한숨을 토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건 빨리 자리를 만들어
내라는 위협일 수 있었고, 사실 그대로일 수도 있었다. 나날이 시골에서 서울로 몰려드는 사
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판국에 매제라고 못 올 까닭이 없었다. 돈 몇 푼 가지고 서울에 올라
와 어물쩍 하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손 벌리고 덤비는 날에는 이만저만 문제가 아니었다. 여
동생네는 애들이 셋이니까, 그리 되면 부양가족 다섯이 더 생기는 셈이었다.
"많이 못 배운 동상 청자 생각혀서......"이규백은 이 대목이 또 마음에 걸려 괴로운 신음
을 씹었다. 태풍 난리로 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여동생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겨우 고등
학교를 졸업시키고는 대학 진학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여동생은 대학 진학을 바랐지만
그런 눈치 앞에서 '여자가 고등핵교 나온 것도 과허다' 어머니는 이런 말로 단
호하게 청자의 꿈을 무질러버렸다. 여동생은 더 말없이 앞에 닥친 환경에 순응했고, 어머니
는 딸의 결혼을 서둘렀다. 여동생은 그게 자신이 갈 길이라는 듯 어머니가 정한 혼처에 다
소곳이 시집을 갔다.
이규백은 여동생에게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동생은 어쩌면 살아남은 형
제간들 중에서 태풍 난리의 가장 큰 피해자인지도 몰랐다. 여동생이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대학 진학을 그리도 매정하게 잘랐을 것인가. 여동생은 여자의 숙명을 말없이 감수했고, 자
신은 고등 고시를 준비하는 무능한오빠로서 어머니의 결정에 무언의 동조를 했었다. 그건
가위눌리는 짐을 하나라도 빨리 벗어버리고자 한 음험함이었다.
여동생 청자는 제 남동생 둘이 대학생이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기
만 대학을 못 다닌 채 농사꾼의 아내로 볼품없이 된 불만과 열등감이 날로 커졌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표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가 편지를 그렇게 썼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매제도
검사 처남의 덕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 뻔했다. 어느 집안에 돈 번 사람이 하나 생기면 사돈
네 팔촌까지 덕을 보고 싶어하듯이 검사를 바라보는 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규백은 담배연기를 코로 느리게 내뿜으며 신음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서울로 올라오게 방치할 수는 없었다. 서울은 이미 만원을 넘어 폭발
상태에 있었다. 농부는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살아갈 방법이 없는 무능력자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어디든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규백은 상체를 비틀며 된신음을 어금니에 물었다. 무리를 감수하며 검사의 힘을 작용시
키면 군 단위 행정기관 그 어딘가 말단에 자리 하나 뚫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
었다. 그러나 매제가 제몫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인지......괜히 검사 빽 팔아가며 두고
두고 사람 망신이나 시키지 않을지......이규백은 '내가 왜 검사가됐나' 하는 생각을 또
불현듯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검사가 되고 난 이후 골백번도 더한 것이었다.
"검사님, 중부서 수사과장 전홥니다."
여직원이 고개만 디밀며 알렸다.
"아, 여보세요......"
이규백은 송수화기를 들며 낮고 묵직한 소리를 냈다. 냉정하고 엄한 기색으로 바뀐 얼굴
과 함께 그 목소리에는 거만과 위엄기가 서려 있었다. 평소와 달리 공무를 수행할 때 나타
나는 변화였다.
"아 예, 이규백 검사님이십니까?"
"예, 그렇소만......"
"아. 안녕하십니까. 여기 중부서 수사괍니다. 안민구가 처남 맞습니까?"
"예 , 그런데요."
이규백은 처남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의자 등받이에 부리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 그렇군요. 안민구가 좀 곤란한 사건으로 체포돼 우리 서에 있습니다."
"무슨 사건인데요?"
이규백은, 이놈이 또 일 저질렀구나, 생각하며 담뱃갑을 끌어당겼다.
"예, 이거 참 곤란하게 마약 피우다가 걸려들었습니다."
"마약이요?"
"예, 마리화납니다. 여자 둘 남자 둘이 호텔방에서 그런 겁니다."
"이거 참 면목 없습니다. 집안에 연락하고 곧 찾아갈 테니까 그동안 잘 좀 부탁합니다."
이규백은 전화를 끊으며 쓴 입맛을 다셨다. 상급기관의 검사 체면을 완전하게 구겨버린
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말썽꾸러기 처남이 은근히 고맙기도 했다. 그가 사고를 칠 때마
다 처가 쪽 식구들에게 검사 이규백의 존재가치를 높여주기 때문이었다. 사고뭉치 안민구는
외부적으로는 자신의 체면을 깎는 귀찮은 존재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 조명등 역할을 수행하는 썩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규백은 장인, 장모,마누라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다가 장모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몸달아할 사람이 장모였고, 자신을 가장 하시하는 것이 장모였다. 장모
의 애를 태울 필요가 있었고, 자신의 값어치가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확인시켜야 했다. 일
단 장모에게 알리면 장인이나 마누라한테는 효과가 증폭되어 알려질 것이고, 그리 되면 장
인이나 마누라한테는 느긋하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수 있게 될 거였다.
"장모님, 놀라지 마시고 들으세요. 작은 처남 민구가 지금 경찰서에 잡혀 있습니다."
"아니, 왜 또? 대낮부터 술 마시고 누구하고 싸웠나 어쨌나?"
"그게 아니랴 이번엔 좀 중죄를 저질렀습니다."
"중죄? 그게 뭔가?"
전화기에서 장모의 목소리가 뜨겁게 터지고 있었다.
"예, 그게 좀 말씀드리기 난처해서요...... 여러 사람 체면도 있고......"
이규백은 짐짓 뜸을 들이며 말꼬리를 사렸다.
"무슨 소린가, 지금! 어서 말하게, 어서. 뉘 집 처녀라도 망쳐왔나?"
"그게 아니고, 마약을...... 마리화나라는 마약을 여자들하고 피우다가 체포됐답니다.
이거 딴 일도 아니고......"
"뭐, 마약이라고? 여보게, 그럼 어찌 되는 겐가? 회사에는 전화드렸나?"
더욱 뜨겁고 급하게 밀려오는 목소리에서 몸이 달아오른 장모의 모습을 환히 보고 있었다.
"혹시 밖에 알려지면 장인어른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장모님한테 제일 먼저 알리
는 겁니다."
"응, 그거 잘했네 그런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넨 어서 민구를 좀 만나보게나.
그 어린것이 얼마나 무섭고 겁나겠나."
애가 타는 모정은 대학 2학년을 '어린것'이라고 하고 있었다.
"예, 제가 지금 곧 재판이 있어서 당장 가보기는 어렵습니다."
이규백은 미리 생각한 대로 둘러댔다.
"아이구, 그럼 어쩌나!"
장모의 목소리는 그대로 울음이었다.
"아무 걱정 마세요. 담당과장한테 잘 부탁해 놨습니다."
"아이구, 자네밖에 없네. 자네가 젤이야. 고마우이 고마워. 혹시 때리진 않겠지?"
장모의 목소리에서는 어느 때 없이 정이 뚝뚝 듣고 있었다.
"그럼요. 검사 처남한테 누가 감히 손을 댑니까. 그 점은 안심하세요."
"그렇지, 그래. 경찰은 검사님 꼬붕이니까. 그래, 우리 맏사위밖에 없다니까. 내가 연락
다 취할 테니까 자넨 재판 끝나는 대로 곧 가봐야 하네."
"예, 걱정 마세요."
이규백은 자신의 존재가 평소와 달리 확대되고 돋보이는 것을 느끼며 새 담배에 불을 붙
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판은 있지
도 않은데 장모를 더욱 애타게 해 자신의 값을 올리려고 재판이 있다고 꾸며대고 있으니.
내가 이러려고 검사가 됐나......?
처가 식구들을 상대로 고작 그런 잔머리나 굴리고 있는 자기자신이 혐오스럽고 비감했다.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는 그런 감정을 떼쳐내려고 이규백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상에서 벗어나던 그는 몸을 되돌려 어머니의 편지를 집어들었다.
아까 끊겼던 생각 하나가 다시 이어졌다. 어머니는 아들과 손자들에 대해서는 그리도 간
곡하면서도 며느리에 대해서는 빈말일망정 단 한마디가 없었다. 그건 시집을 함부로 아는
며느리에 대한 어머니의 엄한 징계인 셈이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다 가난이 죕니다. 저도 이러고 살고 실지는 않은데 ...... 어쩝니
까......
이규백은 무거운 발길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동생 규상이가 공대를 나온 것을 새삼스
럽게 다행으로 여겼다. 동생은 공업화의 바람을 타고 주가가 치솟기 시작한 공대를 선택했
었다. 법대가 아닌 것만 천만다행이라서 자신은 이의 없이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칭찬까지
해주었다. 그런데 막내동생 규동이도 법과를 피하듯 영문과를 택했다. 그 이유를 묻지 않고
또 흔쾌히 동의했다. 자신을 뒤따라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동의조건은 충분했다. 자신은
처가와의 관계 말고도 법조계의 삶에 대해서도 회의가 자꾸만 늘어가고 있었다.
드럼통 술상이 세 개밖에 없는 작은 술집인데 그나마 술상 두 개는 비어 있었다. 옷차림
이 구지레한 주모가 꾸벅꾸벅 졸면서 밤이 깊은 것을 알리고 있는데 술상 하나를 차지한 두
남자는 제멋대로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아휴 옘병헐, 드런 놈에 세상 확 불이나 싸질러버렸으면 좋겠어요."
"그거 조오치. 돈 있고 권력 있는 놈들끼리만 짜고 해먹으며 썩어 문드러져 돌아가는 요
런 드런 놈에 세상은 확 불을 싸질러버리는 것도 구제의 한 방법이지. 이 서울이 불타는 건
로마 시가 불타는 것보다 훨씬 더 예술적일 거야 규모도 더 크고 썩기도 더 썩었으니까 말
야. 우린 남산 팔각정에 떡 버티고 앉아서 불구경을 하면 네로 황제보다 더 황홀할거고 말
야. 크크크크......"
"아니 선배님, 끼리끼리 다해먹는 판인데 이새끼들이 즈이 후배들만 골라 채점 잘해 주는
것 아닌가요?"
"글쎄, 요놈에 세상이 한여름 생선 썩듯 푹푹 썩긴 했는데 말씀야, 설마 그 시험까지야 그
리 됐겠어?"
"설마가 사람 잡아요!"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다구."
"아이구, 사람 환장하겠네.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이걸 어쩌지."
"이봐 아우님, 대여섯 번 실패한 걸 가지고 뭘 그래. 실패는 병가상사라.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힘내라구."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 아무래도 돌대가린 것 같애요. 가망 없어요."
"거 무슨 소리야? 재수가 좀 없었을 뿐이야. 자네 머리 좋은 거야 고등고시 탁 붙은 자네
형 김선오 검사님께서 입증하잖아."
"아니오. 중, 고등학교 때부터 전 형보다 공부를 못했어요. 형은 언제나 1등인데 저는 기
껏해야 3, 4등밖에 못했거든요."
술기운을 못 이겨 상체가 흐느적거리고 있는 김선태의 눈에 눈물이 번지는 것 같았다.
"그까짓 건 한두 문제 틀린 거로 백지 한 장의 차이야. 날 보라구, 날. 마흔인 나도 버티
고 있는데 겨우 서른밖에 안 된 사람이 왜 그래. 여기서 포기하는 건 말야 노다지를 한 자
앞에다 두고 곡괭이를 던져버린 광부와 같다구 고등고시 합격! 그건 평생 파먹어도 되는 노
다지라구. 뻔쩍뻔쩍한 황금의 광맥! 그 얼마나 황홀해. 힘내라구."
술기운에 들뜬 큰소리 때문에 후줄근한 입성이 더욱 초라해 보이는 남자가 김선태의 어깨
를 힘주어 감싸안았다.
"그게 다그림의 떡이라구요. 이젠 더 이상 형한테 면목 없으니 때려 치워야 되겠어요."
"형이 그런 소릴 해?"
"말은 안 해도 벌써부터 그런 눈치를 보여왔어요. 야 임마, 냉수 먹고 속차려. 너 같은 돌
대가리로는 어림도 없어 형의 눈초리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어요."
"이봐, 이봐, 그건 자네의 열등감 과잉이야. 나처럼 마누라 삯바느질 시켜먹으면서두 꿋꿋
하게 버티고 있는데 젊은 사람이 그 무슨 못난 소리야. 형한테 돈 좀 얻어쓰는 것 땜에 기
죽지 말라구. 형수가 날마다 돈 마구 긁어들이잖아. 산부인과들, 그거 너무 쉽게 떼돈 버는
거야 세상이 다 안다구. 연애가 성행해 처녀들이 몰려들고, 산아제한바람으로 주부들까지 줄
을 서는 판이니 제일 수지 맞는 데가 산부인과인 거야 당연한 거지. 이봐, 사위 사랑 장모
고, 시동생 사랑 형수라잖아. 형을 상대하지 말고 형수님한테 길을 잘 닦으라구 고시만 패스
하는 날에는 그까짓 돈 딸라변 쳐서 갚아버릴 건데 뭘. 힘내, 힘 !"
"말 말아요, 그 잘난 여자, 우리 형수. 니미럴...... 관둡시다."
김선태는 술김에도 창피한 생각이 들어 날 만나주지도 않아요, 하는 말을 삼켜버렸다.
"아이구, 이제 그만들 가슈 곧 통금 돼요, 통금."
언제 깨어났는지 주모가 갑자기 소리지르며 팔을 내저었다.
"그래, 민주 시민은 통금을 지켜 제때 귀가해야지. 여보게 선태, 그만 가자구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거니까."
그 남자는 추레한몰골에 어울리지 않게 아까부터 유식한 말들은 혼자 다 쓰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렇지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믿어야 되겠지요. 아주머니, 여기 얼만가
요? 드런 놈에 세상......"
김선태는 겨우겨우 몸을 가누며 바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고 있었다.
그 남자는 문 앞에 기대 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간을 묻고 있었다. 서너 번째 사람이
11시 반이라고 하며 바쁘게 걸어갔다.
"이봐, 인생이란 말야 때론 눈물이고 때론 한숨이고 때론 막막함이고...... 그러다가 바람
으로 사라져가는 거야. 그 사이사이에 빛이고 영광을 끼울려고 몸부림들 치는 거지. 그래 봤
자 물거품이고 티끌이기는 다 마찬가지야. 이 박만길의 말 알아듣겠어?"
김선태와 어깨동무를 하고 뒷골목을 벗어나며 그 남자는 마치 시를 읊듯 가락을 넣고 있
었다.
"일만 만 자에 길할 길 자, 이름은 참 기똥찬데 말이죠......"
"왜 고시엔 16번씩이나 떨어졌냐 그거지? 가난하고 무식한 농사꾼이었던 우리 아버지의
욕심이었지."
박만길은 끄윽 트림을 하며 시내버스에 술 취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선배님, 잘 가세요. 전 건너갑니다."
"이봐 선태, 내일 꼭 도서관에 나오라구 영원한 낙방인생은 없으니까."
박만길은 휘적휘적 길을 건너가고 있는 김선태를 향해 소리쳤다.
"오빠, 왜 이러고 다녀?"
대문을 따주며 김명숙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기집애가 왜 또 잔소리야."
"다들 자니까 조용히 들어가. 떠들어봐야 망신살만 끼니까."
김명숙은 목소리를 낮추며 앞서 걸었다. 작은오빠가 또 고시에 떨어진 것이 속상했고, 날
마다 술이 취해 늦게 들어오는 것이 셋방 사는 사람들 보기에 창피스러웠다.
그만 좀 정신차리고 맘 독하게 먹으라고, 큰오빠가 이런 걸 보면 또 뭐라고 하겠느냐고
작은오빠에게 야무지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김명숙은 벽에다 얼굴을 붙이듯 하며 누워버
렸다. 술 취한 사람 잘못 건드렸다가는 한밤중에 무슨 소란이 벌어질지 몰랐다. 작은오빠는
술을 마시지 않은 맨정신에도 자기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아주 싫어하며 화를 내거
나 흥분해서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그럴 때면 꼭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 같고는 했다. 그러
나 딱 한 사람 큰오빠 앞에서는 꼼짝달싹을 못하는 불쌍하기 그지없는 위인이었다.
"그래, 다 그게 그런 거야. 다 나그네 길이라구 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라
구. 근데 말야...... 그게 근데...... 그게 또 아니라구......"
옷을 입은 채 방바닥에 쓰러진 김선태는 신음처럼 웅얼거렸다.
작은오빠가 잠이 드는 기척을 등뒤로 느끼며 김명숙은 사무쳐오는 슬픔을 느꼈다. 자신의
신세나 작은오빠의 신세나 생각할수록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큰오빠가 내비치는 눈치대
로 어쩌면 작은오빠는 영영 고시를 통과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나이만 자꾸 먹어가다가 결
국 그 일생이 어찌 될 것인가......
"또 볼 거냐?"
작은오빠가 고시에 떨어지고 나서 만난 자리에서 큰오빠가 꺼낸 말이었다. 큰오빠의 밑도
끝도 없는 그 말과 입 언저리를 스치는 냉소는, 더 해봤자 소용없으니까 이제 그만 포기해,
하는 말을 담고 있었다. 묵묵무답인 작은오빠는 그 숨겨진 말뜻을 알아듣는 눈치였다. 큰오
빠의 그런 무시에 대항하듯 작은오빠는 끝내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으로 다시 고등 고시를
보겠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 정도면 그래도 큰오빠는 작은오빠에게 예의를 갖춘 셈이었다. 자신에게는 너무
매정하게 하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여러 잔소리할 것 없어, 고향에 내려가서 시집이나 가!"
검사 오빠에 공순이 여동생, 이건 큰오빠만 소스라칠 일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큰오빠는 그 창피하고 망신스러운 물건을 저 먼 시골 구석에다 처박아두고
싶어했다.
"큰오빠가 도와주기 싫으면 관둬요. 난 내가 하고 싶은 공부 꼭 할 거예요. 요새 세상
에 여자나 나이가 다 무슨 상관이에요."
자신은 작은오빠하고는 달리 큰오빠에게 이렇게 못을 박았다.
"시건방지게, 너 그게 말이라고 해? 광자나 너나 계집애들이 어째서 좀 여자답지 못하고
그따위로 억세고 되바라졌냐. 어디 느네들 맘대로 해봐."
큰오빠는 화를 내고 자리를 떠버렸다. 그후로 몇 달 동안 만나지 않아 아직까지도 올케의
얼굴을보지 못했다. 이 자취생활은 작은오빠가 큰오빠한테서 돈을 받아와 셋방을 얻어 시작
되었다. 둘의 생활비는 작은오빠의 하숙비로 해결할 수 있었다. 방 하나에서 오빠와 함께 기
거한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그러나 공원 시절의 비좁던 방에 비하면 불평을 따로
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장성한 남매가 한 방을 쓰는 것은 가난한 형편들에 흉거리가 될 수
없는 흔한 일이었다.
언니가 간호원으로 서독에 가 있는 것은 큰오빠가 검사가 된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
었다. 큰오빠가 검사가 된다는 것은 법대에 합격하면서부터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일이었
다. 그러나 언니의 강단도 무서운 데가 있기는 했었다.
언니한테 편지를 쓰다 보니 자그마치 나흘이나 걸렸다 편지를 쓰기 시작하니 지난날을 더
듬지 않을 수가 없었고, 지난 세월을 더듬다 보니 설움과 눈물이 복받쳐올랐고, 눈물을 떨구
고 훔쳐가며 지난 10년을 줄이고 줄여서 엮어도 대학노트 앞뒤로 다섯 장이었다.
서독은 역시 멀고 멀어 한 달이 넘어 걸려 언니의 답장이 왔다. 반가움이 철철 넘치는 편
지에서 언니는 앞날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큰오빠와 달리 무작정 시집을 가라는 것이 아니
라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물음은 힘이 되었다. 그리고 불현듯 '나도 서독으로 가자!' 하는생각이 굳
어졌다. 그 생각은 갑자기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 언니의 소식을 듣고부터 전에 가졌던 생각
들과 뒤섞이기 시작했었다. 그 전에 품었던 생각은 처지에 따라 조금씩 변해 미용사나 디자
이너가 되고 싶었다.그런데 서독 간호원은 여기서보다 예닐곱 배나 더 번다고 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자신이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하고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으니까
간호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이가 너무 많기는 했지만 못 다닐 것이 없었다.사람
대접을 받는 직업에 돈도 그렇게 많이 벌게 되는데 좀 창피스러운 것쯤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2-3년 전에 진작 집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언니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언니
한테서 답장이 올 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선배님, 선배님, 전 영영 고시가 안 될지도 모르지요?"
김선태는 마치 생시처럼 또렷하게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김명숙은 그 잠꼬대에 가슴 섬뜩해지며 한숨을 쉬었다. 고등고시는 몇십 대 일이 아니라
몇백 대 일인지 모른다고 했다. 하늘의 별 따기가 바로 그것으로, 한 사람이 합격해서 웃으
면 수백 명은 낙방해서 울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작은오빠가 영영 합격을 못하면...... 김명
숙은 그 불길한 생각에 진저리치며 잠들려고 뒤척였다. 공원 시절에는 그렇게도 쏟아지던
잠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작은오빠, 힘내 고등학교만 나와서도 고등고시 되는 사람들도 있잖아. 난 작은오빨 꼭 믿
어."
김명숙은 다음날 아침 도시락을 작은오빠 앞에 내밀며 말했다.
"모르겠다. 해보긴 또 해보는데......"
헐어빠진 가방에 도시락을 넣는 김선태의 손길이 목소리만큼 무거웠다.
며칠이 지나 김명숙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언니의 편지를 받았다.
"...... 너의 꿈은 잘 알겠다만 여기 독일에 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겠다. 왜 그러는고
하니 우선 돈벌이가 달라져서 그런다. 한국보다 여섯 배나 일곱 배가 더 많이 벌린다는 것
은 몇 년 전 계산이고 그동안에 절반 가까이 줄었다. 여기 월급이 깎인 것이 아니고 그동안
우리나라가 경제발전하는 것에 따라 사람들의 월급이 많아지면서 그리 되었다. 또 집값 땅
값 같은 것도 다 올라 이런 식으로 몇 년 더 가다가는 독일에 와서 고생한 것이 헛고생이 되
지 않을까 우리 간호원들이고 광부들이고 다 걱정이 태산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여기서 간호원들이 하는 일이 너무나 뼛골 빠지게 힘이 든다.
말이 났으니 솔직하게 하는 말인데, 한국의 간호원과 여기 간호원은 일의 범위나 방법이 아
주 달라 한국의 간호원들이 신선 놀음을 한다면 여기선 막노동자나 머슴처럼 일을 한다. 한
마디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똥오줌이 묻은 더러운 옷을 갈
아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하는 건 한국에선 다 보호자들이 알아서 한다. 그러나 여기선 전
부 간호원들이 해내야만 한다.
명숙아, 너에게까지 이런 고생 시키고 싶지 않다. 내가 돈을 조금씩 더 보낼 테니 학원비
로 쓰고 네가 원하는 길을 택해라. 그리고 한 가지 꼭 약속해라. 여기 일이 힘들다는 건 어
머니한테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언니이......"
김명숙은 편지를 떨어뜨리며 눈을 훔치고 또 훔쳤다 언니의 모습과 함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카페 게시글
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 2 부 유형시대 (6권)ㅡㅡㅡ 49. 고단해라 인생길
살아있는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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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1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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