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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유엔이 공인하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로 선정된 송파(松坡)다.소나무(松)가 울창한 언덕(坡) 송파(松坡),
소나무가 가득한 언덕이다.소나무는 자고로 악기(惡氣)를 막아주는 울타리 기능을 한다.그래서 왕릉 북쪽에 소나무를 둘러친다.
사상누각(沙上樓閣),모래 위에 건물을 올린다는 말이다.그 모래벌판에 아시아에서 사상 최대의 평지토성(土城)을 만든 우리다.
출중한 토목기술은 마침내 잠실 모래벌판에 123층의 고층빌딩을 올렸다.그 송파나루길은 123층 고층빌딩 맞은편 지하철 잠실역
3번 출구 앞 만남의 공간에서 출발한다.
자양반도 동남 쪽에 딸린 잠실은 송파강 북쪽의 땅이었다.중종 16년 큰 홍수가 났다.그때 자양반도 끝자락으로 새내(新川)가 났다.
그때 잠실 땅은 섬으로 변한다.'매미가 하품을 하거나 개미가 침을 뱉어도 잠실은 물에 잠긴다.'물에 한없이 약한 잠실의 속성을
상징하는 말이다.잠실의 치수(治水)문제는 조정의 골치덩어리였다.잠실섬과 자양반도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여러차례 있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한다.
1971년 송파강을 메워 대단위 잠실단지를 조성한다.한강은 새내와 갈라져 송파강으로 흘렀다.그 강이 한강의 본류였다.
송파강 입구 성내천 부근부터 물막이공사를 벌였다.그로부터 송파강을 메워 땅으로 만들고 새내가 한강 본류(本流)가 된다.
새로 조성된 잠실단지에 강이 흐르던 곳임을 알리는 하적호(河迹湖)을 만든다.두 개의 석촌호수 동호(東湖) 서호(西湖)다.
그 옛날 송파강을 누비던 백제의 배 한선(韓船)이 있었다.온조가 백제를 건국하기 이전 잠실에는 호족들이 살았다.
석촌동 백제국립묘지 가장 큰 적석총 동쪽 일반묘에서 발굴한 나무조각을 조립한 결과 옛날 배에 달린 노임을 확인했다.
당시 배의 규모를 측정해 지은 한선(韓船), 백제의 배는 송파강만 드나들지 않았다.이웃 나라를 오가는 국제선박으로
이미 해양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강에는 바다와 물살이 거센 강을 운항하는 첨저선(尖底船)과 물살이 빠르지 않고 얕은 강을 오가는 평저선(平底船)이 다녔다.
서호 쪽에는 대규모 삼밭 패션단지가 유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그 삼밭은 뽕나무밭으로 바뀌면서 패션단지 잠실(蠶室)이 들어선다.
잠실 뽕나무 밭은 옛 부리도 일대에 조성된다.한양도성 밖 동잠실이 부리도일대에 들어선 것이다.
오늘날 상전백해(桑田碧海)와 같은 놀라운 잠실의 변화는 풍수에서는 이미 예견된 것이다.
누에는 뽕잎은 마구 먹어댄다.누에의 먹잇감 뽕나무가 가득 들어찬 잠실은 누에가 마구 파먹는
뽕잎처럼 급격한 변화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다.1971년 송파강과 한강 샛강이 갈리는 성내천
부근부터 시작된 송파강 물막이공사는 잠실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5년 옛 부리도(30만평)에 남서울운동장이 들어선다.1981년 서울올림픽이 유치되면서 잠실종합운동장이 된다.
이 잠실종합운동장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다.올림픽경기 사상 최대 규모의 성공한 올림픽으로
기록된 서울올림픽이다.서울올림픽은 잠실 변화의 기폭제가 된다.
부리도 이웃에는 잠실섬(360만평)이 있었다.강물이 많이 흐르면 두 섬은 하나로 보였다.
강물이 빠지는 갈수기에는 부리도가 떠올라 잠실섬과 함께 두 개의 섬이 잠실을 지켰다.
백제 때 잠실은 또하나의 패션단지로 우수한 복식문화를 잉태한 곳이다.
전지왕의 여동생 신제도원이 패션디자이너로 일본에 건너가 의복기술을 전파한다.
일본에서는 신제도원을 의신(衣神)으로 숭배하며 해마다 축제를 연다.
잠실은 당시에도 패션단지로 유명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태종 때 송파강가 삼밭단지에 삼밭나루 삼전도(三田渡)가 들어선다.
삼밭나루는 잠실에서 가장 큰 중심나루의 기능을 한다.
1636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조선의 인조는 오랑캐 청의 왕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치러야 했다.
삼전도는 그때부터 발길이 끊겨 주 나루의 기능을 그 옆 송파나루에게 넘겼다.
송파나루가 잠실 제1의 나루로 기능한다.송파나루에는 전국의 5대 상설시장 송파장이 들어선다.
특히 송파장는 전국에서 가장 큰 소시장으로 유명했다.
송파장을 찾는 장사꾼들에게 즐길거리로 '송파산대놀이'가 제공되었다.
경강상인들은 시전상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도성 동남쪽 송파장에는 '송파산대놀이',
북서쪽 다락원에는 '양주별신굿놀이'를 육성시켰다.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장은 쓸려갔다.
일제는 송파장을 다시 세우지 않았다.소시장은 신설동으로 옮겼다.
서울놀이마당 근처 석촌호수가 공원에서 '송파를 빛낸 얼굴' 한유성(韓有星)을 만난다.
길옆에는 ‘송파를 빛낸 얼굴’이라는 고(故) 한유성 옹의 흉상이 있다.
한유성은 190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여나서 1994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유성은 송파산대놀이 기능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제 49호로 송파진의 산 증인이었다.
"아버지가 여기가 난전을 하였기 때문에 송파장의 모든 것을 가까이서 보고 자랐습니다.
날만 새면 장터에 나가 동전 줍는 게 일이었지요.어른들이 동전 정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지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그런 흥청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열한살때부터
송파산대놀이를 익히게 되었지요."
1993년 7월 8일자 동아일보는 '토박이 한유성이 전하는 그 시절의 송파'를 싣고 있다.
"송파장의 본거지는 지금 석천호수 밑으로 가라 앉아 버렸습니다.
객줏집들은 석촌호수 남쪽에 난전 터는 객줏집보다 더 남쪽 석촌호수길 근처에 줄지어 있어지요."
보유종목은 눈끔쩍이·포도부장·샌님이다. 본업은 상업. 학력은 서당에서 한자를 익혔다.
윤종현(尹宗鉉)에게 송파산대놀이의 다양한 기예를 배워 50여년간 연희에 종사하였다.
송파산대놀이 기능보유자인 고 한유성(韓有星)씨는 생전에 송파산대놀이의 유래를 전한다.
"옛날 마을에 강진사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하루는 그가 마을의 청소년들을 모아 놓고 얘기를 해주었다.
옛날에 범씨성을 가진 어부가 한강에서 고기를 낚다가강 건너에 좋은 솔밭이 있음을 보고 건너와 쉬다가 잠을 들었다.
한참 자고 있는 도중, 물이 불어나 염씨의 몸을 적시자 잠이 깨었다. 또 일설에는 강 언덕이 무너져 내려
염씨가 물속으로 굴러 떨어졌다고도 한다.
그 뒤로 이 지역을 [염송파], [송패]라 했다." 전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송파 시절에는 소나무숲이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나서 사방에 장승(장생)을 세웠으며,
동으로 퇴계원과 송파, 남으로 노량진, 북으로 구파발의 탈놀음패를 불러다가 사방에서 놀이판을 벌였다.
모두가 잡귀를 물리치고 새서울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뜻이었다.그 후에 4대문을 쌓았다."
서울놀이마당 남쪽 사거리부터 배명중고등학교까지의 길 삼학사길이다.
병자호란 때 주전파(主戰派)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명의 학사(學士)를 기리는 길 삼학사길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견디다 못해 삼전도(三田渡)의 항복으로 굴욕을 겪으면서 화의가 성립되자 청의 요구로 이들 세 사람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홍익한은 1637년 2월초에 청군이 회군하는 길에 평양에서 잡혀서 25일에 청의
심양에 이르렀으며, 윤집과 오달제는 4월 15일에야 심양에 이르렀다. 19일 용골대가 왕명으로 이들에게 가족과 함께 청나라에서
살기를 권유하자, 이를 완강히 거절하여 윤집과 오달제는 서문 밖에서 처형당하였다. 홍익한은 10월에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이
있고, 윤집과 오달제와 같이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이들이 처형당하기 전에 청 태종이 친히 국문하였다.홍익한은 국문에 당당히 맞서 척화를 주장했던 떳떳한 대의를 밝히면서 나라에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이상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또한 윤집도 청 태종의 회유적 설득에 완강히 거부하고, 몸바쳐
나라를 구하려 하였던 뜻은 죽어도 떳떳하다는 기개를 보였다. 이에 태종도 이들의 기개에 오히려 감탄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충의와 대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문을 내리고,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윤집에게는 충정(忠貞),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각각 내렸다.
조선의 인조는 농성 45일만에 청의 죄수 옷을 입고 삼전도 수항단(受降壇)아래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청의 왕에게 세 번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짓는 치욕의 삼배고구두례(三拜九叩頭禮)를 치려야 했다.
왕의 굴욕적인 항복의식이 끝나고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 내외 등 왕실가족,조선의 신하들이 그 굴욕의 항복례를
치렀다.차디찬 칼바람이 부는 삼전도 모래벌은 눈물과 한으로 덤벅이 되었다.
인조는 오후 늦게 송파강을 건너 창경궁으로 어렵게 환궁을 했다.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신하 등은 청의 왕에게
청의 심양으로 인질로 끌려갔다.그 후 60만명이 청나라에 인질로 간다.그 중 여자가 30만명 정도나 됐다고 전한다.
인질로 끌려간 여자들은 청에서 정조를 잃었다는 이유로 시집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냥년의 누명을 쓴 채 한을 안고 목숨을 버리는 여인들이 속출하였다.그 여인들과 청의 남자 사이에 태여난 아이들은
'호로자식'으로 냉대를 받아야 했다.
1636년 11월 청은 조선 조정에 '청태종의 공덕비'를 세워달라고 요구했다.공덕비의 문장도 조선에서 지으라고 했다.
당시 4대 문장가 이경석 장유 조희일 이경전 등이 비문을 지을 인물로 뽑혔다.이경전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나서지 않았다.
조희일은 글이 안되게 거칠게 문장을 지어 탈락된다.이경석과 장유가 최종 찬술자로 뽑혀 그 '공덕비'를 짓는다.
청나라은 이경석의 비문을 보완해 공덕비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이경석은 인조의 간곡한 요구로 비문을 보완한다.
‘글 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이경석은 글을 가르쳐 준 형 이경직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이경석은 나라의 보존이란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명예란 소절(小節)을 버린 것이다.
이 비는 거북 받침대를 상당히 큰 크기로 만들었다. 더 크게 만들라는 요구에 또 한번의 치욕을 당하며 더 큰 받침돌에 비석을 세웠다. 높이 약 5.7m로 만주 지안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약 6.4m)에 버금가는 매우 큰 비석이다. 이렇게 비석의 크기 역시 조선에서 준비한 것은 묵살된 것이다. 청나라에서 요구하는 크기로 변경되어 비신 12척에 용두 2척 2촌으로 그 규모가 커졌다. 비문은 세 가지 문자로 기록하였다. 정면은 청나라 문자와 몽고 문자이고 후면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비문의 글씨는 당시 형조 참판인 오준이 쓰고 비문 위에 전서로 쓴 `대청황제공덕비`란 글씨 일곱 자는 여이징이 썼다.
1916년 쓰러진채 방치된 삼전도다.참으로 삼전도비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건립 당시부터 치욕의 상징이었던 삼전도비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조선과의 조공관계가 단절되자 삼전도비는 한강에 던져졌다. 세워진 지 256년 만의 일이었다. 세월은 250년을 훌쩍 넘겼다.
당시의 치욕은 여전했다. 일제는 강물 속 비석을 찾아서 다시 세웠다. 그랬던 것을 1956년에 땅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1963년 대홍수로 인해 다시 땅 위로 드러나 인근의 빈터로 이전을 거듭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2007년에는 누군가 삼전도비에
붉은 스프레이로 ‘철거’ 등의 글씨를 쓰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의 수사 결과 평소 역사에 관심이 있던 범인은 굴욕적인 유물을
철거해야 한다며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2010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현재의 석촌호수 서호언덕에 이 비는 서있다.
치욕의 삼전도비는 이곳을 지나는 선비들에게는 굴욕과 분노의 흉물이었다.
"송파진을 지나는데, 큼직한 바위가 강 사이에 서 있고, 채색 누각이 덮고 있다. 바로 정축년(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주를 위해
세운 비(삼전도비)이다. 철퇴로 내려쳐서 강 속으로 쳐 넣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석실(石室) 이후로는 협곡의 기운이 서글프고
침울하여 여울 소리가 거세고 빠른데다가 바위가 모두 흑요색이어서,특별히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곳은 없다. 다만 구비마다
인가가 모두 물가에 임해 있어서 사랑스러우며, 밤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기르는 개, 닭이 짓고 울어서 마치 산굴로 난리를 피해
들어온 백성들의 거처와 같다. 배를 끌어서 덕담(徳潭)에 이르자 뱃사람은 달빛을 띠고서 밥을 먹는다."
윤행임(尹行恁,1637~1762)이 <동정기(東征記)>에서 이렇게 삼전도비의 한을 말한다.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기기 전에는 비석 곁에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그린 부조물(1982년 김창희 조각)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동판에다 병자호란 당시의 내력을 적어 놓았다. 그 마지막 구절은 "수난의 역사가 서려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이 같은
오욕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민족의 자존을 드높이고 자주, 자강의 의지를 굳게 다져야 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문장은 아쉽게도 이 부조물은 비석을 옮기면서 함께 사라졌다. 함께 옮겨오지 못한 것이다.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고 싶은 마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한 논객은 아쉬워하며 이를 개탄하였다. 분명 삼전도비 역시 슬픔과 치욕의 역사적 산물이다.
여기서 지난 시대의 굴욕적인 역사적 상황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삼전도비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산 이경석이다.
그의 신도비가 우여곡절의 세월을 살아온 이경석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글자가 전혀 없는 슬픈 사연의 백비다.무자비(無字碑)라고도 한다.
백헌의 손자 이하성(李廈成)은 1703년(숙종 29년) 결국 서계 박세당에게 할아버지 이경석의 신도비에 새겨 줄 것을 청했다.
서계 박세당은 소론으로 당대의 문장가였다. 문중에서는 같은 당파(소론)여서 ‘손이 안으로 굽었다’는 지적을 우려해
서계만은 피하려 했다.당시 노론의 세상에서 그의 청을 들어줄 사람이 달리 없었다.
서계 박세당은 손자 이하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경석 신도비를 찬술했다.
박세당이 찬술한 백헌 이경석의 신도비는 노론 유생들의 심한 반발로 빛을 보지 못한다.
우암 송시열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그 문인들은 박세당을 사문난적,즉 ‘주자학을 문란하게 만든 도적’으로
몰아 삭탈관직하여 귀양보냈다.덩달아 박세당이 지은 이경석 신도비문은 불태워졌다.
그로부터 62년이 흐른 뒤(영조 30년, 1765년)에서야 그의 비석에 글이 새겨졌다.
글씨는 당시 완도의 신지도에 유배돼 있었던 원교 이광사가 썼다.
이광사는 이경석의 형 이경직의 고손이다.
이경직은 동생 이경석에게 글을 가르쳐준 형이다.그 이경직의 고손자 이광사다.
그는 동국진체의 완성자였다.신도비는 그러나 세워지자마자 수난을 당했다.
이번에도 노론 유생들이 비석을 쓰러트리고,비면을 모조리 깎아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분이 안 풀렸는지 비석을 아예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그로부터 200여년 뒤 빛을 본 비석은 전신이 상처다.
글자 하나하나 연마석으로 갈고, 정으로 쪼았으니 성할 리 없었다.
잠실근린공원 안에 있는 부군당 비문이다.
인조(仁祖) 때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 당시 서남쪽 성벽을 맡아 공사하던 이회(李晦)는
다른 구간보다 튼튼히 잘 하여 타의 질투와 모함으로 무고하게 처형을 당하였다.이회(李晦)의 부인 송 씨(宋 氏)는
남편의 축성작업을 재정적으로 도우려고 쌀을 비축하였으나 남편이 처형당한 것을 알고 한강(漢江)에 빠져 자결하였다.
이에 인근 주민들이 이 자리에 부군당(府君堂)을 지어 송씨(宋氏)의 넋을 달래왔다고 한다.현재 부군당은 없어지고
그 유래만 전해지고 있다.
1996.12.24
송파구청장
지금부터 3백 수십년전 조선 인조때 경기도 광주 유수 이서는 남한산성의 축성공사를 둘로 나누어 남쪽을 부하 이회에게,
북쪽을 중(僧) 벽암에게 각각 분담시켰다.이회는 그날부터 낮과 밤, 일심단성으로 오로지 충성에만 노력하여 돌 하나,
흙 한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을 잊다시피 몰두하였었다. 그러는 중에 축성자금이 부족하였으므로 마침내 자기 사재까지 전부
던지었다.그렇게 해도 공사를 준공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여 하루 이틀 공사는 늦어만 가고 있었다.
그 반면 벽암의 공사는 착착 진행되어서 기일안에 준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가에서 받은 공사비 중에서 남는 금액까지도
관가에 반납하였다.일이 이렇게 되자 정직한 이회는 점점 의심을 받게되었다.
"이회가 사리사욕을 탐하고 주색에 빠져서 공사를 게을리 한다."
벽암의 터무니없는 모함에 의하여 관가에서는 벽암의 말만 믿고 이회를 서장대에서 참수형을 시켰다.
형을 집행하기 전에 그는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신이 죽기는 합니다만 죽은 순간 한 마리의 매가 날아올 것이나
매가 날아오지 않으면 신의 죄는 죽어 마땅하되 매가 날아오면 죄가 없는 줄 아십시오」라고 말 하였으나
윗자리에 앉은 이서는 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빨리 처형하라고 명을 내렸다.
곧 이어 번쩍이는 칼날에 비참하게도 이회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그때 피흐르는 목위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와서
이회의 시체를 맴돌고 수어장대 근처 바위 위에 앉아 무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이상히 여겨 그 매가 앉아있던 바위를 쫓아가 보니 매는 없고 다만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매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그 뒤 관가에서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실지조사를 해본 결과
벽암이 쌓은 성은 한 곳도 정성들인 곳이 없이 허술하였으나 이회가 쌓은 성은 금성철벽같이 견고하였다고 한다.
이를 알게된 관가에서는 많은 돈을 하사하여 서장대 근처에 사당을 세워 청량당이라 하고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한편 이회의 부인 송씨는 남편이 축성비가 부족해서 고심하는 것을 보고 하루는 그가 남편에게 「제가 돌아다니며 기부금을 받아
축성비에 보태겠습니다」하고는 집을 나간지 여러 달만에 많은 양의 기부금을 얻어서 배에 싣고 세밭나루(三田渡)에
다다랐을때 뜻밖에도 남편이 참형을 당했다는 슬픈 소식을 듣자 통분하여 싣고 온 쌀을 모두 강물에 던져버리고 자신도 한강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이 뒤부터 이 강을 쌀섬여울(米石灘)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송씨가 강에 뛰어들어 죽은 뒤부터 안개가 낀 날이나 어둑컴컴해질 무렵에 배를 타고
이 쌀여울을 지날때는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의 모습과 곡성이 들리곤 하였다.
사공들이 여인의 모습에 홀려 배를 몰다보면 삼성동앞 어린애같이 생긴 무동도에 부딪혀 파선하여 익사하곤 하였다.
그래서 삼전리 사람들은 이같은 불행한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송씨 부인의 원혼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상의끝에
쌀섬여울 에서 100m 동쪽 강변에 부군당을 세워놓고 송씨부인을 제사 지내기로 하였다.
그 뒤부터 배가 파선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관가에서는 그 부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강가 언덕위에 사당(하주당)을 세워
영을 위로하였다고 한다.서울 송파구 잠실동 잠실근린공원 안에 잠실부군당 기념비를 마련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