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에니메이션에는 신화가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관람하고 나오면서 나는 고전을 만난듯한 느낌이었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였다.
이야기의 시작과 마무리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너무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는 또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그의 사상속에 풍부하게 스며있는 신화들이다.
이상한 이야기와 신비한 세계가 펼쳐지는 이야기속 곳곳에 신화적 요소가 숨어있다.
그 신화적 요소들은 모두가 상징의 형태를 띠고 있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강열한 에너지로 파고든다.
영화는 이상한 길로 접어든 치히로의 가족이 신비한 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문은 터널과도 같다.
현실의 세계와 신비의 세계를 연결하는 문.
그것은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 문을 통과하면 마치 꿈과도 같은 세계가 펼쳐진다.
치히로는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 마치 깊은 꿈속으로 서서히 잠겨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세계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 들어갈수록 더욱 더 깊은 꿈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점점 더 원초적인 상징이 풍부해지는 신화의 세계,
즉 원형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아빠와 엄마가 돼지로 변하는 것을 시작으로 치히로의 모험의 세계는 시작된다.
그것은 곧 무의식 세계의 원형상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순간이고,
그림자가 출현하는 순간이다.
무수한 신들의 출현은 집단무의식속에서 분화되지 못한 에너지 덩어리들이다.
그리고 개성화의 시작을 위해 거쳐야한 통과의례의 길이다.
무의식속에는 그림자와 같은 무시무시하고 어둠고 두려운 존재가 있지만
또한 자신을 도와주는 의로운 원형상들도 있다.
치히로가 신비의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에게 한 소년이 나타난다.
그는 치히로에게 가야할 길을 가려쳐주고 앞으로 살아가야할 방법을 알려준다.
꿈을 꾸다보면 우리는 꿈속에서 아니무스(남자에겐 아니마)를 만나게 되는데,
치히로의 아니무스는 바로 이 소년이다.
이 소년 '하쿠'는 치히로에게 힘을 부여하는 존재이다.
하쿠는 도망치려는 치히로를 그 세계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해 준다.
도망치지 말고 맞설것을 요구한다.
치히로는 처음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무의식에 '직면하기'를 시작한다.
작은 것에도 자극을 받는 미약한 힘이지만 서서히 그 힘이 늘어간다.
다리를 건너는데 성공한 치히로는 다음으로 '가마할아범'을 만나게 된다.
가마할아범은 그림자적 원형의 요소로 등장한다.
치히로는 하쿠가 시킨대로 가마할아범과 맞서게되는데
그 결과 가마할아범은 치히로와 관계없는 무뚝뚝한 거미괴물에서
치히로를 도와 주는 또다른 좋은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하녀 '린'을 만나는데
그녀 또한 또다른 대상으로서 치히로를 도와준다.
그렇게 도와 주는 대상들에 의해 길을 인도받은 치히로는
가장 꼭대기층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마녀 '유바바'를 만나게 된다.
케릭터가 말해 주는 것과 같이 유바바는 마녀이고,
치히로가 극복해야할 대상이 된다.
그녀는 나중에 나오지만
엄마로서 자기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는 나쁜 엄마상의 원형이기도 하다.
치히로는 그 마녀 유바바와 직면할 것을 요구 받게 되는데,
유바바의 위협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잘 버팀으로해서
그의 모험이 한층 더 깊어지게 된다.
이 사건은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유바바는 치히로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계약서에 싸인을 하게 되는데,
계약조건은 치히로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치히로는 그 곳에서 살아가는 조건으로
'센'이란 이름으로 살 것을 요구받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치히로는
살아남기위해 센이란 이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순간이다.
그것은 "참자기의 모습으로 사는가?"
아니면 "거짓자기의 모습으로 사는가?"와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삶에서 살아남기위해
거짓자기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거짓자기의 모습에 사로잡혀 버리면
참자기는 움츠려들고 무의식속으로 숨어버린다.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한채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기억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하쿠는 마녀의 방에서 센을 만나는 순간
다시 이름을 물어본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이름
'치히로'란 이름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 온천장에서 일하는 모든 일꾼들은
자기의 진짜 이름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모두가 자신의 거짓자기에 사로잡혀서
그저 자신에게 부여된 상황에 따라 휘둘리면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진짜 이름을 기억하는 '치히로'는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안다.
금이나 보물같은 금전적인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의 목표를 잊어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 결과 그에게는 선물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강의 신에게서 받은 '경단'과 같은 것이다.
치히로는
이제 신비의 세계에서 한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데,
그러한 힘은 그의 주변에 있는 도와주는 대상으로부터 나온다.
그의 내적 선한대상들은 곳곳에서
그를 적절하게 도와 준다.
그의 무의식의 세계가 분리개별화 되면서 각각 분화되어
통합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는 또다른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다.
센에게 나타난 또하나의 문제는
얼굴없는 요괴 '가오나시'의 등장이다.
가오나시는 외로운 요괴이다.
얼굴이 없다는 특징은
어린시절 반영의 경험과 연결된다.
유아시절 엄마로부터 반영 받지 못한 경험은
자신의 모습을 형성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게 된다.
결국 자신의 얼굴이 없는 만큼
언제나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친구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가오나시는 나와 너의 경계가 없는
나와 너가 섞여버린 관계를 지을려고 한다.
그러나 경계를 형성하는 센에게 가오나시는 분노하게 되고.
분노한 가오나시는 뭐든지 먹어치우고,
자기속으로 흡입한다.
결국 센은 경계가 허물어진 가오나시와
직면하기를 요구받게 된다.
그 직면을 통해 얼굴없는 요괴는
그 속에 무차별하게 우겨넣었던 대상들을 토해내게 되고
다시 본래의 자기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센과 친구가 되어 또다른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최고의 위기의 순간은
하쿠의 원형인 용의 부상이다.
하쿠가 심한 상처를 입고 돌아오자
상황은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접근한다.
가장 깊숙이에 자리하고 있는 문제로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센은 하쿠를 구하기 위해 유바바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마녀 유바바의 아들 보우를 만나게 된다.
마녀 유바바가 치히로의 나쁜 엄마상이라면
보우는 치히로의 성숙하지 못한 자기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균들이 우글거리는 바깥세상이 두려워
늘 방안에 갖혀 살아야 하는 보우.
신비의 세계로 들어올 때 엄마의 팔을 붙들고 있던
연약한 치히로의 모습과 비슷하다.
미성숙한 자기의 모습, 보우를 만난 센은
이제 온천장을 떠나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시작한다.
물론 자라지 못한 아기 보우는
또 다른 마녀 제니바에 의해 뚱뚱보쥐로 변하게 되지만
결과를 놓고 볼때 제니바라는 지혜노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된다.
제니바를 만나러가는 여행은 먼길을 가야 했다.
제니바를 만나 화해를 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곧 엄마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고
좋은 엄마상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 여행에 동행하는 보우와 가오나시는
치히로의 또다른 자기의 모습니다.
그들이 마녀 제니바를 만나러 가는 목적은 동일하다.
그들의 여행은 바다를 가로질러 간다.
큰 물, 큰 강을 건넌다는 것은 또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게 바다를 건너 도착한 마녀 제니바의 집은
화려함과 꾸밈이 벗겨진 아늑하고 따뜻한 집이다.
그곳에서 센은 따듯한 엄마의 품 마법이 벗겨진 참자기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
보우는 마법에서 회복되었고,
가오나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 그 순간 그의 아니무스 하쿠가 등장한다.
그의 아니무스 하쿠도 건강한 모습을 회복하고 힘있는 용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센은 용이된 하쿠를 타고 돌아오는데,
꿈에서 용이나 다른 뭔가를 탄다는 것은
성적인의미(성교)를 지닌다.
성교는 심리학적으로 통합을 상징한다.
센은 용 하쿠를 타고 오는 동안의 자신의 존재를
다시한번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하쿠의 존재에 대한 회복이다.
그 동안 분리되어 있었던 둘은
이제 서로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다시 온천장에 도착했을 때
센은 한 층 성숙해 있다.
또한 미성숙한 아기 보우도
한단계 성숙해졌다.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지혜할멈 제니바의 도움을 받은 센은
마녀 유바바의 주술을 풀고
엄마와 아빠를 구출하게 된다.
다시한번 센은
자신의 진짜 이름은 '치히로'임을 확인하고
신비의 세계의 대상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이제 치히로는 신비의 세계를 떠난다.
그런데 떠나는 치히로에게 하쿠는
뒤돌아 보지말고 곧장 앞으로 나가라고 말한다.
이것은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젼이고
메시지와 같은 것으로 들린다.
치히로는 그 이상한 신비의 세계를 떠나지만
그 세계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그가 뒤돌아보지 않고
현실세계로 돌아오게끔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의 이전 에니메이션 시리즈에서 보여 주었던
신화와 자연주의 틀에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들여다 볼것을 요구하고 있다.
언제나 자신없는 모습으로 뒷걸음질 치는 모습에서
앞으로 곧장 나아가는 모습으로 살것을 요구하고,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참자기의 모습을 회복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세상의 물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엄마들에 대해서
일침을 놓고 있다.
충분히 반영받지 못하고
지지 받지 못하고,
또한 모험없는 요람의 틀속에서 키워지는 아이들은
자라지 못하는 아기로 남을 것이다.
극장출구를 나서면서 난 마치
선명한 꿈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약간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나의 존재가 과연 어느 곳을 살고 있는지
되집어 보게 했다.
나의 이름은 무엇인지 스스로 내 이름을 불러보게 했다.
내가 여자였다면
아마 더욱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스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