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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잘못된 선입관을 버리게 한다. 예수는 역사성의 범주 안에 갇히기를 거부하신다. 예수는 언어를 초월하여 진행되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관한 강력한 경험에 대해 증언하신다. 이 만남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신-인 간의 완전한 소통을 약속하신다. 이 내용을 생각하면서 3가지 도전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도전은 예수가 성령, 즉 보혜사를 보내겠다는 약속과 관계된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예견하고, 또한 그들이 결국은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한다. 예수는 당신이 이제 곧 떠날 것이라고 예고하고, 감추어진 모든 것을 밝히 말해줄 선생님을 그들에게 보내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그들은 기억하고 믿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변혁된 기억 (transformed remembrance)은 그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가르쳐줄 보혜사에 의해서 주어질 것이다.
성령이 예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는가 아니면 이미 알던 것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가? 하나님의 계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결되었는가 아니면 오늘날 더 추가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 있는가? “추가적”인 부분이 역사적 예수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두 번째 도전은 오랜 된 것이다. 예수는 성령이 오실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당신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씀을 했는데, 이 말씀은 삼위일체교리의 역사적 토대가 된다. 예수 당신과 아버지가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 내재한다는 선언은 삼위일체 교리로 발전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에 방해가 되는 요소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초기 해석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자신보다 크신 분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삼위일체 교리에서 삼위가 동등하다고 하는 주장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4세기 Basil the Great는 아버지가 더 위대하다는 표현은 <동일한 본체를 가진 두 존재> 간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들인 예수가 아버지와 다른 본질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경계했다. 후에 John of Damascus는 더 나아가, 아버지는 아들의 원인 혹은 기원일 뿐 꼭 시간적으로 선행하거나, 더 우월한 본질을 소유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더 큰(greater)”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왔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오랜 논란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논쟁의 깊이와 폭을 알려준다. 이 본문으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여러 다른 이해가 도출되거나 반박될 수 있다. “더 큰”이라는 간단한 단어 하나를 통해 요한은 탄탄한 기독교 교리의 구축물에 틈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본문에서는 예수가 “‘더 큰’이 무슨 뜻인가?”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있다.
세 번째 도전은 다른 유다의 질문(본문 직전인 22절,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과 관련이 있다. 유다처럼 우리도 이 점이 궁금하다. 이번 주일의 본문은 사실 이 질문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유다는 예수가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기로 선택하신 것으로 오해한다. 예수의 대답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24절) 이다. 이 대답은 많은 질문을 유발한다. 인간의 하나님 사랑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떤 이들은 증오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루이 에블리 지음,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가톨릭출판사. 1977) 추천함.]
심한 핍박을 받던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이 질문은 신학적인 차원에 머무는 질문이 아니었다. 왜 반기독교적 회유자들, 심지어 가족들은 신앙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일까? 이 딜레마는 날선 검과 같은 예리한 부분이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보고, 믿는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분노하는지에 대해 시공을 초월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물어왔다. 현대주의적 풍토에서 이 질문은 지적인 차원의 문제가 된다.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종교적 주장은 공적인 방식으로 검증될 수 없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의혹은 여러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신자들에게만 통하는 종교적 언어가 의미가 있는가? 사적인 진리를 진리라고 할 수 있나? 이런 종류의 세속적 공격이 현대 신학의 지형에서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오늘의 상황을 정직하게 관찰해 볼 때, 우리는 다른 유다처럼 “숨어계시는 하나님”과 <믿음에 기인한 갈등과 분열의 상황>에 대해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는 긴장을 더 조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는 [지적인 토대와는] 다른 출발점을 제시하신다. 그는 믿는 자들은 “나의 말을 지킴으로” 사랑에 근거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삶은 예수뿐 아니고 그를 보낸 분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음에 대해 어떻게 설득력있게 말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체화된 믿음을 실천하는 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빼앗아 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행동으로 표현된 믿음은 신적인 임재의 직접적 체험의 계기가 된다는 것을 예수는 확신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그 실천적이고 친밀한 길로 초대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길은 예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는 경지로까지 인도될 수 있다.
예수의 물리적인 부재의 조건 하에서 우리의 매일의 실천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현존과 사랑을 실제적으로 만든다. 행동으로 옮겨진 사랑은 은총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로 우리가 가장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실천된 사랑이다. “왜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첫 단계는 이론이 아니고 실천이고, 논쟁이 아니고 열정적인 사랑이다.
주석적 관점
- 긴 본문의 짧은 부분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오늘 성서정과가 그러하다. 오늘 본문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장문의 “고별담화”(Farewell Discourse 13:1-17:26)의 일부분이다. 요14장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4절 여는 말 5-7절 도마의 질문 8-21절 빌립의 질문 22-31절 유다의 질문. 오늘 본문은 유다의 “주님, 주께서 우리에게는 자기를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분이다. 이 본문을 통해 고별담화가 예수의 제자들을 위한 것이지 호기심 많은 외부자를 위한 것은 아님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특권적인 대화이다.
- 요한복음은 아마도 에베소에서 기원후 80년대나 90년대 초 가정교회들이 회당에서 추방당하던 시기에 씌여졌을 것이다. 적대감이 높았고, 상호불신이 가득했다(요9:22;16:2;20:19 참조). 갓 출범한 가정교회들은 에베소의 회당과 로마신전 양쪽으로부터 분명하게 분리된 영역을 지켜야만 했다. 갈등은 차이를 첨예화했고, 또한 그룹들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했다. 예수의 고별담화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고, 이러한 두 가지 과제에 기여한다. 이것이 고별담화가 이런 형식을 취한 이유이기도 하다. 제자들의 질문은 요한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품었던 질문을 반영하고 있고, 그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요한의 가정교회 구성원들에게도 또한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오늘 성서정과가 약간 수수께끼인 것이 유다의 질문(22)에 대한 예수의 대답(23)으로 시작하는 부분인데도 정작 유다의 질문을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대한 누락인데 왜냐하면 질문은 이어지는 대답(담화)을 규정짓기 때문이다. 질문은 또한 그것이 유도하는 역설적인 대답에도 필요하다. 예수는 전혀 유다의 질문에 답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14:22과 14:23-24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런 종류의 담화는 요한복음에 흔하다. 제자들은 세상적 관점의 차원으로 말하는데, 예수는 영적 차원에서 말한다. 이 두 차원의 교차는 요한복음에 특징이다. 담화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든, 유다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 것은 틀림없는데, 예수는 확대된 대답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14:23-31).
- 분명히 유다는 가정교회와 세상과의 장벽을 세우는 질문을 하고 있다. 왜 당신은 그들에 대항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이러한 특별한 계시를 왜 우리에게만 하는 것입니까? 예수는 질문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며 교묘하게 그것을 격하시키는 대답을 하고 있다.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제자들의 기본 과제에 유의해 보라. 그들은 누구인가? 본문의 어휘들은 제자들의 사명을 가리키는 요한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 예수는 ‘내 말을’(단수) 지킨다(23)와 ‘내 말들을’(복수) 지키지 아니한다(24)라고 말한다. 무슨 차이인가? 같은 것을 말하는 두 가지 방식인가?
- 그것은 예수와 하나님은 제자들이 가진 모든 책임과 그러한 과제를 수행해나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예수와 아버지(하나님)는 제자들과 함께 “산다”(살 집을 만든다). 건축업에서 온 이미지이다. 집을 만든다는 것은 집짓는 기술이나 형식으로 번역할 수 있다. 물론 이 집이 공사 중인 건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공동체에게는 회당이 더 이상 집으로서 기능하지 않았기에, 그들에겐 바로 집이 필요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의 말/말들을 지키기에, 예수와 아버지도 그들을 위해 집을 짓는데, 그 말/말들을 공부하고 굳게 잡을 수 있는 그러한 집을 제공할 것이다.
- 한 가지 더 23-24절에 대해 언급할 것은 이것은 요한의 종말론의 예라는 것이다.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라고 말할 때 요한은 파루시아(Parousia)나 죽은 자들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삶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의 영적인 내재(Indwelling)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자신의 독특한 안경으로 사물을 보는 또 다른 예이다.
- 어쨌든 이것은 고별담화인데, 요한공동체에게 그러한 담화의 위험성은 공허감과 약간의 버려짐의 감정을 남긴다는 것이다. 부재가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인가?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예수의 떠남은 공동체에게 새로운 현존을 가져온다. 주변부의 사람들이 모두 로마의 법에 의해 다스려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공동체에게 다른 옹호자가 나타났다. 보혜사(Paraclete)의 우선적 역할을 가르치는 것이지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시25:5,9참조). 그렇다면 보혜사의 역할은 공동체의 기억은행들을 활성화 시켜서, 예수의 가르침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26)라고 했다. 그래서 공동체가 예수의 모든 말씀을 지키도록 도울 것이다.
- 사실상, 아버지와 예수 성령께서 관계하시는 연속체(continuum)가 있다. 예수가 떠나면, 사실 예수는 떠날 것인데, 그러면 성령께서 오신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다시 하나가 되면, 공동체는 성령과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고별담화이다. 그것은 근심하는 마음에 ‘평화’를 준다(근심한다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을 의미하고 아마도 겁나게 될 것이다). 믿음은 겁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동사 aphiemi(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27절)는 유산을로 남긴다는 뜻이다. 비록 이 세상의 지배자가 막후에 도사리고 있지만, 이 고별담화는 제자들이 견고하게 선다면 그들이 받기로 약속된 자원들과 재물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보혜사가 그들에게 미리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기 때문에 놀랄 것이 전혀없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그러한 영적 자원들에 대항할 수 있는 가망은 없다.
목회적 관점
요한의 고별담화에 관한 목회적 관점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삶에서 이별과 죽음이라는 현실을 마음에 품게 한다. 설교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부모가 처음으로 그들을 혼자 남겨 두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보모와 함께, 학교 가는 첫날에, 관계의 끝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떠나기로 했을 때와 같은 경험은 교인들 대부분의 의식 안에 있을 것이다. 심지어 부활절 예배의 한복판에서, 예상되거나 기억된 슬픔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설교자는 본문 자체 안에 있는 슬픔을 표현하는 자료들에 대해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보혜사는 예수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기 위해 올 것이다(26절).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27절), 그가 떠나가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28절) 상기시킨다. 그렇지만,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가 상실 가운데 그것을 대체할 것이나 기분이 나아지게 할 다른 보상들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과장할 위험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로 가득 찬 상투적인 경건으로 큰소리칠 수도 있다. “너는 너의 상실에 대해 행복해야만 해. 왜냐하면 너를 떠나간 사람은 떠나는 게 훨씬 좋으니까.” 여기서 예수가 말씀하신 맥락은 성령의 임재에 관한 초기의 약속(17, 23절)과 제자들이 고아처럼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포함하는 고별담화 전체이다.
예수의 떠남은 슬픔과 상실을 포함할 수 있지만, 담론은 그가 계속 함께 있다고 말한다. 그의 현존은 슬퍼하기에 적합한 다른 시간과 지금 이 시간을 구별한다. 성공회의 1979년 공동기도서는 매장 의식에 대한 노트에서, 부활절의 기쁨에 대하여 언급하고서, 계속해서 말한다. “그렇지만 이 기쁨은 인간의 슬픔을 비기독교적인 것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가진 바로 그 사랑은 우리가 죽음으로 인해 갈라졌을 때 깊은 슬픔을 가져온다. 예수가 그의 친구가 죽었을 때 울었던 것처럼.[The Book of Common Prayer (New York: Seabury Press, 1979), 507.]
많은 교인들이 슬퍼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걱정하고 있는데, 이 성구는 그런 염려에 대해 말해 줄 목회적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근심, 두려움, 그리고 불안해하는 생각에 대해 예수는 신경을 많이 썼다(27b). 이러한 두려움에 대한 해독제는 예수가 주신 평화이지,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다(27a).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관점에서 평화를 갈망한다: 심리적인 긴장이든, 전쟁이든, 갈등의 중단; 고요한 느낌 혹은 영혼의 평온. 예수가 약속한 평화는 이런 것들을 포함하지만, 예수가 준 평화는 하나님이 계속해서 함께 계신다는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계실 때, 평화는 확실해진다. 예배하는 동안 평화의 신호를 포함하는 공동체는 종종 그것을 고백과 사함의 기도 바로 다음에 위치시킨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죄가 용서받은 곳에 새로운 (종말론적) 평화의 공동체가 실제가 된다는 진리를 재현한다. 평화라는 선물은 정의 혹은 올바른 관계에 기여하는 모든 것들과 묶여 있다: 사랑, 용서, 화해 그리고 감사.
염려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 사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Murray Bowen에 의해 전개되고 Edwin Friedman의 저서[See Edwin H. Friedman, Generation to Generation (New York: Guilford Press, 1985); A Failure of Nerve: Leadership in the Age of the Quick Fix (New York: Seabury Books, 2007).]를 통해 신앙 공동체에 소개된 ‘familysystems’라는 용어는 최근 몇 년 간 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통용되고 있다. Friedman은 어떻게 자기 판별 self-differentiation 을 통해 걱정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인생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에 관해 분명해지면,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더욱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가정들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문제가 있으면 가족들이 모이는 걸 걱정한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가정들은 아버지가 직장에서 집에 오거나 어머니가 집에 들어와서 집안일을 하게 되면 어떻게 모두가 안정을 찾게 되는지 알고 있다. 염려하지 않게 되는 능력은 다른 사람도 안정을 찾도록 돕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나,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화의 시간 안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것의 실체를 부활하신 예수의 사역에서 이루어진 것을 본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두려워서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20:19) 예수는 염려하지 않는 하나님의 현존이셨고,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염려를 옆으로 치워놓는 예수의 능력은 그가 “이 세상의 통치자”(30절)를 언급할 때 나타난다. 예수가 당대의 종교 당국과 충돌한 것은 요한복음의 시작 부근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이야기에서 소개되었다(2:13-22). 그리고 이 이야기를 따라가면 해피엔딩은 기대할 수 없다. 예수가 이것을 알았더라도, 그는 아마 죽음을 향해 계속 갔을 것이다.
요한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고뇌한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마 26:30-56; 막 14:26-42; 눅 22:39-46). 그 대신 요한은 하나님과 함께 있고, 그래서 이 세상의 통치자가 그에게 힘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예수를 보여준다. 예수가 “일어나거라. 우리 길로 출발하자”(31절)고 말할 때, 예수는 그의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 십자가의 길을 말하고 있었고, 죽음이 그의 인생에서 최악의 운명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최악의 운명은 그의 삶의 근원인 믿음을 깨드리고, 정직하지 않게 without integrity 행동하는 것이다.
설교적 관점
-부활절 설교를 힘차고 생동감있게 지속적으로 하는 일은 어렵다[부활절 여섯째주일이므로]. 부활절 이후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기 시작할 때 오늘의 본문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다 들려준다. 나쁜 소식은 예수께서 떠난다는 것이고 (28절) 좋은 소식은 성령께서 예수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오실 것(26절)이라는 것이다. 부활절을 이제 막 기념한 청중들은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는 오늘의 본문을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을 언뜻보면 이 본문은 삼위일체라는 주제를 설교하기에 적당하다: 성부 하나님은 누구신가 (23,26,28절), 성자 하나님은 누구신가 (23,24,26절), 또 성령 하나님은 누구신가 (26절)?
성부 하나님 (God, the Father).
이 이름이 갖는 힘은 그 남성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을 남성으로 보도록 유혹을 받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아버지” (the Father)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놓치게 된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사랑 (love, 23절), 공급(provision, 23, 26절) 그리고 환영(welcome, 28절)등의 특징을 지닌 하나님(Godhead) 안에서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성(gender)에 관한 것이 아니고 관계 (relationship)에 관한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들은 한 질문(22절)에 대한 답변에서 였다. 예수는 세상과 말씀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아버지에 의해 보내진)대조시켜 질문에 답한다 (24절). 사랑은 신실함에서 나온다. 사랑의 결핍은 그 사랑을 가져오는 관계의 결핍이다. 사랑이 있는 곳이 예수와 아버지가 함께 사는 곳이다.(23절)
성자 하나님(God, the Son).
-예수는 그와 아버지가 같은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23-24절). 예수는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대로 살았다: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마 6:10).예수를 보낸 분의 사랑하라는 명령은 예수께서 삶으로 가르친 바로 그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온전함을 만나고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표시를 할 때 그것은 온전한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로부터 오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다. 이 구절들은 요한복음 17:21-22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를 예상하게 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그리고 우리들-을 초대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이고 또 사랑으로 충만한 공동체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28절은 설교자를 아리송하게 만든다. 사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다”라는 예수의 선언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다. 이 말은 예수가 아버지보다 작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은 이 본문에 대하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접근을 해왔다. 이 구절을 가지고 너무 오랜시간 있게되면 아마 재미있는(혹은 재미없는) 신학강연처럼 될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선언은 설교자에게 완전히 인간이고 완전히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의 인성(humanity)에 대해 설교할 그 무엇을 준다. 주님은 우리와 인성을 공유하였고 그의 임박한 죽음을 가리키기 시작한 이 구절들은 그 인성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28절은 우리들의 인생여정과 예수의 삶(그리고 죽음)을 연결하는 포인트이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
-빌립보서 2:5-8절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신”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가 가진 동일한 마음을 갖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또 온전히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성령 하나님(God, the Holy Spirit).
-여기에서 성령은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는 분(26절)으로 서술되고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교사들이 가진 특징은 무엇인가? 대부분 우리가 좋게 기억하는 교사들은 돌보아주는 관계를 맺은 사람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좋은 면을 기대했던 (보았던) 사람들이다. 성령은 우리의 지지자 (Advocate), 돕는 자 (Helper), 동반자 (Companion), 그리고 위로자(Comforter)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기대하는 (보는)사람처럼 들린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를 기억나게 한다(26절). 예수는 세상이 삭개오에게서 오직 교활한 세금징수원만을 보고 있을 때 한 사람에서 구원이 열려있음을 본다. 예수는 세상이 베드로에게서 약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라고만 바라볼 때 그가 교회의 기초를 놓을 것을 본다. 예수는 세상이 한 여인에게 오로지 간음한 여인이라고만 바라볼 때 누군가에게서 순결한 삶을 다시 찾을 것을 본다. 예수가 나를 볼 때 그는 나에게서 무엇을 볼 것인가?
-성령은 예수의 행동을 현재시제로 만든다. 예수를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여”(24절, 1:14) 세상에 보내신 동일한 분이 성령을 보내어 그 예수를 기억나게한다 (26절). 삼위일체의 모든 위격들은 같은 천으로부터 잘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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