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애 첫 강연
글 / 김덕길
“따르릉”
아침 식사를 하는데 전화 한통이 걸려왔습니다.
“여보세요?”
“저기 김덕길 씨죠. 저는 정읍 이평 중학교 교장선생입니다.”
이평 중학교는 30년 전에 내가 다녔던 나의 모교입니다. 그 당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으셨던 체육 선생님이 이번에 교장선생님으로 진급 하셨다는 말을 나는 소문을 통해 들었습니다. 이런 교장 선생님께서 친히 나에게 전화까지 줄줄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아니 선생님께서 어떻게 전화까지 다 주셨습니까?”
스승의 그림도 밟지 말라는 말이 있듯 나는 한없이 어려운 선생님의 전화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자네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소식은 내 익히 들었는데 이번에 우리 학교에서 ‘작가와의 만남’이란 행사를 진행하게 되었다네. 수고스럽겠지만 자네가 와서 우리 학생들에게 좋은 말 좀 해 주면 고맙겠네.”
“아이고 선생님 저는 어디 나가서 강의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노점에서 뻥튀기를 팔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잘난 것이 있다고 학생들에게 해 줄 말이 있겠습니까?”
“이 사람아 직업에 귀천이 있는가? 자네같이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와 자수성가 한 사람이 어디 흔한가? 꼭 부탁하네.”
선생님의 부탁을 나는 저버리지 못했습니다. 남도 아니고 우리 학창시절에 제일 인기가 좋으셨던 선생님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제자 된 도리가 아니라 판단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제주도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고 학교는 정읍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쉬운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강연을 하기로 한 날짜가 다가 올수록 긴장이 엄습했습니다.
‘강연을 하다가 떨려서 목소리가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 어쩌지? 초등학교 때 친구들 앞에서 동화를 발표하라고 했을 때 거의 울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내가 어떻게 해? 수많은 눈동자가 나만 바라보고 있을 텐데, 아이고 어쩌면 좋아. 못하겠다고 전화할까? 나갔다가 망신만 당하고 오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맞아. 5년 전에 텔레비전 프로에 생방송으로 출연했을 때 나는 분명 떨지 않았어. 물론 방청객이 열 명도 되지 않았지만 그때는 분명이 생방송인데도 떨지 않았잖아. 그래 해 보자.’
나는 속으로 상상했습니다.
‘그래! 학생들 앞에 멋지게 서서 가장 멋진 표정으로 학생들의 심장을 콕콕 찌르는 감성의 언어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거야. 최대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하고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야! 질문을 하면 듣는 이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막이 될 수 있잖아 그건 곧 졸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고 상호 교감이 되니 수업이 박진감이 넘칠 거야. 그리고 최대한 칭찬을 하자.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했으니.’
저는 최대한 저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습니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스스로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마침내 강연 날짜가 되었습니다. 나는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육지로 올라갔습니다.
대부분 시골 중학교가 그렇듯 이곳 모교도 학생수가 40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35명은 야구부가 있는 학교를 찾아 들어온 미래의 야구 꿈나무들이었습니다.
학생들 앞에는 내가 출간한 책 ‘노점일기’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책을 어느 틈에 다 읽었는지 독후감 발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독후감은 세심했고 사려가 깊었습니다. 나의 책을 읽고 마음에서 우러나와 쓴 글이라는 것을 나는 느꼈습니다. 이렇게 준비해준 담당 이미경 선생님께도 참 고마웠습니다. 독후감을 발표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갔고 그 모습은 30년 전 내가 다니던 중학생 그대로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학생들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합니다. 인사를 하면서 시골 학교에 처음 부임한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맞아 칠판에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자기 이름부터 썼었어.’
이름을 쓰려고 보니 칠판이 없었습니다. 나는 얼른 칠판이 필요하다고 담당 선생님께 말했습니다. 서둘러 칠판이 세워졌고 나는 커다랗게 내 이름을 썼습니다.
그 다음 칠판에 -나는 누구인가? 라고 썼습니다.
나는 이렇게 써놓고 내가 누구인지 소개했습니다.
“나는 시인입니다. 나는 소설가입니다. 그러나 역시 나는 뻥튀기 장사입니다.”
아이들이 박장대소 합니다.
그 다음 칠판에 -나의 아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이라고 썼습니다.
이렇게 써 놓고 아이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한 학생이 ‘아빠’라고 했습니다. 나는 얼른 그 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방금 아빠라고 한 학생 손들어 봐요? 와. 잘 생겼네요. 맞습니다. 나는 나의 아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아빠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아들에게 아빠가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아들이 학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노점에서 뻥튀기를 파는 나를 발견했는데 중학생 아들은 스스럼없이 아빠! 하고 나를 불렀습니다. 주위에는 자기들 친구 네 명이 있었고요. 집에 와서 아들에게 물었어요. 아들아 너는 아까 노점에서 왜 아빠를 불렀니? 그냥 갈 수도 있었잖아. 아닙니다. 저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스럽습니다. 전혀 창피하지 않은 걸요. 아들의 말을 듣고 나는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학생들에게 말해주었고 시와 소설을 이야기 했고 제주의 비극인 제주 4.3사건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꿈을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나의 꿈은 “오토바이 세계일주” 라고 감히 선언했습니다.
학생들이 일제히
“와!”하고 탄성을 지릅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여행은 빠르게 가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성공도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노력 없이 성공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토바이도 비싼 오토바이가 아니라 중국음식점에서 배달용으로 쓰는 오토바이를 타고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행은 폼으로 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어느 선생님께서 써 주셨던 그 잊지 못할 명언을 다시 썼습니다.
-미안하고 감사.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미는 무엇을 뜻하지요?”
“미안 합니다.”
“참 잘 했어요. 여러분은 항상 먼저 사과하세요.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은 절대 사치가 아닙니다.”
“안은 안녕하십니까. 하는 하겠습니다. 고는 고맙습니다. 감은 감사합니다. 사는 사랑합니다.”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가 중학교 때 배운 이 말의 고귀함을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의 후배들에게 이 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강의를 끝내고 참 뿌듯했습니다.
내가 강의를 해서 학생들이 도움이 된 것 보다 학생들에게 나를 이야기 하면서 나는 나의 꿈을 다시 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강의가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명 강의로 길이 남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울러 오늘 나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학생들이 보다 더 큰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고자 열심히 달려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첫댓글 제가 교실에서 듣는 느낌이네요 명강의라 자부 하셔도 충분하겠어요 분명 강의를 들은 아이들 중에 생각이 바뀌고 변화된 아이들이 있을거예요 큰 일 하셨네요 축하 드립니다
어머 정말요?
전 그냥 제 살아온이야기를 했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