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山書院과 地石 (나산서원과 묘지석)
나산서원은 백촌 할아버지의 6세손인 김녕김씨 14세손 나산 입향조 제학(提鶴)공의 후손이 사육신 김 문기선생 향례를 올리는 곳이다.
나산서원은 포항울산 간 65호선 고속도로의 동 경주IC에서 31번 국도에 접하려면 감은사지, 문무대왕의 대왕암이 있는 봉길 앞바다를 지나면 약2km의 봉길 터널을 나오면 큰 마을이 보이는 이곳이며 마을 앞으로는 아진포(阿珍浦) 동해바다가 보이는 신라4대 군왕이신 석탈해왕(昔脫解王)의 탄강지와 영남일부지역의 전기를 공급하는 월성원전이 있으며 서북으로는 태백산줄기의 함월산 중턱에 자리한 보덕암(국구암)은 신라56대 군왕이신 경순(김부)왕께서 후백제(견훤)의 침공 때 본 암자에서 환란을 면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 김녕김씨의 집성촌은 입향조 14세손 통덕랑(通德郞)제학(提鶴병자1576~1648)공께서 영동에서 첫 삶의 터전을 이루게 된 곳으로 할아버지의 字는 尙元(상원)이며 號(호)는 松窩(송와)공이시다. 이곳 후손들은 사육신 김 문기 선생의 향제(亨祭)를 모시는 나산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번창 하였고 전성기에는 150호가 넘는 큰 마을을 이루었으며 지금도 김녕김씨 충의공파 후손들이 약70호가 살고 있다 즉 송와(松窩)공의 후손으로 경주 선산 군위 울산 창녕 고창 가산등 각 지역으로 문중을 이루며 널리 분포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記錄(기록)이 말 하여 준다.
고 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광개토왕비가 발견됨으로 고구려역사에 대한
현대사에 산 증언이다. 즉 경주시 양남면 상라리(虎岩)에서 발굴 된 지석은
나산 입향조 김녕김씨 14세손 휘 제학 할아버지는 충의공 백촌할아버지根源
(뿌리)의 기록이다.
본 지석은 나산입향조 송와 공의 2019년 5월 28일 선조의 합동 묘원을 조성한 경주시 양남면 상라리(마읍지)산51번지로 이령하면서 묘지석(墓地石)을 발굴하게 되었으며 묘지석의 발굴 경위는 을미보와 경오보 족보내용에 입향조의 이동사실을 기록하여 상라리 25번지 (호암) 15세손 입향조 子 휘 선일 할아버지 산소에 증손자인 18세손 휘 인상(仁尙) 할아버지께서 묘 밑에 묻었다는 족보의 기록과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참고 하여 묘지석을 발굴하게 되었다.
본 묘지석(墓地石)은 입항조의 子 휘 선일할아버지의 상석 아래에 묻혀 있었으며 약40kg자연석에 33자로 나산입향조 송와공은 김 문기할아버지의 아들현석후손으로 1592년(임진년3월)16세에 영동에서 이동사실의 기록이다.
그리고 신원 복 관작교지를 받은 18세손 휘 정구(당48세)선조와 묘지석을 묻은 18세손 휘 인상(當時55세) 선조와는 같은 항렬이며 그 당시 경황을 보아 서로 많은 유대가 있었다고 본다.
묘지석을 묻은 일자의 기록은 없으나 교지를 받은 1731년의 시기와 족보의 기록이나 인상할아버지의 연세를 미루어 볼 때 묘지석은 약300년 전후로 묻었다고 추정된다.
묘지석을 묻은 의미는 조선 초기 단종 복위 실패로 사육신 백촌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그 어려웠던 은둔생활의 삶을 살아오면서 한 시류의 역사에 묻혀 버릴 뻔한 가슴에 응어리 진 한을 새겨 묻었다 고 본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백촌 할아버지의 충의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묘지석은 우리후손들이 볼 수 있도록 백촌할아버지의 향제(享祭)를 모시는 경주나산서원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김 정준 기록
墓地石文
児 月 以 金 地
記 里 日 畚 文 石
其 自 命 起
先 永 臧 子
未 同 踪 玄
盡 入 壬 錫
扵 辰 子
乃 三 孫
아 월 이 김 지
기 리 일 분 문 석
기 지 명 기
선 영 장 자
미 동 종 현
진 입 임 석
어 진 자
내 3 손
나산의 근원과 지석(誌石) 중요연대
단종→1457년10월 사사 서인(庶人)강등
충의공 김 문기1399~1456 파조
14세손1,영동 논학맏집1574~(現 의성춘삼종군)영동→합천→의성이동
2,입향조 제학(송와)1576~1648(72) 을미 보근거영동→나산이동
나산 입향 임진년1592.3월(16세) 지석(誌石)근거
@단종의 신원 복 관작 경위
숙종7년 서인(庶人)에서 노산군 → 1681노산대군승격
→단종복위→숙종24년 1698 전 현감 신규 상소
@백촌선조 복관작(復官爵) 송원(訟寃) 글 송달→ 논학公 손자 이휘公
16세손 휘 이휘(爾輝)公 1649~1719(70객사) 숙종43년1717년
신문고 북을침 송원글 송달(논학 손자)
@18세손 휘정구(鼎九)1683~1738(55객사)꽹과리 소동(논학 현손자)
영조7년1731년 백촌 조 신원복관작 교지를 받은 선조 휘 정구公
@18세손인상(仁尙)1676~? 신원복작 時 55세(제학 현손자)
입향조 영동에서 이동사실 지석(誌石)을 묻은 선조
@김문기 충의시호→ 정조2년1778
나산사 건립→정조4년1780년동경속지(東京續誌) 기록근거
서원철폐령고종5년1868년 나산사 헐림 7년1870년(흥선대원군)
@22세손 원 瑗1779~1828(49서세逝世) 나산사건립 兄
기 琪1782~1864(82)나산사건립 弟
@나산講堂(서당)건립1936년
@27세손 진훈(鎭勳)1932생~?백촌영정사진은 가져 옴
@27세손 진목(鎭穆)1935생~?나산서원昇格(승격)2010년
@교지를 받은18세손 휘 정구 公 당시48세 조와 묘지석을 묻은
@지석(誌石)을 묻은 연도는 없으나 추측으로 신원 복 관작
교지(敎旨)를 받은 1731년 기준 약300(288)년 전후 본다.
신원 복 관작 상원 원문(原文)
刑曹啓目內 今二月初七日 兵曹啓辭內 去正月十九日 忠壯衛金爾輝稱名人 自通化門 入來差備門外 擊鼓 極爲駭愕 令有司 囚禁治罪何如 傳曰允事 傳敎 是白有亦 推考次丁酉二月十二日 忠淸道永同居 忠壯衛金爾輝 年六十七 白等 去正月十九日 自通化門 入來差備門外擊鼓 極爲駭愕 情由遲晩考音良中 拒逆不著辭綠 刑問現推 校味白齊 當日金爾輝 刑問一次訊杖三十度 更推白等 戶口相考 入籍的實爲白乎旀 矣身罔極冤痛情由段 矣七代祖都摠菅文起 即故領議政順之孫 領議政觀之子 歷事 三朝 位至正卿 忠孝傳家 節義有素 乃於 景泰丙子 爲國家殺身成仁於六臣之時 同六臣 死節之人 皆己伸雪其冤而 矣先祖文起 則獨未得伸雪 地下之冤鬱 子孫之痛迫 爲如何哉 蓋六臣一時殺身之節 可以激勵乎後來 玆因 筵臣之陳達 六臣及同死三十二人 皆得伸雪其冤 而顯揚其節爲白乎矣 矣祖文起及金堪段 只綠子孫之殘微 冤枉之情 不能撤九重之天 以六臣一體之人 或爲伸雪而顯揚於明時 或爲幽欝而飮泣於泉下 其在一視之道 寧爲厚薄於其問耶 金堪則因其內外孫之擊鼓訴冤 自朝家依六臣雪冤之例 復其官爵 脫其定屬 子孫軍保 皆爲頉免 籍沒田民 一並出給爲白乎矣 矣祖文起 則尙未得伸雪於世 而抱冤於地下 識者之痛惋久矣 列邑多士 呈書于本道 則題以自下 不可變通云 又呈于廟堂 則亦題以自下不可變通云 嗚呼 矣祖獨抱之冤 實是百世之公議 而草野殘孫 伸訴無地 靜拶之中 煩擾擊鼓 極知猥越 而冤欝所激 不知裁止 臣罪又萬萬矣 幸望 天日之明照 臨於覆盆之中 使矣祖 得比於金堪伸雪之例仍與六臣同歸於顯揚之地 則聖代光明之典 豈獨專美於一時 百世之後 亦可以垂裕矣 在矣身爲先之誠 死無憾焉
중 략(中 略)
兵曹啓目 金爾輝擊鼓 據都摠管金文起與六臣同死文蹟 載於六臣傳 而其顯揚名節 昭著於世 是白乎等以 依金堪子孫 伸雪例一體蒙 恩事 至於擊鼓 則自刑曹 不得主菅 移于禁府 自禁府禀處爲白有矣 金文起之同死於六臣之節 旣如是明白 而尙未蒙伸雪之典者 蓋出於子孫之孱微 不能呼冤之所致 當與金堪一體伸理 是白乎矣 事繫 恩典 自下不敢擅 便上裁何如 啓依回啓施行 爲良如敎敎是置 金爾輝先祖文起依金堪例 復其官爵 脫其定屬 子孫軍保及內外子孫爲奴婢者 皆爲頉免 籍沒田民 一倂出給事 旣己定奪 爲白有如乎 金文起內外子孫 遠近族屬 所定軍役 義禁府覆啓辭意 一倂頉下事 蒙 允後 自禁府 旣己頒布 則事當知委擧行 是白去乎 金文起旣己伸理 則其子孫之定屬軍保者 自在頉免之中 依判下 頉下之意 所居官良中 行移何如 傳曰 允
二, 정구(鼎九)공의 격쟁 상언(擊錚上言)과 복관작(復官爵) 이조등록(吏曹謄錄)
一七三一년(英祖 辛亥) 三월에 선생의 十세손 정구(鼎九)가 꽹과리를 쳐서 임금께 상언하여 복관작(復官爵)의 왕은(王恩)을 입어 신설(伸雪)되니 “자헌대부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이라 한다.
英祖辛亥十世孫鼎九 又爲上言 乃蒙伸雪之 恩 復官爵 資憲大夫吏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吏曹謄錄》
원문출처 괴산문중 26세손 인규씨 올린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