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서울 걷기] (5) 베트남의 중국 쪼론·서울의 중앙아시아 광희동
악취미가 따로 없다. 낯선 도시로 여행을 떠나고, 도착해서는 굳이 거기와는 다른 도시를 보고 싶다고 우기는 것은. 바꿔 말하면 종로에 와서 프랑스 유적을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황당한 행동이다. 베트남 안의 작은 중국 ‘쪼론’ 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현지인이 보인 반응도 대충 그랬다. “거긴 베트남이 아니라 ‘베트남 안의 작은 중국’인데요?”◆쪼론, 베트남 안의 작은 중국
쪼론(Cho Lon)은 베트남의 호찌민에서 가장 큰 도매시장이 있는 거리이자 수많은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거대한 차이나타운이다.
이곳이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9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영화 '연인'(1992, 장 자크 아노 감독)의 러브 스토리가 바로 이 지역을 무대로 펼쳐졌기 때문. 쪼론 지역에는 '연인'의 발칙한 프랑스 소녀(제인 마치)가 단정한 교복을 차려입고 새침하게 걸어 다니던 교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 '레홍퐁'이라는 이름의 이 고등학교는 실제 베트남의 명문고 중 하나. 베트남에서 만난 잘생긴 동양 남자(양가휘)에게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든 소녀는 매일 남자가 보내준 리무진을 타고 이 학교로 등교한다. 소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베트남의 부유한 화교 청년. 그래서 '연인'의 무대는 동코이 지역도, 팜응우라우 지역도 아닌, 베트남의 차이나타운 쪼론 지역이다.
- ▲ 광희동은 서울의 중앙아시아. 러시아 키릴 문자가 한글을 압도한다. 생활용품과 여성 잡화를 판매하는 이 상점에는‘구올모스코우’‘발례나’라는 한글 표기보다 키릴 문자 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canyou@chosun.com
◆광희동, 서울 안의 작은 중앙아시아
서울의 번잡한 시장 안, 광희동 중앙아시아 골목을 찾는 사람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만하다. 서울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러시아 키릴 문자들이 건물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이곳은 얼핏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몽골의 한 골목에 접어든 것 같은 이상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싼값에 옷 한 벌 구입하겠다고 동대문 시장을 기웃거리던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낯선 골목 풍경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질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 보면 여기는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분명 서울의 한복판.
- ▲ 베트남 쪼론 시장 풍경.
이곳의 역사는 벌써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보따리장수들이 동대문 시장 주변을 들락거리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을 대상으로 한 음식점과 식품점, 여행사, 미용실, 술집 등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고 섞인 흔적들이 중앙아시아촌이라는 특별한 동네를 만들었고, 이 동네의 특별함을 느끼기 위해 다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래서 지금 서울 중구 광희동의 중앙아시아촌에는 고향의 향수를 느끼고 싶은 중앙아시아인,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은 한국 사람들, 서울 안의 낯선 도시를 느끼고 싶은 외국관광객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유목민의 향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중앙아시아촌을 찾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이국의 문화뿐 아니라 이국의 맛도 즐기기 마련. 카자흐스탄 음식점 크라이노드노이(02-2264-9380)의 작고 귀여운 물만두 벨메니와 큰 찐만두 만티, 단팥빵 리벼스카, 검은깨가 촘촘히 박힌 부어치키, 우즈베키스탄 음식점 사마리칸트(02-2277-4261)의 양고기 꼬치 샤스락, 볶음밥 폴로프 등을 맛보는 것은 이 골목을 찾는 사람들의 필수 관광 코스다. 골목 곳곳에 있는 노점에선 현지 신문과 TV 프로그램이 녹화된 CD까지 팔고 있어 고향 떠난 유목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준다.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근처에 있는 네팔 음식점 에베레스트(02-766-8850)는 네팔 노동자뿐 아니라 국내 미식가들에게도 꽤 잘 알려진 식당. 양고기 커리와 치킨 탄두리, 노란색 샤프란 밥과 화덕에 구운 길쭉한 난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사람들이 살을 비비며 만들어낸 '이국의 섬'은 이제 이질적인 그들만의 자치구에서 흥미로운 관광지로, 생활의 거리에서 문화의 거리로 정체성을 바꿔나가는 중.
서울 광희동 중앙아시아촌은 두 개의 도시, 두 개의 문화가 혼합된 멋진 '문화의 용광로'로 변했다. 쪼론 지역처럼 거대하진 않아도, 쪼론 지역만큼 이채로운 유랑민들의 자치구다.
서울 지하철 1·3·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에서 하차 후 1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키릴 문자 가득한 중앙아시아 골목이 펼쳐진다.
지하철 1호선 동대문 역 3번 출구로 나와 우리은행 골목으로 우회전, 창신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네팔·인도 음식점이 즐비하다. 이 중 인기 식당은 크라이노드노이와 사마리칸트, 에베레스트 등. 전화로 위치를 먼저 확인한 후 찾아가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