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이씨(延安李氏)의 시조(始祖) 이 무(李 茂)는 본래 당(唐)나라 출신으로, 고종(高宗: 당나라 제3대 왕,재위기간:650~683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7) 나당(羅唐) 연합군(聯合軍) 대 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百濟)를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신라에 귀화하여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식읍 1천호를 받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으며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땅은 지금의 연안 지방이었다고 본다.
이무장군(중랑장)은 연안 후에 봉해진 후 귀화하여 연안으로 사적(賜籍)되어 연안이씨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고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지 못하여 후손들은 소부감파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 현려(賢呂)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송(松), 통예문부사공 파(通禮門副使公派) 지(漬),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핵(核), 이부시랑공파(吏府侍郞公派) 분양(汾陽),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방(昉),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득양(得良),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백연(伯衍), 영광군 사공 파(靈光郡事公派) 계연(季衍)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소부감판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 현려(賢呂)의 후손에서는 9세손 석형(石亨)이 뛰어났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회림(懷林)이 늦도록 아들이 없어서 삼각산(三角山) 신령에게 빌어서 잉태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마침 금성(禁省)에서 숙직을 하다가 꿈에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았더니 흰 용(龍)이 바위를 깨고 나왔다. 꿈에서 깨어나 아들을 낳았다는 기별이 왔으므로 아들 이름을 석형(石亨)이라 하였다고 한다.
세종(世宗) 23년에 임금께서 삼관(홍문관, 예문관, 성균관)에 명하여 어전에서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저헌공은 전년도 생원과, 진사과 그리고 문과 삼장(三場)의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고 이 해(세종23년)의 본시(本試)에서도 연이어 세방(榜: 급제자 발표)에 또 장원을 하였다. 임금께서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며 즉시 좌정언(左正言: 사간원 정6품) 지제교(智製敎)에 임명하시고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큰잔치를 베풀게 된 것이다. 옛부터 전해오는 관습에 따르면 생진과(生進科) 급제자가 발표되면 대궐문(光化門)앞에 도착하여 생원과 급제자는 왼쪽(西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진사과 급제자는 오른쪽(東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이번에 저헌공은 생원과의 진사과 모두 장원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장원을 자기 쪽 문으로 들어가도록 끌어당기면서 다투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어 입장하지 못하였다. 임금께서 연회에 참석하여 도승지에게 어찌된 연유인가 물으니 도승지는 사실을 고하였다. 임금께서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장원(이석형)은 중앙의 광화문을 통하여 들라하고 그 나머지는 각각 좌우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명하였다. 원래 중앙의 광화문은 임금만이 출입하는 문인데 저헌공 이 삼장에 장원한 것을 기뻐한 나머지 이러한 전무후무 한 조치를 하였던 기록이 있다.
세조(世祖)1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어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때 익산 동헌(東軒)에 사육신(死六臣)의 절의(節義)를 상징하는 글을 남겨 모함을 받았으나 선생의 학문을 아끼는 세조는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체직, 판 공주목사(判公州牧使), 한성부윤(漢城府尹)을 거쳐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모든 정사(政事)를 반드시 처리함에 세조는 “경은 나의 서도(西道)의 주인(主人)이다”라 칭송하였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7년 연임하고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로 호패법(號牌法)을 정착 시켰다.
세조 승하 후 고부청승습사(告訃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고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에 책록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선생은 학문의 거봉으로 도덕을 숭상한 유학자이며 고려사를 편찬하였고 치평요람, 역대병요, 대학연의집략, 저헌집 등 저서가 많다.
석형(石亨)의 현손(玄孫) 월사(月沙) 정귀(廷龜)는 6세때 이미 글을 깨우쳐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고,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590년(선조23)에 증광문과에 급제했으며, 6조 판사를 모두거친 후인조(仁祖)초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던 그는 외교에도 재치와 수완이 뛰어나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使臣)으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명(明)나라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여 장(章)의 기행문을 모은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글씨에도 뛰어나 신 흠(申 欽), 장 유 (張 維), 이 식(李 植)등과 함께 조선중기의 4대문장가로 일컬어졌고 3代「정귀(廷龜),명한(明漢),일상(一相)」대제학(大提學) 가문을 일으켰다. 그의 아들 명한(明漢: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냄)과 소한(昭漢: 이조참판을 지냄)형제가 유명했다.
인격(人格)과 시재(詩才),효행(孝行)의 삼절(三絶)로불리웠던 명한(明漢)은 10세 때 <月皎皎란 시(詩)를 지어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과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路)등 명시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궁성농추사(宮聲弄秋思>란 글제로 짓게 한 <月皎皎>를 옮겨 보면 아래와 같다.
달빛이 산창(山창)에 희게 밝으니(月皎皎兮山창) 돌 누각이 가을의 생각을 움직이네(動石樓之秋思) 청려장(靑黎杖)을 짚고 긴 파람하는데(植黎杖而長嘯) 사립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있네(人有影於柴扉)
그가 저술한 시문(詩文)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잃어버렸는데 어떤 군사가 물가에서 주었다가 10년 뒤에 돌려주었기 때문에 문집 9권이 전해졌다.
특히 그는 효행(孝行)도 뛰어났다. 병자호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에 들어간 지 수 일만에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여 호군을 피해 다니다가 길 곁에 흙집이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그 속에 모시고 자신은 문 앞에 누워서 어머님을 자기 몸으로 가리고 있는 효행에 감동하여 청나라 군사는 활줄을 당기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조부(祖父) 월사(月沙), 부(父) 명한(明漢)과 더불어<삼대 대제학(三代 大提學)>의 전통을 세웠던 일상(一相)은 청(淸)나라 실정을 보고하여 효종(孝宗)의 북벌계획 수립에 도움을 주었고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영릉지장(寧陵誌狀)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명한(明漢)의 아들 일상의 아우 단상(端相)은 인조(仁祖)때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효종 조(孝宗朝)에 사가독서를 했으며 대간(臺諫)을 거쳐 청풍 부사(淸風府使)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고 학문이 뛰어나 「대학집람(大學集覽)」,「사례비요(四禮備要)」,「성현통기(聖賢通紀)」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한국유학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단상의 형 가상(嘉相)도 효행이 뛰어나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어머니를 찾아 적진 속을 헤매다가 여섯 번이나 적에게 잡혀 끝내 살해당했으며, 임진왜란 때 삼도 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류성룡(柳成龍)을 도왔던 귀(貴)는 인조즉위(仁祖卽位)때 호위대장(扈衛大將)으로 공을 세워 정사1등 공신(靖社一等功臣)에 올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난세에 살면서 훈공을 세웠던 충신으로 유명했다.
귀 의 맏형 보(寶)는 임진왜란 당시 400여명의 의병을 모집 사제(私財)를 들여 식량과 병기를 마련하고 錦山전투의 의병장(義兵將)으로 참전 전사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은천서원(隱泉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귀 의 아들 시백(時白)은 효종(孝宗)때 좌의정으로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진봉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명망을 떨쳐 연안이씨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의 아버지 귀(貴)의 충정에 보답하는 뜻에서 임금이 내린 집에서 살았던 시백(時白)은 마당에 전부터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는 유명한 꽃나무가 있었다. 어느 날 시백(時白)이 하직(下職)에 있을 때 대전별감(大殿別監)이 일꾼을 데리고 와서 왕명이라 하면서 그 꽃나무를 캐어가려 했다. 시백(時白)은 아무 말 없이 꽃나무 곁으로 달려가 뿌리까지 뽑아 버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아침, 저녁으로 험악해져 가는데 임금께서 어진 인재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 하시려는 건가. 내 차마 이 꽃으로 임금에게 아첨하여서 나라가 망함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기개에 느낀 바 있었던 임금은 시백을 중용(重用) 하였다고 한다.
시백(時白)이 병자호란 직후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는데 평양 대동문을 들어서니 화려한 기생의 무리가 접대를 하였다. 병란 후에 서도(西道)에 탕진이 흑심한데 이 화려한 접대에 놀라 그 사유를 평양 서윤(平壤庶尹)에게 물었다. 그 서윤은 사신행차에 항상 체통을 못 이루고 있어 각 고을의 관비(官婢)중 자색 있는 자를 선발하여 모이게 하고 그 복색과 비용은 그들 친족으로 하여금 부담케 함으로서 관비의 손실을 절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시백은 성내어 “서윤을 설치한 건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인가 사신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하며 호통을 치고는 감사를 불러 시정을 명하고 떠났다.
어느 날 시백의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무명방석 하나를 만든 일이 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시백은 퇴청 후 뜰아래 부들자리(方席)을 깔게 하고 부인을 청하여 함께 앉아 말하기를 “우리 선조가 옛날부터 깔던 자리는 바로 이 부들자리요, 내가 풍운을 만나 외람되게 공경(公卿)에 올랐으나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여겨지며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서 망하기를 재촉하단 말 이오”하자 부인은 당장에 그 비단실을 뜯어버렸다는 기록이 「공사견문(公私見聞)」에 전한다.
만년에 효종(孝宗)이 왕세자와 시백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세자에게 이르기를 “이이를 보기를 너의 고굉(股肱: 팔다리)처럼 여기고 위하기를 나같이 하라”고 유언하였다. 일찍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시백의 인품을 평하기를 “그를 알면 그를 믿지 않고 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말 묘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시백의 아우 시방(時昉)은 인조즉위(仁祖卽位)때 아버지와 함께 공(功)을 세워 정사2등 공신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고 연성부원군 석형)(石亨)의 후손 시직(時稷)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국운을 통탄하고 유서를 남긴 후 종으로 하여금 목을 조르게 하여 자결 했다.
월사공(月沙公)의 오대 손(五代 孫) 이천보(李天輔) 영의정(領議政)公은 영조대왕(英祖大王)이 사도세자 평양 원유사건에 대하여 영의정에게 조사하라는 하명을 받고 사실을 고하면 사도세자가 화를 입을 것 같고 허위로 보고하면 불충이 된다하여 고민 끝에 자결을 하니 좌의정 후(후)公 연안인(延安人)도 책임을 느껴 따라 자결, 우의정 민백상(閔白祥)公도 역시 자결, 삼정승이 자결한 사실이 있다. 그 후 정조대왕(正祖大王)께서 이석형(樗軒公)의 문집을 즐겨 읽고 과연 삼한의 갑족(三韓甲族)이로다 하여 홍제전서(弘濟典書)에 기록을 남겼다.
연안이씨의 또 다른 인맥인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의 후손(後孫)에서는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던 정공(靖恭)의 아들 원발(元發)이 고려 말(高麗末)에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는데,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하여 이태조(李太祖)가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상신(相臣)으로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그의 아들 귀령(貴齡)과 귀산(貴山)이 좌의정(左議政)과 관찰사(觀察使)를 각각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직제학(直提學) 말( : 귀산의 현손, 인문의 아들)의 손자 주(澍)는 명종(明宗)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의 계비, 명종의 어머니)가 중(僧) 보우(普雨)를 총애하고 불교(佛敎)를 재흥시키자 여러 유생과 함께 보우의 처벌을 상소하여 크게 파문을 일으켰으며 선조(宣祖)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가산군수(嘉山郡守)를 지냈다.
주(澍)의 아들 광정(光庭)은 선조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호성2등 공신(扈聖二等功臣)에 책록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가 부원군(府院君)에 진봉,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특히 그는 선조(宣祖)때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그 곳 천주교 선교사가 만든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구해 가지고 들어와 한국사에 있어서 지리관(地理觀)의 대혁명을 일으켰다.
광정(光庭)의 아들 현은 한국 재정사(財政史)에 있어서 정치능력을 가장 높이 평가받은 인물이다.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사위로 광해군(光海君)때 사직 당했다가 인조즉위(仁祖卽位)시 전적(典籍)에 등용되어 전조(銓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때의 병참(兵站)과 속환된 피로인(被虜人)들의 구호정책을 비롯하여 관향사(官餉使)로 나갔던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그의 수완을 크게 평가받았었다.
그의 아우 분도 병자호란 때 병참에 유공하였고 주(?)는 오달제(吳達濟)와 함께 척화소(斥和疏)를 올려 이름을 떨쳤다. 인조(仁祖)때 <구휼칠조(救恤七條)>를 상소하고 옥구 현감(沃溝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완(完 )의 아들 봉징(鳳徵)은 숙종(肅宗)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비(廢妃)를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박태보(朴泰輔)등과 더불어 <삼간신(三諫臣)>으로 불리 웠고, 문장(文章)에 뛰어났다.
청백리(淸白吏) 인충(人忠)의 현손(玄孫) 지남(至男)은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다. 연안(延安)의 읍호(邑號)인 <영응선생(永膺先生)>으로 불리웠던 그는 그의 아버지 언침(彦?)이 장령(掌令)에 있으면서 조정에 거슬린 바른 말을 하다가 순창군수(淳昌郡守)로 좌천되자 따라가서 그 고을에 있던 하서(何西)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명신 록(名臣錄)에 의하면 지남의 어머니 안씨(安氏: 홍문관 박사 안 한영의 딸)가 득병하여 위독하게 되자 지남이 지극정성으로 병간호 하면서 목욕 재배하고 하늘에 호소하기를, 자기 몸으로 모친의 죽음을 대신할 것을 빌었다.
안씨의 꿈에 신인(神人)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말하기를 “네 아들의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미 그로서 죽음을 대신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오랫동안 어머니 병간호에 몸이 몹시 상했던 지남은 마침내 피를 토하다가 나이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지남의 아들 기직(基稷)이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산중에 물과 미음을 입에 대지 못하다가 머리털이 희어지고 눈물에 젖어 눈언저리가 썩기까지 하였다. 다음해 봄에 곡(哭)을 하던 중 숨이 막혀 쓰러져서 아우 기설(基卨)에게 “나의 불효로 친상을 마치지 못하니 부업(父業)을 계승해 달라”고 유언하고 「중용(中庸)」에 있는 선(善)을 택한다(擇善)는 구절의 뜻으로써 간곡히 부탁하고 죽었다. 기직의 아우 기설도 부친상에 7일 동안 단식을 하였고 눈물이 다하자 볼그스레한 혈루(血淚)가 나왔다고 한다. 그가 덕천 군수(德川君守)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발인(發靷)하여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화적(火賊)떼가 왔다가 영구(靈柩)를 지키고 울부짖는 기설의 모습을 보고 그 효성에 감격하여 돌아갔으며, 적성(積城)에서 상여에 불이 나자 몸으로 관을 가려 머리털이 모두 그슬렸으나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와 돈서(惇敍)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江華島)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했다. 이로써 지남과 그의 처 정씨(鄭氏), 지남의 아들 기직과 기설의 형제, 딸 이씨, 지남의 손자 돈오와 돈서, 돈서의 처 김씨 등 8개의 정문(旌門)이 내려져서 <연안 이씨 8홍문>의 영예를 얻었으며, 기설의 손자 후정(后定)은 숙종(肅宗)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용납되지 않으므로 격분하여 죽었다.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고 충신(忠臣) 정려가 내려져서 대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지(漬)의 후손에서는 그의 현손(玄孫) 보민(補民:正郞公) 보정(補丁: 예조참판을 역임)과 말정(末丁: 예빈시 소윤을 역임) 3형제가 뛰어났고, 말정의 아들 숙황(淑璜:直講公) 숙기(淑琦: 靖襄公 호조판서)와 숙함(淑함: 文莊公) 3형제중 靖襄公은 이시애(李施愛)의 난과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유공했으며 특사부조전(特賜不?典)을 받았다.
명종(明宗)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던 후백(後白: 숙함의 증손, 국형의 아들)은 옳은 일과 결백함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많은 詩文과 일화를 남겼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양관제학(兩館提學)으로 청백리(淸白吏)의 록훈(錄勳)과 특사 부조전(特賜不?典)을 받았다.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의 증손 호민(好閔)은 선조(宣祖)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니 호성2등 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고, 이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이시다. 특히 그는 검소하기로 유명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서도 비단옷 한번 입지 않았다. 선조가 어의(御衣)를 하사(下賜)할 때도 호민에게만은 무명옷을 내렸다고 하며 특사부조전(特賜不?典)을 받았다.
전란이 끝날 때마다 서로 녹훈(錄勳)을 하려고 위증을 해가며 법석대기 마련이다. 임진왜란 후에도 웬일인지 녹훈을 받은 자가 조정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에 무관심한 호민에게 이덕형(李德馨)이 희롱하며 “공은 어디 갔다가 정승이 되지 못했소” 하였더니 호민은 “공은 어디 갔다가 공신이 되지 못했소”하였다. 그 후 이 아름다운 대화는 전후 때마다 일어나는 시대의 풍조를 익살 하는 명귀로 곧잘 인용되었다고 한다.
정조(正朝)때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정운(鼎運)의 아들 명적(明迪)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으며, 김해부사(金海府使) 중길(重吉)의 손자 술원(述原)은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정희량(鄭希亮)에게 죽임을 당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했던 술원 은 거창 읍의 좌수(座首)로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역장(逆將 ) 정희량 앞에 나아가 “너의 조상은 그토록 나라에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무엇이 모자라 이런 수작이냐 너의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호통 치다가 무참하게 난도(亂刀)질 당했다.
술원은 아들 우방(遇芳)이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고 우두령(牛頭嶺)에 올라가 적 틈에 잡혀 있는 거창 시민에게 포고를 하였다. “거창군민은 나의 말을 들어라 역적 희량에게 붙어 있으면 죽을 날이 멀지 않을 것이요, 희량을 잡아 오진(五陣)에 데려오면 조정에 품하여 녹훈을 할 것이다.” 군민들이 밤중에 정희량의 거소를 습격하여 희량을 묶어 우방의 진용에 데려오자 난이 평정되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판서(判書) 시원(始源)의 아들 봉수(鳳秀)가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정조(正祖)로부터 「근사록(近思錄)」을 하사받고 권학(勸學)의 격려를 받았으며, 참봉 명원(命源)의 아들 지수(趾秀)는 순종(純宗)때 서연관(書筵官)으로 세자(世子)에게 학문을 진강했다. 또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을 지내고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약우(若愚) 석농체(石農體)의 독특한 필체를 이루었던 종우(鐘愚),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자결한 현섭(鉉燮),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의약 교육기관을 세우게 했던 도재(道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했던 설(?)등이 명문(名門)의 전통을 이었으며, 동녕(東寧)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약페기운동을 전개했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령(國務領), 초대의정원(初代議政院) 의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주석(初代主席)을 겸한 대통령 대리가 되어 의절(義節)의 전통 가문인 연안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0,274가구, 126,5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