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이 실패한 경험을 살려, <표준 새 번역>에는 한국교회에서 인정받는 학자들과 보수교단들을 주로 참여시킨 것이다. 성서공회는 이 성경을 소개함에 있어서, 번역에 참여한 학자들과 교단들의 이름을 공개하기까지 했다. 이는 한국교회에 충분히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1993년에 <성경전서 표준 새 번역>이 출간되었을 때, 한국교회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한국 교회는 <공동번역>이 나올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반대를 한 것이다. 각 기독교 신문들과 잡지들에는 3년 이상 이 성경에 대한 찬반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대한성서공회의 부총무인 민 영진 박사는 이에 대해 일일이 답변해 주기에 바빴다. <표준 새 번역>에 대한 각계의 비판은 "표현이 세속적이다." “야훼”를 주로 바꾸었다." "직역이 아니다." 등 무수했다. 그중에는 논리적이지 못하고, 설득력이 부족한 비판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판 속에서 개역성경에 대한 한국 교회의 절대적인 의존도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몇몇 교단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표준 새 번역>을 외면했다. 앞장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성서공회의 자존심 문제였다. 그들은 1983년부터 1992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10년 동안 개역성경의 수정이나 교정이 아닌 전혀 새로운 번역, 개역성경의 뒤를 이어 한국의 대표적인 성경으로 자리 잡을 이 성경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 이미 인쇄되어 나온 <표준 새 번역>이 외면당하자 일단 많은 군인 교회들에 "보급"해 버렸다. <표준 새 번역>이 "의역"이라는 비판이 가장 많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의역("내용동등성 번역")이 더 좋은 번역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주장한다 (민 영진, "성경번역에 있어서 직역과 의역" [<그 말씀> 93년 5월호, pp.104-112) 의역이면서도 오히려 원문에 더 충실하다고 주장한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이처럼 <표준 새 번역>이 옳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더 깎아 내려지는 성경은 개역성경이다. 그렇다면 성경이라는 것이 원래 한문으로 기록된 것도 아니고, 조선시대의 한국인이 기록한 것도 아닌, 외국의 번역서인 마당에 개신교가 아직도 개역한글판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새로운 번역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공동번역판>과 <표준 새 번역> 성경이 있다. <공동번역판>의 경우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번역했으나, 개신교 측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공동번역>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천주교에서만 보고 있다. <표준 새 번역>이 안고 있는 번역상의 문제점을 알아보자. 예를 들어 <표준 새 번역>에서는 '야훼'라는 명칭이 사라졌다. '엘로힘' 또는 '엘'은 '하나님'으로, '야훼'는 '주'로 번역된 것이다. 도대체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이 왜 사라졌을까? (영어성경에도 야훼나 여호와를 빼버리고 LORD라고 기록된 것이 많다. 서양인들을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일까?) 수많은 하나님의 명칭의 반대자들이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도둑질해갔다고 지탄하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여호와라는 명칭을 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만물의 창조주이며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인 신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라는 것을 자각시키고 있는 셈이다. 결국 원래의 성경에는 절대 없는 '여호와'라는 명칭을 계속해서 사용하다가, 급기야 '여호와'라는 명칭을 버리게 된 셈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번역과정에서 '여호와'보다는 '야훼'가 히브리 원어에 알맞다는 것을 알자, '야훼'라는 명칭이 일반 개신교신자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없는 괴상한 발음이라서 결국 그 명칭을 버렸을 수 있다. 성경에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다면서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의 명칭까지도 헌신짝처럼 내 버릴 수 있는 배교자들임을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또 한 가지는 <표준 새 번역>이 현대의 한국인에 맞게 쉽게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구절을 고의적으로 감추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안티바이블에서 지적했던 성 불구자에 대한 비하와 관련된 개역한글판 신명기 23장 1절의 '신낭'(불알, 고환)이라는 단어가 표준 새 번역판에 여전히 등장하고 아예 한술 더 떠서 '신경'이라는 단어까지 새로 등장한다. 영문판 NIV에서는 '거세하다'라는 뜻의 'emasculate'라는 단어가 나오고, NASB에서는 'male organ'(남근)이 'cut off'(잘린)사람은 주의 집회에 올수 없다고 분명히 나와 있는데, 현대에 쉽게 번역했다는 표준 새 번역에서는 아직도 '신낭'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나마 '신낭'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그것이 남성의 음부를 표현하는 단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신경'이라는 단어는 과연 무엇인가? 야후의 국어사전을 검색해도 '신경'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설명밖에는 안 나온다. (국어사전을 새로 만들어서 봐야하는가?) 개역한글판에 비해 표준 새 번역판이 읽기는 쉽다. 그러나 표준 새 번역에는 번역한 사람의 비열한 눈가림과, 신의 명칭까지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배교자들의 냄새까지 난다. <표준 새 번역>이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온 지 오래인데 보급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개역한글판>보다는 읽기 쉽지 않은가? 바로 목사들이 교단에서 설교를 할 때 표준으로 삼는 것이 계속해서 <개역한글판>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목회자들의 잘못된 권위의식 때문이다. 그 잘못된 권위의식이 찬송가마저도 경전으로 만들어 놓았다. ( 요즘 '찬미예수'등에 수록된 복음송가 중에 좋은 곡들이 많지 않은가? 찬송가마저도 교회의 표준을 정해놓고 경전 화 시켜 개정할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는다) 찬송가마저도 경전 화되어 손댈 수 없는 상황이니 <개역한글판>을 누가 바꾸려 하겠는가? 또 한 가지 이유로는 목사들은 신자들이 쉽게 번역된 성경을 읽고 성경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될까 두려워 한다는 점이다. <개역한글판>은 그 점에서는 최고의 경전이다. <개역한글판>으로 창세기 앞부분만 조금 읽다가 뒷골이 팍 당겨 버리는 바람에 포기한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사실 나도 그러하였다.) 설사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 뜻을 이해한 기독인은 얼마나 될 것인가? 중세시대 때 로마 가톨릭은 평신도들이 혼자서 성경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목회자들은 평신도들로부터 성경을 멀리 치워 놓았다. <개역한글판> 성경은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만족감만을 주는 예배할 때의 준비물에 지나지 않는다. 정녕 성경이 진리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쉽게 번역된 새 버전의 성경을 구입하여 꼼꼼히 읽어보아야 한다. 나는 <공동번역판>을 즐겨 읽는 편이지만 <표준 새 번역>도 권장할 만하다. 쉽게 번역된 성경으로 진리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경전을 조용한 시간에 읽어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