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약사 >에서
ㅡ기묘사화 때 희생된, 우재 김극통(金克通:24世)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에 정통하여 조광조를 찾아가서 같이 강론하였는데,
ㅡ정암이 "남주(지금의 전남 장흥군 남면의 지명)의 높은 선비는 참으로 그대이다"라고 칭찬하였으니 알만하고
ㅡ형제가 문장과 도의가 높아 '3통' 또는 '3수사'라 불이었다고 한다.
ㅡ벼슬은 동몽교관 이었다.
ㅡ묘는 전남 장흥 남면(용산) 포곡에 있다한다.
ㅡ<문제>는 장흥의 광산김씨 집안의 어떤 분에 문의해 보니,
"장흥 출신이라는, 광산김씨 김극통 선조에 대해 잘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장흥읍지 향토지> 등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ㅡ앞서 소개한 내용, 광산 김씨 문중기록에 남아있는 그분의 기본 경력만으로도
우리 장흥지방에서는 "능히 추앙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데,
장흥지방 기록에 왜 그분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지?,
또 용산 포곡에 그분 묘소가 실제로 남아있는지? 그 곡절이 궁금하다,
아직은 용산 포곡 현장에 가보거나,
장흥 지역의 광산김씨 족보를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김극통(金克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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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姓名) |
김극통(金克通) |
본관(本貫) |
광산(光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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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時代) |
(1484∼1553) |
자(字) |
가수(可秀) |
호(號) |
우재(友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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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履歷) |
ㅡ김극통(金克通) 24세
(문숙공파/화평부원군파/참판공파/집의공파/도사공파)(1484∼1553) 70歲
ㅡ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가수(可秀), 호는 우재(友齋),
ㅡ아버지는 도사 적(籍)이며, 어머니는 공인 장흥위씨로 참봉 종복(宗復)의 딸이다.
ㅡ어려서부터 성리학에 정통하여 정암 조광조 선생을 찾아가서 같이 강론하는데 정암선생이 "남주의 높은 선비는 참으로 그대이다" 라고 하였으니 그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고, 큰 형, 중 형과 같이 문장과 행의로 세상에서 추중받았고 사림에서 칭송하기를 김씨집의 삼통(三通) 또는 삼수사(三秀士)라 하였다.
ㅡ1507년(중종 8)에 동몽교관이 되었다가 기묘사화이후 벼슬을 버리고 전리로 돌아와 <하서 김인후, 눌재 박상, 송천 양응정> 제현과 교유하였으며
ㅡ충암 김정과는 시로써 교유하였고 저서로 <우재 유고>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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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墓) |
전남 장흥군 남면 포곡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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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父) |
김적(金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