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모 다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싸
마하보디선원 회원님들께
이제 절기가 여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6월 1일은 정기법회였습니다. 이번 정기법회 대는 경주지역에 있는 미얀마 이주노동자들 15명이 와서 그들의 전통므식인 모핸가를 만들어 아침공양을 올리고 법회에도 참석하였습니다.
이번 정기법회 대 설해진 헤조 스님의 법문을 보내드리오니 회원님들의 수행에 참고되시기 기원합니다.
혜조 스님은 6월 3일 미얀마 구호활동차 미얀마로 들어가서 6월 12일 돌아올 예정입니다.
6월 6일은 공휴일 연휴입니다. 이번 연휴는 혜조스님이 미얀마로 가시는 관계로 특별 수련법회를 마련하지느 못할 것이나 연휴 때는 선원으로 오셔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늘 붓다의 메따와 함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하보디선원종무소 합장
보시는 의미 있는 삶의 토대이자 수행의 시작입니다(08.6.1)
오늘은 보시행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법문 중에서 제가 하기에 가장 껄끄러운 법문이 보시에 대한 법문입니다. 잘못하면 대중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설법하실 결심을 하시고 다섯 비구들을 대상으로 처음 법의 바퀴를 돌리신 내용이 사성제의 진리라는 것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일반인들을에게 하신 설법에서는 첫 머리가 보시 공덕에 대한 설법이었습니다.
붓다께서는 수자따의 아들 ‘야싸(Yasa0’에게 도와 과에 이르는 윤리적인 실천수행의 과정을 설법하셨는데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설명하십니다.
1. 다나 까타(Dāna Kathā) : 보시에 대한 담마
2. 실라 까타(Sīla Kathā) : 윤리에 대한 담마
3. 삿가 까타((Sagga Kathā) : 천상과 같은 행복한 삶에 대한 담마
4. 막가 까타(Magga Kathā) : Magga(도) Phala(과), Nibbana(열반)의 깨달음을 위한 좋은 길과 행위에 대한 담마
부처님께서는 보시행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십니다.
“보시행은 현생에서나 내생에서 행복을 얻는 원인이며 닙바나의 기쁨을 얻는 원인이다. 보시행은 인간과 천인들이 얻는 즐거움의 원인들 중 첫 번째 원인이다. 또한 보시행은 물질적인 풍요를 얻게 하는 원인들 중의 원천이다. 불행한 위험에 빠트려진 존재들에 대하여 보시행은 또한 좋은 안내자이며 안전한 장소이며, 휴식처이며, 은신처이다.
내생과 마찬가지로 현생에서도 좋은 안내자, 안전한 장소, 휴식처, 은신처로서 기대고, 바탕이 되며, 매어달릴 곳이 다나(보시) 만한 것이 없다.
실로, 이 보시행은 보배로 장식된 사자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대한 지구와 같이 기댈 데이며, 눈먼자들이 붙잡고 갈 수 있는 밧줄과 같이 의지할 곳이며, 매어달릴 곳이기 때문이다.
이 보시 공덕행은 고통의 고난을 건너기 위한 배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싸움터에서 용맹과 무용으로 무장한 지휘관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인 탐욕과 인색과 같은 적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하거나, 적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연꽃과 같다. 왜냐하면 질투, 인색함과 같은 불건전한 오염으로부터 더럽혀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사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불건전한 적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자의 왕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공포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보시자는 현생에서나 내생에서나 어떤 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보시행은 어마어마한 힘이므로 큰 코끼리와 같다. 보시행은 네 가지 불행의 죄악의 곳에 처해진 사람을 네 가지 행운의 위험이 없는 곳으로 옮겨 놓아주므로 천마의 왕과 같은 것이다.
보시행은 붓다가 걸어왔던 좋은, 진실한 길이다. 내가 바라밀을 실천수행하는 동안 velama, mahagovinda, mahasuassana, vessantara를 행하였던 같은 위대한 보시 자비행을 행하였었다.
덕의 상속자인 보디삿타로의 생에서, 나는 불꽃더미 속으로 나 자신의 몸을 던지는 보시행으로 보시를 받는 자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었다.
더 나아가, 보시행의 공덕은 사카족의 만족, 마라의 만족, 브라흐마의 만족, 우주의 왕의 만족을 세속 세상에서 가져올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초월세계에서 사와까 붓다. 빠잿까 붓다. 삼마삼붓다의 열반을 가져올 수 있다.”
보시는 깨달음의 필수요건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보시를 행한다고 해서 곧바로 지혜가 나타나거나 사성제의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시행은 수행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으나 수행인이 번뇌에 찌든 마음을 맑히기 위한 가장 밑바탕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보시’는 수행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가 반드시 먼저 닦아야 할 덕목들 가운데 첫 번째 수행 항목입니다.
아직 무지가 모질게도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보시행은 삼독심의 첫 번째인 탐욕을 무찌르는 데 있어 최상의 무기인 까닭에 마음 닦는 수행 과정에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들은 자기의 개성을 ‘나’라고 여기고, 자신의 소유물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자기중심적 이기심에 싸여 있습니다. 베푸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이기심과 탐욕의 독성을 치유하는 해독제입니다.
무언가를 베풀면 그것은 바로 공덕과 선업의 바탕이 됩니다. 보시는 도덕성과 선정력과 통찰력을 계발시켜주며 종국에는 윤회로부터 해탈을 성취하게 해줍니다. 이미 해탈로 향하는 길로 굳건히 들어선 사람들조차도 보시행을 계속합니다. 보시는 그들이 해탈을 이루기까지 몸 받아 살게 되는 남은 기간 동안 경제적 안정과 아름다움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탐욕만이 보시의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존재들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 속에 있다는 담마나 사후 세계에 관해 관심조차 없으며 또 무지할 때도 베풀고 싶은 마음은 생겨나기 어렵습니다. 보시행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이로운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위대한 덕행을 실천할 기회를 잡기 위해 잠시도 방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보시의 가치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다면 단 한 끼의 밥도 남들과 나누지 않고는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베푸는 보시행위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기본이 되는 인덕(人德)의 바탕임에 틀림 없습니다. 베푸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가 얼마나 속 깊은지 또는 자기의 한계를 얼마나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수빠니빠따에서는 “베풀 줄 모르고 혼자만 부를 즐기는 사람은 자기 무덤을 파는 사람”(Sutanipata. 102)이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베풂’은 ‘관대함’입니다. 보시행에서는 보시물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겉으로의 행위보다 베풀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합니다. 이 베풀려는 마음은 베푸는 행위에 의해 강력해지고, 다시 그 강력해진 베풀려는 마음은 마침내 자기희생적인 보시행까지 가능하도록 나아가게 합니다. 관대함은 수행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자질입니다. 수행의 목표는 결국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인데, 관대한 마음을 키우면 곧 탐욕과 성냄이 누그러드는 한편 마음이 유연하게 되어 어리석음을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불법을 공부하면서 보시를 하면 연기법에 의해 반드시 그 공덕을 얻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를 통해 얻는 공덕은 베푸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보시했는가, 받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순수한가, 그리고 어떤 물건을 얼마나 보시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먼저 보시하는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붓다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시 행위를 할 때 보시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마음으로 보시할 것입니다.
보시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위상, 인상, 인격에 손상을 입을 것을 두려워 하며 불편한 마음으로 보시 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때로는 편애하는 마음이나 악의 또는 망상에 빠진 나머지 보시를 하기도 하고, 집안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보시를 베푸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사후에 좋은 태어남을 얻기 위한 바람 역시 보시의 동기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지금 베풀어 놓으면 언젠가 이익이 나에게 돌아 올 것이다”는 것을 예상하며 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보시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좋지 않게 여길까봐 불안해서 자선을 베푸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적 압력에 못 이겨 베푼다면 그 공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역시 미미한 결과 밖에 얻지 못합니다. 상대의 호의에 대한 응답으로 베푸는 것 역시 칭찬할 한한 것이 못 됩니다. 이것은 빚을 갚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하는 자선 행위 혹은 보답을 바라고 주는 것 역시 이기적인 것이어서 값진 보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뇌물을 건네주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 자신의 마음을 가꾸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혹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베푸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므로 좋은 기분을 맛보고자는 생각으로 베풀기도 합니다. 이외에 어떠한 군더더기도 붙어 있지 않은 “나는 밥께나 먹는데, 이 사람들은 밥조차 먹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동기로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경전에서는 그 무엇도 바라는 마음 없이 공양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보시할 때는 시물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베푸는 사람이 선의를 지닌 자세로 보시했느냐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공손히 베풀어야 합니다. 받는 사람이 굴욕감을 느끼거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베풀어야 합니다. 베푸는 사람은 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편하게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이 기꺼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보시할 때 주고받는 사람 사이에는 서로 간격이 없고 넉넉한 정이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자기 손으로 직접 베풀어야 합니다. 보시행을 할 때 스스로 직접 참여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이것은 주고받는 사람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놓아주며 그것이 곧 보시의 사회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몸소 나서서 따뜻한 인정으로 덕을 베풀 때 이 사회는 서로 걱정해 주고 돌봐주는 하나의 유기체로 융합될 것이다.
그런데 베푸는 행위로 인하여 오만과 자만심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벽에 대한 약간의 염려가 있다면, 혹은 그냥 고요함을 유지하고 싶다면 자신을 밝히지 않는 것 또한 수행의 한 차원이 될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또한 이렇게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맛난 것을 즐기면서 남에게는 맛없는 것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 베푸는 선물의 종이다. 자신이 즐겨하는 것과 같은 것을 베푸는 사람, 그는 선물의 친구 쯤 된다. 자신은 아무 것이나 되는 대로 만족하며 남에게는 좋은 것을 베푸는 사람, 그가 곧 주인답게 베푸는 자이며 자신이 베푸는 선물의 어른이요 주인이다”(D.1.137:kutadanta Sutta)
보시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들 중 빠트릴 수 없는 것은 보시하는 사람이 베풀기 전과 베푸는 동안, 그리고 베풀고 난 후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앙구따라 니까야에서 붓다께서는,
“고매한 마음으로 베푸는 사람은 주기 전에도, 주면서도 그리고 주고 나서도 기뻐하는 사람이다.(A.3, 336) 베풀어 볼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보시하기 이전에 이미 즐거우며, 다른 이의 필요함을 충족시켜 기쁘게 해준다는 점에서 주는 동안에도 즐겁고, 주고 나서는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여 만족한다.”(A.4,220)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분별없이 되는 대로 주는 것과 지혜롭게 베푸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덕을 베푸는 모든 과정이 지혜에 입각하여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보시행이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베품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업의 법칙에 따라, 보시 행위는 미래에 반드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분명히 이해하면서 베푸는 것,
둘째는, 베풀어지는 물건이나 주는 이, 받는 이 모두가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베푸는 것,
셋째, 깨달음을 향한 노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베푸는 것입니다.
보시의 동기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열반을 성취하고자 쏟는 노력들을 복돋우기 위해 베풀겠다고 마음먹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시를 통해 참다운 평화와 청정함을 얻고자 한다면, 완전한 베풂인 보시 바라밀을 실천해서 깨달음의 성취를 열매 맺을 공덕의 창고를 지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목표를 세우고 나갈 때 우리의 속마음은 베푸는 행위 뒤g에서 자연히 유순해질 것이며, 이처럼 부드럽고 푸근한 마음이야말로 해탈을 이루는데 가장 근본 요소인 선정과 지혜 계발에 꼭 필요한 자질이 될 것입니다.
다음에 보시 받는 자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한 번은 코살라 왕이 붓다께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할 것인지에 대해 여쭌 적이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베풀고 나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베풀라”고 대답하시자 그는 다시 큰 공덕을 얻기 위해서 누구에게 베풀어야 되는지를 여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질문을 두 가지로 구별하여 대답해 주었습니다. 먼저 덕스러운 이에게 베푼 공양이 큰 결실을 맺는다고 답하시고, 이어서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지계, 선정, 지혜, 해탈지견을 성취한 덕스러운 출가 수행자에게 베푼 공양이 가장 수승한 공덕이 된다고 밝히셨습니다.
받는 사람이 얼마나 청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는 보시의 공덕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됩니다. 즉 받는 사람이 훌륭하면 할수록 보시자에게 돌아올 공덕이 큰 까닭에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붓다께서는 최상의 수혜자로 위없는 깨달음 성취한 붓다와 출세간의 도를 닦아 과를 이룬 당신의 제자들 같은 거룩한 성자들을 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지혜를 통해 성취한 청정한 마음이야말로 베푼 이의 보시행으로 하여금 많은 공덕을 가져오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스러운 경지에 들려는 목표를 세우고 수행하는 스님들께, 혹은 오계를 수지하고 불법에 따라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베푸는 보시 또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성과를 증득한 거룩한 이들이 공양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베푸는 이로 하여금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공덕을 지을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신적으로 그다지 향상되지 못한 사람에게 베풀어질 때에도 보시는 역시 유익함이 있습니다. 베푸는 이의 뜻이 좋으면 비록 받는 사람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보시하는 사람은 공덕을 쌓게 되며, 나아가 이런 보시행으로 인해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탐욕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이 굳건하게 자리 잡힙니다.
다음에는 보시물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베풂의 일반적인 형태는 물질적인 보시입니다. 이 때 보시물이 꼭 비싼 것이어야만 큰 공덕을 가져온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루에 밥 한 그릇 밖에 먹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이 그날 양식의 전부인 한 그릇의 밥을 보시할 때 그는 매우 큰 보시를 한 셈이고 공덕 또한 지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부자가 스님이 탁발하러 올 것을 이미 알았으면서도 앞의 가난한 사람이 한 것과 같은 분량과 질의 공양물만을 준비했다면 그 공덕은 지극히 빈약한 것이 될 것입니다.
“작은 데서 내준 것이 천 배의 값이 있습니다. 빈곤한 살림 속에서 베풀어진 보시가 더욱 값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바르게 살며, 분수에 맞게 가족을 부양하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낼 때 그의 보시는 천 번의 제사를 올리는 것보다 더한 가치를 지닌다”고 붓다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깊은 신심으로 베풀 때 보시는 복된 미래를 맞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유용한 것이면 다 보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음식물을 베푸는 것은 실상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과 활력과 지성을 주는 것입니다. 남에게 그와 같은 것을 베푸는 것은 실은 자기에게 베푸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어서 붓다께서는 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시하는 사람이 덕스러울 때 보시물은 베푸는 사람에 의하여 청정해진다. 받는 사람이 덕이 있으면 받는 이에 의해서, 양쪽이 모두 덕스러울 때는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에 의해 청정한 시물이 되며 만일 양쪽 모두 순수하지 못하다면 부정한 보시가 된다.”(Dakkhina vibhanga sutta:중아함 180)
베풀기 전이나 베푸는 동안이나 그 후까지 욕심의 흔적이 조금도 없이 베풀 때 그 고결한 마음에 의해 행해진 보시물이야말로 실로 위대한 것이 된다.
보시 중의 보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디삿타가 하는 보시 바라밀이 있습니다. 보시행 가운데는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베푼 결과가 어떤 세속적 이득을 가져올 것인지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그런 보시가 보시 바라밀입니다. 그러한 보시는 자기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없애겠다는 생각, 즉 탐욕에서 벗어나겠다는 깊은 뜻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나 가장 주기 어려운 것을 베풀고자 애씁니다. 이처럼 보살들은 언제라도 기회만 오면 오로지 최상의 완전한 보시 바라밀을 실현하기 위해 베풉니다. 우리들의 보시의 최선의 목표는 이러한 보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시는 사회 구성원들을 융합시키고 단결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보시는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놓인 물질적, 경제적 격차를 메꿔준다는 의미를 넘어서 심리적 단절을 이어주는 최선의 삶의 양식입니다. 보시가 자리 잡을 때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어느 새 사라져 버립니다.
마음이 너그러운 이는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친한 사람이 많습니다. 앙구따라 니까야에서 붓다께서는 보시를 베푼 결과 누리게 되는 세간적인 복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색하지 않고 후덕한 사람은 남들의 호감을 얻는다. 아라한들이 그에게 다가와 그의 공양을 받고 그에게 제일 먼저 법을 가르쳐 준다. 그에 대한 좋은 평판이 퍼진다. 그는 어떠한 모임에도 자신감과 위엄을 가지고 참석할 수 있다. 사후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저는 얼마 전에 우리 회원들께 미얀마 재해 성금에 동참하도록 권선하였습니다. 적지 않은 회원들께서 동참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경이로운 것은 구호 성금 권선에 동참하는 분들을 보면 반드시 넉넉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시는 수행입니다. 보시는 나의 내적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토대가 되는 수행입니다. 보시로 시작하여 통찰 수행으로 나아가는 마음을 지니는 것으로 삶의 토대를 만들도록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