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군행진곡 (공목 작사, 정율성 작곡)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조국의 대지 위에 민족의 희망을 안은 우리 힘을 막을 자 그 누구냐? 우리는 싸움의 전위 우리는 민중의 무장 두려움 없이 굴함 없이 영용하게 싸워 왜놈들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자 자유의 기치 높이 날리자 아, 나팔소리 울린다.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동무들 발을 맞춰 항일의 싸움터로 동무들 발을 맞춰 적들의 후방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나가자 화북벌로! 장성 밖으로!
오늘날 중국 군대인 인민해방군의 공식 군가로 사용되고 있는 ‘팔로군(八路軍) 행진곡’은 1939년에 조선인 정율성 선생이 작곡했습니다. 당시 정 선생의 나이는 겨우 22세로 이 곡은 음악가로서의 청년 정율성의 천재성이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1918년 8월 13일 광주시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난 정 부은(정율성의 본명)은 민족의식이 강했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죠.
그의 아버지 정해업은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자 낙향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 기개 있는 선비였고, 3·1운동에 가담했던 큰형 효룡은 중국으로 망명, 조선으로 돌아와 비밀공작을 수행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1934년 옥사합니다. 국민혁명군 제 24군의 참모 직책을 맡고 있던 둘째형 인제도 무한전투에서 전사했죠. 바로 위의 셋째형 의인 또한 조선의용단 군정학원에서 학생 모집책임자로 활동했습니다.
청년 정율성이 중국행을 결심했던 것도 이런 집안내력과 무관하지 않았죠. 그는 15세 때인 1933년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 약산 김원봉이 이끌던 항일투쟁조직 의열단이 조직한 ‘조선혁명 간부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는 이 학교에서 군사학과 삼민주의, 조선역사, 맑스레닌주의를 배웠습니다.
이곳을 졸업하고 항일운동에 투신한 정 선생은 친구의 소개로 중국 상하이에 체류하던 러시아 음악가 ‘크리노와’(Krenowa)를 소개받습니다. 크리노와는 레닌그라드 음악대학 교수 출신으로 단박에 정율성의 재능을 알아보았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난징에서 상해까지의 수백Km를 오가며 음악적 재능을 불태웠던 정율성에게 크리노와는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명곡 음악회”의 테너 선창을 맡기기도 했죠. 2년 남짓 정율성에게 성악과 음악이론을 가르쳤던 크리노와는 그에게 이탈리아 유학을 제안했지만, 그는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민족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1936년 정율성은 김산(바로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입니다) 등이 결성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합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한중 연합전선을 통한 일제 타도’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난징에서 결성된 진보적 항일문예단체인 ‘5월문예사’ 창립대회에서 정율성은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불러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죠.
이듬해인 1937년 7월, 로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에 맞서 정율성은 ‘대공전복무단’(大公戰服務团) 선전대대 음악대장을 맡아 항일 가요들을 작곡하기 시작합니다. “일제의 포화 두렵지 않거니”로 시작되는 ‘유격전가’와 ‘전투부녀가’ 등이 이 시기 작곡된 곡들입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채 스물이 안 된 19세였습니다.
당시 장개석군의 대규모 소탕작전을 피해 고난의 ‘대장정’을 단행했던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옌안에 있었습니다. 부패할 데로 부패한데다가 일제와의 전투에도 소극적이었던 국민당 정부에 실망한 많은 중국 젊은이들처럼 약관의 청년 정율성도 옌안행을 결심하죠. 정 선생의 부인 정설송 여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율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어깨에 메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힘 있는 발걸음으로 호호탕탕한 옌안행 대열에 따라섰다.”고 말이죠. 중국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의 생활은 몹시 궁핍하고 어려웠지만 음악가 정율성에게는 불타오르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 당시 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쳤던 그가 작곡한 ‘옌안송’은 옌안뿐 아니라 전 중국으로 퍼져나가 수많은 중국인들을 항일투쟁 전선으로 불러 모은 불멸의 송가였습니다.
팔로군 전투부대의 모습.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정율성은 시인 공목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팔로군대합창’의 노랫말을 써줄 것을 부탁합니다. 전선에서 돌아와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던 공목은 그의 경험을 살려 불과 몇일 사이에 가사를 써서 정율성에게 건네줍니다. 팔로군에 걸맞게 공목이 쓴 가사는 ‘팔로군 군가’, ‘팔로군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자야강 병사의 노래’, ‘기병가’, ‘포병가’, ‘군대와 인민은 한집안 식구’, ‘팔로군과 신사군’ 등 모두 8수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곰PD주-중국공산당의 무장조직인 ‘홍군’은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 이후 국민혁명군 제팔로군으로 개편하고 신사군(新四軍)과 함께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팔로군 산하에는 린뱌오의 제115사(師, 한국군의 사단급 부대), 허룽의 제110사, 류보청의 제129사가 있었고, 팔로군은 중국 내전중이던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다시 이름을 바꿉니다)
1939년 겨울, 정율성이 작곡한 ‘팔로군대합창’은 로신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책으로 엮어져 전국에 보급되었고, 1940년 초 정율성의 지휘아래 ‘팔로군 대합창’의 첫 공연이 옌안에서 열렸습니다. 그 후 ‘팔로군군가’와 ‘팔로군행진곡’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정식 군가로 채택이 됩니다. 1942년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조선인 장군 무정을 따라 태항산으로 들어가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혁명군정학교 등을 조직하는데 참여합니다. 이때 그가 작곡한 곡으로는 ‘조선의용군 행진곡’ ‘혁명가’ 등이 있죠. 특히 조선의용군 행진곡은 지난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의 순안공항에 내릴 때 연주되었던 곡이기도 합니다. 일본이 패망하고 팔로군이 인민해방군으로 개명되자 ‘팔로군행진곡’도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곡명이 바뀌게 됩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북경 천안문 광장에 울려 퍼졌던 곡도 바로 정율성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이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정율성은 북한에 돌아와 인민군 협주단을 창설하고 단장을 겸했으며 1949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작곡부장을 맡았죠. 이 당시 그는 ‘해방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을 작곡했습니다.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후일 ‘조선인민군가’가 되었지요. (이곡 역시 지난 2007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한 인민군 군악대가 연주했습니다) 곧이어 벌어진 한국전 기간 동안 그는 ‘조선인민 유격대 군가’,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등의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1951년 4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갑니다.
음악가 정율성의 생애는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59년 그는 ‘반당분자’라는 누명을 쓰기도 했고, 1960년대를 휩쓴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정율성은 간첩 혐의로 수감되어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10여 년 간 그는 고된 노동과 엄중한 감시 속에서 고통 받아야 했고, 그의 작품들은 연주되거나 방송되지 못했죠. 마오쩌뚱 사후인 1976년 그는 사면·복권되어 새로운 창작에 몰두하지만 안타깝게도 그해 12월 7일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고 정율성 선생(1918.8.13~1976.12.7)
중국의 3대 음악가중 한명으로 추앙받는 그는 생전에 가곡과 합창곡, 가극, 동요, 영화주제곡 등 360여 곡의 노래를 남겼습니다. 중국의 국립묘지인 ‘팔보산 혁명 공묘’에 안장된 그의 비석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중국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