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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소수의 답변 불가능한 오류가 있어도 성경은 무오하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골칫덩어리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든 면도 있습니다. 사실 '완전무오'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복음주의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어느 정도는 과장하거나 극대화시킨 면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유명한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성경의 무오성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이란 성경 원문은 사실과 반대되는 그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과연 이것이 진짜 성경의 무오성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자들이 성경의 무오성을 정이할 때
첫째, 성경이 어떤 책인지
둘째, 성경의 무오성 즉 완전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셋째, 저자들에게 임한 영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거나 알았더라도 충분히 주의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문제를 확대시킨 것입니다. 근본주의 또는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당연히 완전무오하고 '어떤 종류의' 오류도 없을 것이라고 속단해서 가르쳤습니다. 물로 좋은 의도이고 99,99% 맞는 말이지만 정확한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100% 정확한 사실은 아니기 때문에 사단이 그 허점을 뚫고 들어와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이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방법이 앞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를 재정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제게 주신 깨달음도 그 세 가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세 가지를 하나씩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1)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의 무오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이 어떤 책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과연 성경은 어떤 책일까요? 무엇보다, 성경은 구속사를 다룬 책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구속사입니다. 성경은 무엇보다 구속사를 계시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저는 『정경의 권위』라는 책에서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경은 구속사입니다.
이것을 요즘 인기 있는 'W'라는 연속극에 빗대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이 연속극에서 여자 주인공은 만화 속으로 가끔 끌려들어 가곤 합니다. 그런데 만화 속에서는 이 세상과 같이 일정하게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만화를 보면 '한 달 후', 혹은 '1년 후'라고 시간은 건너뛰어 스토리를 전개하지 않습니까? 주인공 강철과 관계가 없는 시간은 생략됩니다. 강철과 관련이 없을 때에는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시간이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강철과 관계있는 사건만 현실에서와 같이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러갑니다. 왜냐하면 만화나 연속극은 주인공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이와 똑같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기 위한 책입니다.
디모데후서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의 주인공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이고, 예수님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즉 성경은 구속사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웨인 그루뎀은 이것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근본적으로 구속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와 관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형용 박사님 역시 '신양 정경과 구속역사(계시)'라는 소제목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속역사가 신약정경의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정경의 개념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정경을 바로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것은 구속역사의 개념이다. ... 신약과 전체 성경은 하나님의 나타내시고 구속하시는 사역의 기록이며, 증거요, 증언인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관심은 이 역사를 확증하는 데 있다.'
이제 계시의 역사가 직접, 간접적으로 어떻게 구속역사와 서로 잘 짜여져 나타나는지를 고찰하도록 하자. 즉 계시역사가 전체 구속 역사 과정 안에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 여기서의 원리는 구속적 행위와 계시적 상관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행위와 해석의 상관관계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의 말씀은 그의 행위와 관계되어진다. ...
말씀계시는 역사 안에서 발생한 구속적 사건들 주변에 밀집되어 있다. ... 행위 없이는 계시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속적 행위 없이는 계시는 공중에 달려 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보스(G. Vos)는 '계시는 구속과 서로 짜여 있기 때문에 구속을 생각지 않게 되면 계시는 공중에 매달리게 된다.'라고 구속적 행위와 말씀계시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통찰력으로 빛나는 정말 중요한 지적이지요! 성경은 구속사입니다. 그래서 구원자인 예수님과 관계 있는 것만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구약은 물론이고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 '모든 진리' 혹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구속사와 얽혀 있고 구속사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것이 성경의 주요 목적입니다(딤후3:15). 실제로 바울이 '계시'받은 '비밀'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인 복음 아닙니까?(계시: 롬16:26, 갈1:12, 3:23, 비밀: 엡3:3-9, 골1:26-27, 2:2, 4:3-4, 딤전3:9, 3:16) 성경의 목적은 이처럼 복음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신정통주의나 수정적 복음주의자들처럼 성경이 계시하는 복음 진리만 바르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속사와 관련 있는 역사와 기적들도 거짓이면 안 됩니다. 복음뿐 아니라 복음에 관계된 모든 역사와 기적들의 진정성이 요구됩니다. 그래야 복음의 진정성 역시 확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구속사를 다룬 것인데 이 구속사 즉 복음에서 모든 기독교 윤리가 나오고, 그리고 구속의 결과 성령이 임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이므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필요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교훈들의 뿌리가 구속이라는 것입니다(롬12:1 "그러므로" 참조). 그러므로 넓은 의미로는 단지 복음뿐 아니라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구속사 안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기록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의 무오성이 성경이 계시하는 구속사와 이와 관련 있는 모든 역사와 기적들, 그리고 복음에서 파생되는 모든 진리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조금도 오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완전무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저는 자유주의 신학이 부정하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보호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속사를 다룬 책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그와 관련된 역사와 기적들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된 교회에 필요한 윤리와 여타 가르침을 주기 위한 책이지, 별 의미 없는 숫자나 지명까지 100%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로, 19세기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라 일컬어지는 찰스 하지는 고린도전서 10장 8절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수학적으로 정확한 숫자를 제시하려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 아니었다. ... 성경저자들의 무오성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서 그들이 말해야 될 것을 의도하셨던 것을 정확히 말한 데 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들이 인간의 방식을 따라 말하고 그들이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려는 의도가 없이 ... 대략적인 숫자들을 사용하도록 하셨다. ... 숫자적인 정확함으로 말할 의도가 없었다."
피터 데이비즈는 보다 상세히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이 본문에서 사람들에게 구약 역사를 가르치려 하지 않으며, 분명 구약 역사의 세부 내용도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바울은 사람들이 아는 구약의 한 본문을 설명을 위한 실례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 독자들이 이 구약 본문을 알고 거기 나오는 사건을 알아보리라고 추측한다, 그들이 구약 속의 그 사건이 일어났던 일임을 안다면, 그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일을 할 경우 하나님이 재차 그와 같은 일을 하실 수도 있다는 경고를 얻을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점을 고려할 때, 죽은 사람이 10명이냐, 1,000명이냐 20,000명이냐 24,000명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부도덕한 일을 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며, 고린도 사람들도 그처럼 부도덕한 일을 행하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바울이 분명 어떤 이유로 뭔가 잘못 생각한 경우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가 특별한 계시를 받고도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은 경우일 것이다), 이런 생각의 실수가 그의 가르침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만 해도 설교자들이 성경의 세부사항에 대해서 이와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는 아무 영향이 없는 설교를 얼마나 자주 들었던가? 설령 우리는 그런 실수를 알아차린다 해도(보통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그냥 살짝 웃으면서 설교자기 실제로 강조하는 주제에 집중한다(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울은 십중팔구 글로 기록된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아서 자기가 쓴 것이 맞는지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물론 그도 때로는 구약성경을 기록해 놓은 두루마리를 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서신을 받아 적게 하는 내내, 기억을 더듬어 사례를 인용했기에 세부 사항에서는 실수를 저질렀다. 바울은 지금 구약 주석을 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세부 사항에서 실수를 저지른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가르침에서 경고를 얻으려 하는지 여부와 우리가 세례를 받고 만찬에 참여하면 설령 우리가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질렀던 부도덕에 빠져도 심판에서 구원을 받으리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이 제시한 숫자에서 1,000명을 빠뜨린 것이 문제가 아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들어 있을 것이냐가 문제다."
성경저자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그들이 계시 받은 복음을 비롯한 진리들이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밝히 보여주는 복음과 진리들에 주목하고 사소한 오류에 주목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그런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오류들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한편 이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이 완성되었고 남은 것은 재림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구속적인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더 이상 기록되지 않습니다. 정경이 완성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 구절에 대해 웨인 그루뎀은 이렇게 썼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옛적에 말씀하신 것과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의 대조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절정이요 구속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최종적인 계시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구약의 그 어느 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아들을 통한 계시의 위대함은 히브리서 1장과 2장을 통해 거듭 강조되었다. 이 모든 사실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을 볼 수 있으며, 한번 이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이 계시에 관해 어디에서 배울 수 있는가? 신약성경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최종적이고, 권위 있고 충분한 해석을 제공해준다. 사도들과 그의 가까운 동료들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을 보고하고 해석해주었다. 따라서 그들이 그 모든 글들을 끝마친 후에는 더 이상 그 어느 것도 똑같은 권위로 성경에 첨가될 수 없었다. 신약의 사도들과 그들이 인정한 동료들의 글이 완성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 부활, 그리고 그것이 모든 시대의 신자들의 삶에 주는 의미에 관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기 원하시는 모든 것들의 문서화된 계시이므로, 일단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다른 어느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면에서 히브리서 1:1-2은 우리가 신약성경 이후에는 다른 어느 것도 첨가시킬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정경의 문제는 이제 막을 내린 것이다."
하나님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말세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책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생활하며 "들은 자들" 즉 사도들이 예수님께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고, 추가로 그 의미에 대한 계시를 받아서 썼습니다. 그것으로 특별계시는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속사와 불가분의 관계인데, 구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들을 통해 '큰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충분히 설명되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히2:2-3).
이제 그 누구의 글도 성경만큼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 누구의 설교나 글에도 성경만 한 권위가 없습니다. 성 프랜시스나 비오 신부, 썬다 싱이나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글이겠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권위를 주었습니까? 그들에게는 아무런 영적 권위도 없습니다.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구약시대 때 수천 년 동안 구속이 서서히 준비되다가,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셔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할하셔서 구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구속에서 나오는 복음과 진리들이 완벽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이 일은 단지 말로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성령의 은사로 함께 증거해주신 것입니다(히2:4).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겸손히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복음과 진리들을 배우고 실천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수천 년에 걸친 하나님의 원대한 역사를 보지 못하고,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오류들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마저 부인합니다. 이것은 주제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노아,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윗,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 등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확증된 수천년에 걸친 하나님의 역사보다 자신의 작은 머리를 더 믿을 정도로 마음이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단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가련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 절대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기름 부으신 사도와 선지자들 즉 성경저자들을 믿으십시오. 그리소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복음과 진리들 위에 믿음의 닻을 내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