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3:8-12 부르심의 목적 2006. 4. 19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하였느니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제대로 보게 되면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말씀이란 우리가 늘 기피하고 싶은 말씀이지 주야로 묵상하고 즐거워하고 싶은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 날 갑자가 모세가 바로 왕에게 나타나 히브리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내 백성을 내어 놓으라는 말씀을 들은 바로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조상 때로부터 바로 왕의 소유요 재산인 히브리 노예들을 여호와의 것이라고 내어 놓으라고 하니 바로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행패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누구관데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그렇게 말한 바로 왕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자기의 아들도 죽고 나라도 망하고 나서 노예들의 하나님인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었음을 증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도저히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들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래서 몇 몇 분들은 설교를 듣다가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된다면서 밥도 사주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만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고 들린다는 것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인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이 마지막이란 편지 전체의 마지막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마지막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인간을 위하여 세운 제도들을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는 말씀과, 종들이 까다로운 주인이라도 순복하라는 내용과, 아내와 남편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하고서 이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우리의 본성상 얼마나 불가능한 말씀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단 한 말씀이라도 우리가 평소에 잘 실천하는 말씀이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먼저 다 마음을 같이 하라고 합니다. 어떤 단체이든지 하나가 되려면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고 법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곳은 언제나 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면 법이 없어도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나가 되려면 나의 마음이 없어져야 하나가 됩니다. 나의 마음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낮아짐이 어떤 것입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누가 찾아 왔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집도 없다고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주시는 대로 받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사무소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면 정부에서 지원하는 것이 있으니 가라고 했지요! 그러자 잘 몰라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였더니 화를 내면서 욕설 비슷하게 하면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보면 대부분 술에 절여 있습니다. 전에 부산에서 강의 중에 구걸하는 사람이 와서 강의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얼른 돈을 주었는데 강의 마치고 나가보니 길에서 소주 마시고 있었습니다.
구걸하는 정도면 얼마나 마음이 낮아졌겠습니까? 그러나 몇 마디 한다고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낮아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적인지를 예수님께서 이방인 여인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인의 자녀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자, 옳소이다마는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한 마음이 되려면 다 이 낮아진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거지가 되어 있어도 자존심상한다고 화내고 돌아서는데 어느 누가 마음을 낮추어 하나가 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서로 적당하게 상호위선과 기만 속에 가면무도회가 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자기의 약함과 부끄러움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을 같이 하여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까?
마음이 높아지고 눈이 높은 것이 다 죄가 되는데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높아져 있는지 이 말씀 앞에서 보게 됩니다. 주의 성령께서 이 말씀으로 우리를 찔러 쪼개어 주시면 우리의 마음이 낮아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어떤 예리한 검보다 더 예리하여 우리의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서로 체휼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5-16절을 봅니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체휼이란 어려움을 함께 하는 것인데 현대어로 동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체휼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기에 주님의 체휼을 입은 자이기에 마음이 낮아지게 되고 한 마음이 되면 형제를 체휼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이런 말씀 하나 하나도 결국 우리의 능력과 실력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제대로 형제를 사랑하고, 언제 한번 제대로 형제를 불쌍히 여겼으며, 언제 마음이 겸손하여 진 적이 있습니까? 늘 경험하는 바는 자신만 사랑하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여기며 교만덩어리로 살고 있는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이루어 내셔야만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루어 내시되 우리의 불순종을 배경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를 부인하고 그런 열매가 나타난 것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열매가 나올 수가 있는가? 이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게 되는 것과 이 말씀 중에 어느 것이 더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입니까? 두 말씀 다 우리의 본성적인 능력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빌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을 생각나게 합니다. 출애굽기 21장의 폭력에 관한 법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이 받은 손해보다 지나치게 복수 하려는 마음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손해를 되로 받으면 말로 갚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봅니다.
마태복음 5:38-42절입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이 말씀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정황에서 가능한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는 원수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지 그 사람이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에게 복을 빌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고 살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 고달픈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고 힘들고 어렵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가 남의 탓입니다. 가족을 탓하고 이웃을 탓하고 환경을 탓합니다. 그러니 갈수록 더 고달프고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이렇게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더더욱 고달픈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9절을 보시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비는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런 삶이 되지 않으면 계속하여 원수 같은 자들이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숙제를 미루어 놓으면 더 많아지듯이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부르심으로 이끄시는데 우리가 거부하고 있으니 자꾸만 원수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숙제를 대신해주시면 안 됩니까? 대신해주게 되면 내가 주님의 원수였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원수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주신 그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3-25절입니다.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욕을 욕으로 갚으시지 않으신 그 은혜를 맛보게 하시기 이하여 우리 주변에 원수들을 포진시켜 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는 것이 결국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고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그 받을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에게 돌리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지난주일에 보았던 고린도후서 5:19-21절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가 받은 복이고 누릴 복인 것입니다.
10-12절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들은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며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고 이를 좇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를 향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을 피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나의 편함과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자리는 원수가 둘러쳐진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원수를 사랑하시면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맛보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복을 이어받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받을 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