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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초등학생 학부모로부터 자녀가 과학시험을 봤는데 정답이 이상하다는 문의 전화를 받았다. 문제 중 하나가 ‘이산화탄소는 물에 잘 녹는다’는 문장이 O인지 X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촛불을 물에 띄우고 병을 뒤집어 씌우는 실험처럼 이산화탄소가 물에 잘 녹는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 학생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출제자의 의도는 초등학교 6학년에서 배우는 ‘여러 가지 기체’라는 단원과 관련해 산소나 질소 등 다른 기체에 비해 이산화탄소가 물에 잘 녹는 기체인가를 묻는 문제였다고 한다. 그래서 답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학생의 부모는 “초등학생이기에 망정이지 중학교에서라면 이런 애매한 문제로 아이의 인생이 오락가락할 수 있다”며 흥분했다. 과연 이산화탄소는 물에 잘 녹는가? 잘 안 녹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피곤한 과학 세상’에서 살고 있다.
종합적인 판단력을 길러주는 과학교육
도대체 과학교육을 왜 하고 있는가?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인간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누적된 지식과 방법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정답은 명확하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인 자연과 다른 인간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런 관계는 다양한 종류의 문제를 일으키며 이 문제는 생존 또는 행복한 삶을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나 혼자만의 입장이 아니라 나와 맺고 있는 다양한 주변인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결국 문제의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과연 어떠한 삶이 행복한 것일까? 아마도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그 결과가 다른 사람에 의해 발생했다고 생각하고 남의 탓만 한다면 우리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비록 원하던 결과가 아니더라도 주어진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선택을 스스로 할 때만 잘못된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과학교육은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정보를 모아 해석하고 판단하는 방법을 익히는 훈련이 돼야 한다. 즉 혼자의 힘으로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 지에 대해 생각하고 실행하도록 교육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 과정에서는 위대한 천재 과학자가 꿈속이나 사과나무 아래서 신의 계시로 진리를 터득했다고 알려주며 공식이나 개념을 암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또 앞서 소개한 과학시험 문제의 사례처럼 문제 아닌 문제를 학생이 풀도록 하고 있다. 과학교육에 과정과 논리는 없고 지식으로 포장된 결과의 암기만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문제들을 교과과정에서 만날수록 교육의 질은 당연히 높아질 것이다. 과학 교실이 ‘실전대비’문제로 이뤄져야 함은 이 때문이다. 사실 과학을 하는 과정은 인간의 인생 과정과 똑같다. 남들이 발견한 과학 지식을 이해하는 것, 남들이 밟아온 과정을 수동적으로 이해시켜 같은 능력을 갖길 바란다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훌륭한 연주가의 음악을 들려주고 똑같은 연주를 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생들로 하여금 과학 활동을 몸소 체험하게 하면서 그 과정에 담긴 과학적 원리와 지식 뿐 아니라 방법을 능동적으로 배우도록 해야 한다. 이런 과학교육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교육 목표에 부합하는 프로그램, 탐구와 학습 자료, 교사의 지도 기술이 필요하다. 더불어 프로그램과 학습 자료를 개발하는 시스템, 실험 재료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시스템과 교사의 교육관련 시스템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많은 재원과 노력, 시간이 든다. 이같은 어려움 때문에 아직도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은 무의미한 과학적 용어와 암기식 단답형 문제들이 칠판을 채우고 있다. 아이들은 책이 아니라 어른에게서 배운다 세계 각국은 과학이 진정한 국가의 경쟁력임을 간파하고 과학교육을 개혁하고 있다. 한 예로 미국에서는 국가 주도로 이미 20년 전에 ‘어린이를 위한 과학기술 프로그램’(STC, Science &Technology for Child)라고 하는 탐구 중심의 과학 프로그램을 개발, 10년 넘게 현장에 적용해 괄목할 만한 교육 결과들을 얻고 있다. 스미스소니언연구소와 국립아카데미는 국립과학자원센터를 운영하며 프로그램 개발을 주관한다. 국립과학재단과 많은 사기업이 재원 조달에 참여하고 있으며 캐롤라이나 바이오로지컬(Carolina Biological)이란 과학교육 자료 업체가 교구와 자료의 공급을 맡고 있다. 국립과학자원센터와 캐롤라이나 바이오로지컬사는 정기적으로 교사 연수를 담당하며 교육 자료 개발, 보급 시스템 구축, 교사 교육 체계를 구축하는데 힘쓰고 있다.
올해 전국 5개 고등학교에서 시범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차세대 과학교과서'. |
미국의 과학교육 프로그램은 학생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한 실험을 고안하도록 설계돼 있다. 또 실험 결과의 해석을 통해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탐구과정으로 이뤄져 있다. 그 저변에는 우주의 운행 원리, 협력과 조화라는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철학이 짙게 깔려 있다. 우리보다 교육 여건이 열악한 중국에서도 1년여 전 과학교육을 혁신하고자 어린이를 위한 과학기술 프로그램을 자국 초등학교에 시범 운영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지금 우리가 봉착한 문제는 무엇인가?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자. 이산화탄소는 물에 잘 녹는가? 이러한 질문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배우게 하는가?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답하는 것은 아닌가? 학생들의 인생을 좌우하는 우리 과학교육은 올바른 것인가? 과학교육 문제를 해결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푸념하는 이 순간에도 아이들은 자라고, 우리의 20년 후가 결정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뿐 아니라 중국이나 말레이시아 등의 과학교육이 변하고 있는데 우리만 제자리에 서있다. 이제 이 문제가 다른 사람의 결정에 의한 결과라고 남의 탓하지 말자.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최선의 결정을 한 뒤 작은 실행부터라도 시도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자문해보자. 우리 어른 과학자는 우리의 과학교육 문제와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 나가고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이들은 책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행동으로부터 배운다.
배혜경 아하사이언스 대표, 유회준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첫댓글 너무길어서안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