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회 - 부동산 투기의 역사
○ 복부인, 떴다방, 강남 신드롬
1966년 6월. 지금의 한남대교(옛 제3한강교) 남단에서 막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씨와 서울시 도시계획 간부들이 남쪽 땅을 보고 있었다. 동서로 8km, 남북으로 5km나 되는 넓은 들판을 놓고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해 12월 28일. 건설부 공고로 이 들판이 토지구획정리사업 예정지로 지정됐다. 강남개발의 대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강남 땅 투기 역사와 함께…
이때까지만 해도 땅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엔 투기란 말조차 없었다. 그러나 66년 1월 한남대교가 착공되면서 주변 땅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70년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냈던 손정목씨의 증언. “제3한강교가 강남 땅값이 급등하는 이른바 ‘말죽거리 신화’의 계기가 됐다는 것을 박정희 대통령과 윤치영 시장, 그리고 공사를 맡은 현대건설 등 아무도 몰랐다.”
○ 말죽거리 투기의 역사
▶ 말죽거리의 1968년 모습. 온통 논밭뿐이던 이곳을 개발하려는 영동개발계획이 66년 발표되면서 거센 투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65년의 말죽거리는 온통 논밭이었다. 마을이라고는 지금의 교육문화회관 근처에 있던 잔디마을 정도뿐이었다. 이런 말죽거리가 북적거린 것은 서울시가 영동개발 계획을 내놓은 66년부터였다. “말죽거리에 땅을 사면 떼돈을 번다” 는 소문이 나돌면서 강북의 돈 있는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강북에서 동작동 국립묘지(현충원)까지 버스를 이용하고 말죽거리까지는 걸어가야 했던 시절 말죽거리 복덕방에는 매일 수십 명이 북적거렸다.
67년 부동산투기억제 특별조치법으로 발길이 뜸하기도 했지만 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다시 법석을 떨었다. 60년부터 말죽거리에 살았던 김은숙(65·여)씨는 “60년대 초 말죽거리 땅값은 평당 300원 정도였다”며 “그러나 69년 제3한강교가 개통되고 이듬해 경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평당 5000~6000원으로 폭등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2003년 양재역 인근에 있던 텔슨전자 보유의 모델하우스 부지가 평당 4000만원에 팔린 점을 감안하면 현재 대로변 상업용지의 경우 평당 5000만원을 호가할 것이라는 게 일대 중개업소들의 추측이다. 40년 만에 땅값이 약 16만 배나 올랐다는 얘기다.
○ 복부인과 함께 열린 아파트 투기
복부인(福婦人)의 ‘활약’은 70년대의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이들은 75년께 영동·잠실 등에서 아파트가 대량으로 분양될 당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거액을 동원해 무더기로 청약함으로써 경쟁률을 높이는 게 이들의 전형적 투기 수법이었다. 아파트에 당첨되면 프리미엄이 생기게 마련이고, 이를 되팔아 차익을 챙겼다.
『아파트값 5차 파동』의 저자인 최명철씨는 “여의도 목화아파트가 분양될 때도 한 명이 5~10가구를 신청하기도 했다”며 “2억 원을 내고 100가구를 신청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78년 나온 서초동 우성아파트 33평형은 1711만원에 분양됐는데 한 달도 안돼 웃돈만 1000만원이 붙었다.
78년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은 투기가 만연된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고위공직자와 사회 저명인사 220여 명이 현대 측으로부터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뇌물성으로 특혜 분양받아 말썽을 빚었다. 이들이 당시로는 엄청난 규모인 4000만~5000만원의 프리미엄을 챙긴 사실이 드러나면서 일반인도 아파트 투기에 눈 뜨기 시작했다.
○ 아파트로 경기 부추겼던 80년대
81년 가을 정부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서울의 녹지를 풀어 택지로 개발하는 사업을 벌였다. 강남구 개포동 일대 자연녹지 241만 평이 그 땅이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사회가 뒤숭숭했던 80년 초 경제는 고꾸라져 도무지 경기가 살아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강남개발을 부양책으로 삼으려 했다. 정부가 앞장서 철새 복덕방들을 불러모아 분양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터진 ‘장영자 어음사기 사건’(82년)과 금융실명제 추진 움직임은 위축된 부동산 시장을 달구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금융시장이 쑥대밭이 되자 돈은 부동산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부는 금융 안정화를 위해 시중에 돈을 많이 풀었고 금리도 낮춰 부동산 경기는 활황으로 번졌다. 집값과 전셋값은 치솟기 시작했고, 급기야 주택 대란으로 이어졌다. 어쩔 수 없이 정부는 분당과 일산 등 수도권지역에 5개 신도시를 건설했다. 청약 열기도 대단해 89년 분당 시범단지 분양 땐 무려 10만 명의 청약자가 몰려들었다.
반면 강남 토지 시장은 오히려 80년대 안정됐다. 강남권 개발이 마무리되는 시점인 데다 5공 독재정권하에서 분위기가 위축됐기 때문이다. 대신 80년대 후반부터는 지방 땅이 시장을 선도했다. 30년간 토지중개를 해 온 ㈜JMK 진명기 사장의 설명.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3저 호황으로 시중 유동성이 엄청 풍부해졌다. 이 돈이 토지로 몰려들었는데 때마침 서해안 개발과 맞물려 이 일대 땅값을 크게 높였다.”
○ 아파트를 둘러싼 정경유착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 개발로 떼돈을 번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은 서울 강남구 수서동의 자연녹지에 관심을 가졌다. 88년 임원 명의로 매입한 자연녹지 3만5500여 평을 26개 직장주택조합에 팔았다. 그러나 건설부는 이들 조합 땅이 들어있던 수서·대치지구의 자연녹지 40만 평을 공영개발의 택지지구로 지정해 조합아파트 건설이 불가능해졌다.
정 회장은 3360명의 조합원 민원을 지렛대로 삼아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로비를 벌였다. 91년 1월 마침내 서울시로부터 특별 공급결정을 얻어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대통령의 특별감사 지시까지 내려지면서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됐다. 급기야 뇌물수수에 관여한 정 회장과 국회의원 9명이 구속됐다. 아파트 개발을 놓고 정·경·관의 유착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 강남 신드롬의 재연
2003년 집권한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만은 반드시 잡겠다는 다짐을 반복했다. 그러나 균형발전을 위해 추진하기 시작한 행정도시와 기업도시 조성은 오히려 충청과 호남, 서해안 등지에 거센 투기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004년 한해 동안 전국 땅값은 평균 3.86% 올랐지만 충남 연기는 23.3%, 충남은 11.7% 급등했다. 강남 신드롬도 재연됐다. 교육과 주거환경 등의 장점이 부각되면서 강남권과 비강남권의 가격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같은 서울 내에서도 강북 주민의 소외감은 날로 깊어가고 있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의 결론. “지난 40년간 한국의 부동산은 그냥 움직인 게 아니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하는 개발에 맞춰 국민의 돈이 몰려다녔다. 정부가 부동산 투기장을 열어준 것이나 진배없다.”
○ 강남 땅 업고 창업 대열 - 건설 경기 따라 영욕 교차
부동산으로 떼돈을 벌어 산업자본화한 대표적 인물은 그랜드백화점의 김만진 회장과 옛 ㈜삼호의 조봉구 회장이다. 김만진 회장은 부동산업계의 ‘밑바닥’을 기면서 번 돈으로 기업화에 성공한 대표적 인물이다. 경남 의령에서 상경해 얼음배달부터 시작한 그는 70년대 중반 부동산 분양시장에 진출해 돈을 벌고, 그 자금으로 수퍼마켓을 운영해 유통업에 눈을 떴다. 79년 4월엔 시대주택을 설립해 유통과 건설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강남구 대치동에 마련해둔 부지에 그랜드백화점을 지어 86년 문을 열었다. 김 회장은 이 백화점을 99년 롯데백화점에 넘기면서 외환위기를 슬기롭게 넘어갔다고 한다. 현재 그랜드산업개발은 일산과 수원 영통에 백화점 각 1곳과 전국에 그랜드마트 5곳을 운영한다. 김 회장은 지금도 회사 일을 정력적으로 보고 있다고 회사 관계자는 전한다.
조봉구 전 삼호 회장은 원래 소모방 공장을 운영하던 기업가였다. 그러나 60년대 초 서울 강남 방배동지역에 소모방공장을 건설하면서 부동산에 눈을 떠 종국에는 건설업체인 ㈜삼호로 불같이 일어섰다가 망했다. 그는 60년대 이미 강남 땅을 37만평이나 가지고 있었다. 강남 역삼동과 도곡동 쪽의 땅을 평당 200∼500원에 사들였다. 한때 삼성의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부동산에 관한 한 당신에게 졌다”고 말할 정도로 부동산 감각이 비상했다는 평이다. 이 땅이 70년대 초에는 평당 4000~5000원 정도로 폭등했다. 한때 그는 이 땅을 그대로 팔기도 했다.
그러나 건설이란 ‘부가가치’를 얹어 팔면 훨씬 돈이 된다고 생각해 74년 건설업으로 주력을 바꿨다. 방배동과 반포동 등 당시 보유하던 땅에 아파트와 빌라 등을 지어 국내 굴지의 주택건설 전문업체로 컸다. 70년대 후반 도급순위(시공능력 순위) 5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중동 건설시장에 무리하게 진출한 것이 발목을 잡아 84년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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