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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
마태 |
루가 |
요한계 |
사도 |
서간 |
구약 |
총계 |
권고 |
1 |
14 |
7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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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4 |
44 |
제1회칙 |
8 |
45 |
34 |
28 |
1 |
22 |
6 |
144 |
제2회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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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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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1 |
14 |
은둔소회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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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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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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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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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편지 |
3 |
22 |
8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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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20 |
77 |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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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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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9 |
26 |
수난성무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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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5 |
|
2 |
157 |
169 |
총계 |
12 |
86 |
58 |
48 |
1 |
55 |
207 |
467 |
3. 성서의 직접 인용과 암시적 인용의 비교
권고와 회칙을 소재로 하여 직접 인용과 암시적 인용을 비교하기로 하겠다. 프란치스코의 글 중에서 직접 인용은「권고」가 24번, 「제1회칙」은 98번이었고, 암시적 인용은 「권고」가 20번, 「제1회칙」은 46번이었다. 이러한 두 인용 방법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격이 없는 대화 속에서는 직접 인용보다는 암시적인 인용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반면에 “규정”과 같은 성격의 글을 작성할 때는 암시적 인용보다는 직접 인용의 방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권고에서는 위의 두 가지 요소가 비슷한 비율로 인용되었다. 프란치스코의 생애의 후반기 글들 즉 유언, 친서로 인정되는 3편의 글 등은 성서의 인용을 찾아보기 어렵고 이미 그의 글들 안에 “영이며 생명”인 말씀이 젖어 들어 있음을 느낄 뿐이다12). 암시적 인용이라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일상 대화 또는 훈시 등의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언급된 것을 기록한 것으로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보다 가까이서 대할 수 있게 된다.
「제1회칙」은 직접 인용의 비율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현상은 회칙이 지녀야 하는 문체나 양식의 특성이 주원인으로 볼 수 있겠다. 특히 「제1회칙」의 경우는 회칙 작성시 마지막 손질에서 복음구절을 삽입하는데 있어서 프란치스코의 의도는 실제 생활 안에서 복음적 가르침을 삽입시키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당시에 성서학자인 체사리오(Cesario) 형제를 동반하였기에 그의 도움을 받게된다. 이같은 복음 구절의 삽입은 하나의 장식에 불과 하거나 그 복음적 권위를 빌리는데 있지 않고, 회칙의 핵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형제회의 으뜸 되는 성소의 동기가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체사리오는 프란치스코의 요청에 따라 회칙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 깃들어 있는, 즉 잘 드러나지 않는 성서의 정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의 글들 안에 인용된 직접 인용이든 암시적 인용이든지 간에 하나도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이유는 그 글들의 저자가 성인의 곁에서 그의 의향을 찾아서 기록하려고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성서 인용에 있어서 방법상의 특징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서 대하게 되는 직. 간접으로 인용된 성서 구절을 연구해 보면 그 인용방법 즉 편집 과정에서 대변되는 일정한 특징적 요소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프란치스코의 성서 이해라는 논제 안에서 이에 대한 고찰은 중요한 것이다. 이로써 프란치스코나 또는 협조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성서의 이해가 어떤 양태로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 자리하게 되었는가?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가 특별히 선호한 성서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아울러 이같은 연구의 결과가 프란치스코의 글의 진정성에 대한 간접적인 판단의 자료로 제기 될 수 있을 것이다.
1) 재편집
프란치스코가 하나 이상의 복음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 자료를 임의대로 배열한 독특한 관점과 특별한 강조점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자 한다. 따라서 프란치스코의 성서에 대한 이해의 한 단면을 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마태 10,15b>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내가 선하다고 해서 (ego bonus sum?) 당신의 눈길이 사나워집니까? (an oculus tuus nequam est quia-) |
<권고 8> (질투의 죄를 피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Quicm que ergo invidet fratri-)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질투하면 (suo bone......) 모든 선을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질투하는...... (......quia ipsi Altisima invidet) |
「권고8」의 내용은 「마태 20,15b」를 근거로 해서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포도원 주인을 “지극히 높으신 분”인 하느님으로 이해하였고, “내가 선하다고 해서” 즉 품삯을 늦게 온 일꾼에게도 똑같이 준다고 해서 “당신의 눈길이 사나워”(an oculus tuus nequam) 집니까? 라는 말씀을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여 권고하고 있다. 형제들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뜻대로 베풀어주시는 선(품삯에의 비유)으로서, 그러한 선을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여 질투한다면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질투하는(invidet)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오의 nequam(사납게)을 invidet(질투)로 단어를 대치시키는데 프란치스코가 “질투”라는 단어를 사용 할 때는 그의 글 안에서, 특히 권고와 법적인 규정에서만 3번 발견되며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사용되고 있다.13) 프란치스코의 영성에 있어서 “형제애”는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어왔다. 프란치스코는 “형제애”의 실현을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의 걸림돌 중에 하나를 “질투”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는 틀 안에서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자연스럽게 편집하여 전달하고 있다.
이와같이 성서상의 비유를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독특한 관점 안에서 깊고도 풍부하게 내면화시키고 있음을 발견한다.
<마태 5,3>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pauperes spiritu,) |
<권고 14> (마음의 가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pauper est spiritu......) 뺨을 치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마태 5,39> (보복하지 말라) 누가 당신의 오른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뺨마저 돌려 대시오 |
프란치스코는 「마태 5,3.39」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점에 맞추어 「권고14」을 편집하고 있다. 「마태 5,3」의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pauperes spiritu)이란 단어는 오직 마태오 복음 안에서만 사용된다. 또한 프란치스코의 글들에서도 위와 같이 영과 가난이 연결된 의미로서는 「권고14」에서만 나타난다. 하지만 그의 글들 안에서 가난은 겸손과 거의 동일시되어 나타나고 있으며14), 한편으로는 "뺨을 치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랑“과도 분리시켜 생각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권고9」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글과 함께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당하는 해(害)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죄를 보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행동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보여 줄 것입니다.“15) 「마태 5,38」에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명제를 예수께서 폐기한다는 것을 전술(前述)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 5,39-42」에 뒤이어서 ”원수도 사랑하라“라는 내용이 기술된다. 이러한 마태복음의 구조와 맥락을 프란치스코는 「권고 14」에서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1베드로 2,25>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복자이며 보호자이신 분에게로 (nunc ad pastorem et episcopum animarum vestrarum) 돌아왔습니다. (......,sed conversi estis) |
<제1회칙 22,32>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에게로 (ad pastorem et episcopum animarum nostrarum) 달려갑시다. (......recuramus tamquam) |
프란치스코는 성서를 인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자신의 독특한 표현방식으로 자유롭게 대치시킨다. “돌아 왔습니다(conversi)"라는 단어를 ”달려갑시다(recuramus)“로 바꾸어서 적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유언 22」에서도 발견되듯이 프란치스코에게는 익숙한 단어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표현은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그 적극적인 심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윗글의 진정성이 더욱 선명해진다.
2) 병합 현상
병합현상은 둘 이상의 복음에서 마치 합병시키는 것처럼 두 가지 표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마태 15,19) 사실 마음에서 악한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증언, 모독이 나옵니다. (De corde enim exeunt cogitationes malae, homicidia, adultertia, fornicationes, furta, falsa testimonia, blasphemiae) |
(마르 7,21-22)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이 나오는......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악한시선, 모독, 교만, 어리석음 같은 것입니다. (...de corde hominum malae cogitationes procedunt, adulteria, forfnicationes, homicidia, furta, avaritiae, nequitiae, dolus, impudicitiae, oculus malus, blasphemia, superbia, stultitia) |
(제1회칙 22,7) 주님이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마음에서 솟아 나오는 것은 음행, 간음, 살인, 도둑질, 탐욕, 부정, 사기, 음란, 불순한 눈, 거짓증언, 모독, 어리석음과 같은 악한 생각들입니다. (De corde procedunt et exeunt cogitationes malae, adulteria, forfnicationes, homicidia, furta, avaritia, nequitia, dolus, impudicitia, oculus malus, falsa testimonia, blasphemia, stultitia) |
마르 7,21-22에는 13가지 악덕을 열거하고 있고, 마태오는 이를 7가지로 줄여서 기록하면서 “거짓증언(falsa testimonia)”을 첨가시키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글에서는 두 복음서에서 고유하게 사용된 단어(이탤릭체로 표시된)를 선택하여 병합시켜서 인용하고 있다. 즉 편집하려는 구체적 의도가 엿보인다. 암기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쓰여졌다고 보기 어렵다. 즉 이토록 능숙한 병합의 형태는 프란치스코가 직접 썼거나. 구두로써 전한 것을 그대로 썼다고 보기 힘들며 권고를 편집하는 가운데 다른 이의 손길이 닿았음을 알 수 있다.
<제1회칙 22,12-13> 12. 씨가 길바닥에 떨어져서 발에 밟힌 것은 (Quod autem secus viam cecidit et conculcatum)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13. 그래서 악마가 날쌔게 달려 들어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믿지도 못하고 구원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
<마태오 13,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omnis qui...)
<마르코 4,15> -씨가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Hi autem sunt qui circa viam)
<루가 8,12> -씨가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Qui autem secus viam) |
공관 복음의 접근 방법은, 각 맥락이 프란치스코의 맥락과 다르다는 점에서 상당한 차이점을 지닌다. 위에서 보듯이 프란치스코의 강조점은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직접 초점이 집중되지만 다음의 뉘앙스를 지닌다. 프란치스코는 듣는 관점(audiunt)을 강조하는 점에서 모든 공관 복음 기사를 따르지만, 이해의 관점(intelligunt)을 삽입함으로써 마태오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말씀을 곧 바로 잃어버리는 관점을 봄에 있어서는 마르코를 따르고 있다. 마태오는 여기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루가는 결국 잃어버림의 관점을 말하고 있지만 즉각적으로 잃어버리는 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 끝으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루가의 문장인 “믿어 구원받지 못하게”(ne credents salvi fiant)를 첨가한다. 이로써 악마의 의도를 보여주고, 이러한 가르침은 개인적 가치를 넘어 복음 선포 직무의 가치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고 하겠다.16)
3) 공관 복음에 있어서의 루가 복음의 선호성
프란치스코가 뽀르찌웅꿀라에서 성 마티아 축일 미사 중에 들은 복음서의 내용에 대해 현재까지의 연구 상태로서는 ‘열두 사도의 파견’17)이 아니고, 두 복음 사가가 즉 마르코(4월,25일)와 루가(10월18일)의 축일에 읽었던 ‘72제자들의 파견’18)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루가 10,1-9」이라는 의견은 첼라노 전기19)에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인용에 있어서 공관 복음 중에서 「루가 복음 10,1-9」이 우선 순위로 인용된 것을 알 수 있다.20)
1회칙 14, 1-3의 본문 안에 인용된 공관 복음의 용어들을 나란히 배열해 보면 루가 복음을 선호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1회칙 14,1-4>
형제들은 세상을 두루 다닐 때, 여행을 위해(루가 10,4)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돈 주머니도(루가 9,3;10,4),
식량 자루도(마태 10,10; 마르코 6,8; 루가 9,3;10,4)
빵도(마르 6,8; 루가 9,3)
돈도(마태 10,9: 루가 9,3)
지팡이도(마태 10,10: 루가 9,3) 가지고 다니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 가거든(루가 9,4;10,5)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루가 10,5, 불가타역으로 마태 10,12에도 있으나 그리이스 원본에는 없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집에 머물러”(루가 10,7)
1회칙에서 중복되는 경우에는 대부분 루가 복음을 취하고 있다. 마태오에게만 배타적으로 속한 용어는 하나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프란치스코가 그의 글들 안에서 실천적인 요소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주로 루가 복음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5. 프란치스코가 선호한 성서에 대한 주제별 분류
성 프란치스코에 의해 특별히 선호된 성서들은 성체 전례와 성무일도 특히 부활 시기 때 사용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주제의 선택은 연구자들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주제 선정은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서 선호한 성서를 중심으로 하였고 또한 프란치스코의 영성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견주어 볼 때 중요한 가치를 지닌 연구라고 생각된다.
1)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름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름”21)의 중심적 핵심은, “이를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라는 「1베드로 2,21」에 있다. 그밖에도 성인의 글 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름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두 개의 글이 있다.
먼저 「제1회칙 22」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그 발자취를 따라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넘겨준 사람을 벗이라 부르시고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억울하게도’ 번민과 괴로움......” 위의 주제에 있어서 인용된 성서는 베드로 서간적 내용이 분명하고 사도에게서 취한 “억울하게”란 표현이 그 진위성을 명확히 해 준다.
다음에는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1-13」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을 생기게 한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러한 모범을 남기시어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프란치스코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 자신을 바친 그리스도에 대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한다.
그밖에 함축적 의미를 지닌 예로서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22)에서 수난에 관한 것은 부족하지만 역시 위와 같은 특징적 요소가 발견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Ep Ord 52)
“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또 그분의 발자취와 가난을 따르는데 있어서......”(Ep Leo 3)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름”이라는 주제가 베드로 서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프란치스코의 독창적인 성서에 대한 이해력은 「레오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가난의 개념을 첨가시킨다. 베드로가 그의 서간에서 가난을 다루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적들로부터의 모든 불의와 박해를 참으면서, 인내 안에서 죽임을 당하는 구세주의 완전한 순종을 다루고 있다.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 십자가 안에서 그 생명을 바치는 목자와 지도자의 모범이 성인에게 강하게 인상 지워진 것으로 생각된다.23)
이러한 영향은 「권고 3」의 완전한 순종을 「루가 14,33;9,24;9,26」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름과 완전한 순종을 연결시키고 있다.
루가 14,33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9,24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sequartur me)"
9,62 "예수를 따르려면 (sequar te)"
위의 성서 구절 모두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 즉 제자들과 예수의 관계에서 sequatur를 사용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이를 장상에 대한 순종의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는 「제1회칙」과 「제2회칙 1,1」의 복음적 권고에서 순종이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프란치스코는 예수를 따르는 것을 형제회 안에서 장상에 대한 순종과 함께 대치시킴으로써 완전한 순종을 말하고자 한다.24)
2) 사제적 기도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가 복음에 의해 직접 영향을 받고 있으며 성서의 말씀과 프란치스코 사이에 어떠한 거리감도 없이 자연스럽게 프란치스코의 사상과 삶에 배어 있음을 알게 됐다. 어떤 특별한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사제적 기도”25)의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대화한다. “거룩하신 아버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그의 글 안에서 32회 부른다. 이러한 인용은 시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26)
프란치스코는 네 차례에 걸쳐 「요한 17」에 관한 자신의 개인적 소견, 또는 묵상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요한 17」을 집단적으로 인용하는 프란치스코의 글은「인준 받지 않은 회칙」과 「신자들에게 보내신 둘째 편지」이다. 가장 광범위한 글은「인준 받지 않은 회칙 22,41-55」안에 들어 있다.27)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요한17」의 사제적 기도가 주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요한 17」은 프란치스코가 선호한 성서 구절이었음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그것들을 마음속 묵상처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에세르(k. Esser) 신부는 이를 분명히 하고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의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거룩한 아버지”28)는 특별한 양식으로 프란치스코에게 영감을 준 요한계 표현이다. 이런 용어들은 그의 글들 안에서, 특히 수난 성무일도에서 다양한 양식으로 발견된다. 이런 글들의 목록은 거룩한 성부 하느님께 대한 프란치스코의 애정을 증명하는데 중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예로서 “수난 성무일도”를 살펴보자.
(수난 성무일도) |
시편 1,5 (끝기도):“거룩하신 나의 아버지”(요한 17,11) 시편 1,5 (끝기도):“거룩하신 나의 아버지”(요한 17,11) 시편 1,5 (삼시경):“거룩하신 나의 아버지”(요한 17,11) 시편 1,5 (육시경):“거룩하신 나의 아버지”(요한 17,11) 시편 1,5 (구시경):“거룩하신 나의 아버지”(요한 17,11) |
프란치스코는 때때로 최상급 “지극히 거룩한”(santisimo)을 성부께 첨가한다(수난 성무일도의 시편에서 8번사용). “거룩한 혹은 지극히 거룩한 아버지”란 표현은 프란치스코가 시편에서 기도할 때 그리스도를 “성부의 아들로서” 분명하게 명시한다. 또한 이러한 요한복음의 인용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나의”란 단어의 첨가를 볼 수가 있다. 이같은 성서 인용구가 시편기도 때마다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시편의 이런 그리스도 중심적 의미는 요한 복음에서 예수가 기도하는 모습과 일치한다. 다른 저서에서도 역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거룩성에 인상 지워졌음을 보여 준다. 그 예로 「인준 받지 않은 회칙 23,1」에서 볼 수 있다. “전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시며, 지극히 높으시고 지존하신 하느님...”29)
그밖에도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과 관련한 모든 것을 거룩한,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부르기를 원했고, 예를 들면 하느님의 호칭을, 하느님의 말씀을, 특별히 성부의 아들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 등. 프란치스코는 예수의 사제적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성의 신비가 자신의 영성에 우선적이고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30)
3) 영, 영과 생명, 영과 육
① 영(spiritus)
「요한 4,23」의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예배하는 이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여야 합니다”는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서 주님의 영 혹은 육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106번 사용한다.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한다.”31)는 요한의 고유한 표현이다. 영에 관한 글의 인용은 요한 복음을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요한 복음은 이미 제시되었듯이 프란치스코에 의해 가장 많이 읽혀지고 묵상되었다. 더구나 많은 부분에서 그의 영성을 알려준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 4,23」은 수차례 인용된다. 프란치스코는 이 텍스트 안에서 수도 생활과 영의 내적 성성을 실천하고 외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깨끗한 마음과 단순함으로 하느님을 경배하고 기도드리도록 권고하신다.」32)
② 영과 생명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요, 육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말들은 영이며 생명입니다”(요한 6,63)라는 요한의 이 구절이 일곱 차례 언급되고, ‘영’과 ‘생명’이란 용어가 다섯 번, “생명을 주는 영이” 한 차례 언급된다.33) 이 인용구들은 프란치스코가 「신자들에게 보내신 둘째 편지 3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었던 믿음을 드러내준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종이기에 모든 사람들을 섬겨야 하며 내 주님의 향기로운 말씀들을 전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이며 생명인’ 성령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기로 하였습니다.”34)
「신자들에게 보내신 둘째 편지 3」에 “......일일이 방문할 수가 없어 이 편지와 글로 아버지의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이며 생명인” 성령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용문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사랑의 가장 친근한 동기를 드러내 준다. 실제로 성부의 말씀 자신께서 (요한의 고유한 용어)우리에게 성부와 성령의 단어들을 주며, 그것은 영이요 생명 즉 영의 활동으로 신적 생명을 교신하며 영감을 주는 것이다. 결국 프란치스코는 말씀 안에서 신적 현존과 성체 안에서의 성부의 아들로서 이 마지막 현존은 요한의 특별한 영향 아래 성인에게 동화된 삼위일체적 현존이다.35)
③ 영과 육
「로마 8,6-14;갈라 5,16」을 중심으로 살펴보자36). 프란치스코는 육과 영의 상반된 갈망에 대한 바오로의 도그마를 잘 파악하였다. 육은 자기 자신 즉 에고이즘에서 유래하는 모든 것이고 우리에게서 자유를 제거한다. 영은 하느님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며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의 자유로 인도한다.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서 구체적 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육과 영의 각각 다른 경향들 : RegNB 17,11-14; Adm 1,6
육적인 형제와 영적인 형제 : RegNB 10,4; RegB 6,8
육적으로 살며 영적으로 살지 않음 : RegNB 5,4; 22.5; EpFid Ⅱ,65
「2고린 3,6」와 「권고 7」37)을 비교해서 살펴보자.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프란치스코는 문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과 하느님의 문자의 정신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을 감탄스럽게 설명한다.
4) 제자직의 기초 ;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38)
「제1회칙 22,10-17」에 인용된 공관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11)”에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이전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가 어떤 종류의 흙인지 신중히 살피라는 권고, 곧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상태를 깊이 주의하라는 권고를 한다. 즉 11-17절 사이에 “마음”이 자주 사용되고 있음과 프란치스코가 “마음”을 “땅”으로 대치시키면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위대한 존경심과 공경심을 볼수가 있다.39)
“길바닥에 떨어진 말씀(12-13)”에 대하여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데 소홀한 태도를 지적하며 이는 말씀의 내면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마음이라는 탁월한 자리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6」의 “여러분의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따르십시오.”라는 글에도 나타나고 있다.
“돌밭에 떨어진 말씀(14-15)”은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피상적 태도를 나타내며, 이러한 태도가 형제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이유가 됨을 뜻한다. 또 한편으로는 마태오와 마르코로부터 돌(pertrosa)개념을 취하지만 땅(terram)을 말하는 부분에서 그것을 돌(petrosam)로 변경시킨다. 그리고 뿌려진(seminatum est)을 떨어진(cecidit)으로 대치한 것은 당시 형제 공동체내의 회칙 작성과정에서 일어났던 분열된 모습의 이유가 됨을 인식해야 한다.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말씀(16)”은 내면화에 대한 관심의 반복으로서 말씀을 질식시키는 사물들로서 마태오에서 취하는 ‘근심(sollicitudo)', 마르코에서 취하는 ’이 세상 사물들에 대한 염려(aerumnal ostius saeculi)', 마태오에서 취하는 ‘재물의 유혹(fallacia divitiorum)', '무절제한 욕망(cira reliqua Concupiscentiae)'은 마르코에서 취하며 마태오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이상의 내용은 주로 마태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서 인용하여서 기술하고 있다.
“좋은 땅 (17)” 말씀의 내면화 과정을 또 한번 볼 수 있다. 마음(좋은땅)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이에 연관되어서 프란치스코는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다섯 단계를 제시한다. 즉 프란치스코와 첫 형제들의 일상생활에서 보여 주었던 내적, 외적 침묵의 중요성으로서의 말씀을 들음(audients), 말씀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또한 깊은 묵상과 기도의 정신 안에서 이해함(intelligunt), 말씀을 간직함(retinent), 말씀의 열매를 매일의 삶에서 맺어감(Fructum afferunt), 말씀의 지속 혹은 보존(in patientia). 프란치스코는 공관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인용하면서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내면화시킬 것을 강조한다.
맺음 말
오늘날 프란치스코와 성서에 대한 연구는 프란치스칸 영성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다양한 주제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입증되듯이 프란치스코는 전 생애를 걸쳐 철저하게 복음의 정신을 따라 일관되게 걸어왔음을 알 수 있었고 중세의 문란한 교회 질서에 대한 쇄신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한 그의 개혁 운동은 성서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이었다.
위의 졸고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서 드러난 성서 인용에 대한 연구는 방법학적으로는 아직도 미해결 문제들이 산재되어 있으나 다양한 접근 방법을 시도함으로써 문제 해결에 보다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성 프란치스코와 성서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살피기 위해서, 빈도 수를 살펴보았다. 이로써 프란치스코가 선호한 복음과 제 특징적 요소 및 인용된 프란치스코의 글과 성서 본문과의 연관성을 살핌으로써 프란치스코의 성서에 대한 이해 및 친저성 구별에의 자료로서 제시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끝으로 이제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프란치스코가 선호한 성서와 그의 글들 안에서 중심이 되는 주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들을 검토해 봄으로써 주제별로 특별한 선호성을 지닌 성서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 나타나는 그의 가르침과 영성을 복음과의 연관성 속에서 바라볼 때 보다 깊고 폭 넓게 프란치스코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연구를 끝맺으면서 프란치스코 전기 작가인 첼라노가 전하는 프란치스코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는 결코 복음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이 들은 바를 경탄할 만큼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부지런히 이행하고자 신경을 집중하였다”.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고 말만 미끈하게 하여 설교자로서보다는 달변가로 칭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프란치스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성서를 주제넘지 않게 겸허히 연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서 하느님에 관한 지식에 쉽게 옮겨간다고 그는 자주 말하였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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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어표
Adm 권고
EpCler 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EpFid I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Ⅰ
EpFid Ⅱ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Ⅱ
EpLeo 레오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
EpOrd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RegB 작은 형제들의 회칙(제1회칙)
RegNB 작은 형제들의 회칙(제2회칙)
SalVirt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
Test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유언
Vp.Laet 참되고 완전한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