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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具滋暻·78) 명예회장(당시 LG그룹 회장)은 그룹 총수로서 마지막
행사를 가졌다. 그는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나는
여러분을 믿고 나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는 말과 함께, LG그룹의
상징인 ‘LG깃발’을 장남인 구본무(具本茂) 회장에게 넘겼다.
1970년 연간 매출 260억원에 불과했던 가족 회사를 연 매출 38조원의
거대한 그룹으로 성장시킨 그는 “이제 자연인(自然人)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 후 8년…. 그는 ‘경영에 간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충남 천안 인근의 시골 생활에 푹 빠져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연암축산원예대학 근처에 건설현장사무소 같은 투박한 모양새의
농장을 짓고 버섯을 재배하고 메주를 띄우며 평범한 촌로(村老)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의 일상은 여유롭기 그지 없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1시간 가량
연암대학과 농장 주변을 산책한 뒤, 조간 신문을 훑어보고 아침 식사를
한다. 다음엔 골프장용 카트를 타고 자신의 연구소인 버섯농장으로 출발,
하루 내내 그곳에서 머문다. 오후에는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기도
하지만, 손님들은 주로 연암대학 교수들이며 대화의 주제도 버섯이다.
그는 대학과 농장 주변을 다닐 때 항상 골프장용 카트를 타고 다닌다.
카트를 타고 과수원, 양계장, 돼지 축사 등 농장 곳곳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가끔씩 외부 손님이 찾아오거나 어린이날 손자들이
몰려올 때면 카트에 태워서 농장을 구경시켜 주기도 한다.
구 명예회장이 버섯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은퇴 무렵인 95년. 그는
국내에 버섯공장은 많이 있어도 버섯 종균(種菌)을 배양하는 업체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버섯연구를 시작했다. 버섯에 대해 이렇다 할
지식도 없이 달려들었으나, 8년간 국내외 주요 서적과 각종 자료를
샅샅이 뒤진 끝에 지금은 연암대학 교수들과 함께 새로운 버섯을
개발하고 버섯장조림도 만들어낼 정도로 전문가가 됐다.
경남 진양군 지수면, 지리산 근처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구 명예회장은
어려서부터 농작물 재배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에도 그는 직접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초등학교 때 한 은사(恩師)가 학교 마당에서 온갖
화초와 나무를 가꾸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구
회장은 난(蘭) 키우기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농장에서 두 번씩이나 귀한
난을 도난 당한 뒤에는 난은 아예 포기했다고 한다.
구 명예회장이 서울 성북동 자택에 머무는 날은 일주일에 두 번,
일요일과 월요일이다. 그는 월요일 아침에는 넥타이에 정장을 하고
여의도 트윈타워를 들러 그가 맡고 있는 유일한 일을 한다. 그는 현재
LG연암문화재단·LG연암학원·LG복지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이
일만큼은 직접 보고를 받고 사업방향을 지시하기도 한다. LG문화재단
오종희 부사장은 “뛰어난 농민 후계자를 양성, 더 잘사는 농촌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연암대학을 설립했는데, 요즘 젊은이들이 농업
분야 진출을 꺼려해 명예회장의 고민이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경영에 대해 아들인 구본무 회장에게 훈수를 하는 일은 전혀
없다. 그의 사무실이 트윈타워 동관 32층이고 아들 구본무 회장의
사무실이 바로 아래인 30층인데도 구본무 회장이 회사 일을 들고
올라와서 보고를 하는 일은 없다. 구본무 회장이 해외 출장을 떠나거나
돌아왔을 때 문안 인사차 가끔씩 들르기는 하지만, 두 부자(父子)는
사무실보다는 제사 등 집안 일이 있을 때 주로 만나는 편이다.
비서실의 한 직원은 “두 회장님의 만남은 전형적인 경상도 부자(父子)의
만남처럼 평범하다”면서 “두 분 모두 그렇게 말씀이 많지도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며, 구본무 회장님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깍듯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가 LG의 경영에 철저히 거리를 두는 것은, 이미 은퇴한 이상
구본무 회장 등 후진들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주자는 의미다. 그가
시골농장에 머무는 것도, 공식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그런
결심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가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는 것 중 하나는, 문화재단 외에 능성(綾城)
구씨(具氏) 종친회인 대종회(大宗會) 일이다. 그는 9년째 대종회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시제(時祭:철마다 지내는 종묘의 제사) 때에는
친척들과 함께 경상·전라·충청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조상의 묘소를
며칠씩 찾아 다니며 제사를 지낸다.
재계 원로 경영인들의 모임인 단오회(단옷날 결성됐다는 뜻)도 빠지지
않는 모임이다. 단오회는 원래 구 명예회장의 선친인 구인회(具仁會)
창업회장이 평소 가까이 지내온 두산·경방 그룹 회장들과 친목을 나누던
자리였다. 그는 선친의 모임을 이어 받아 40년째 모임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는 단오회 멤버들과는 한 달에 한 번씩 골프를 치는데, 경방의
김각중 회장, 삼양사의 김상홍 명예회장 등이 골프 친구들이다.
구 명예회장은 보통 화요일·목요일 계열사인 곤지암 골프장을 찾는다.
주말엔 계열사 임원들이 사용하도록 일부러 평일 골프를 즐긴다고 한다.
구 회장의 골프 실력은 핸디캡 95 안팎. 한창 좋을 때는 82정도 쳤으나,
나이가 들면서 실력이 조금 줄었다.
그는 이 같은 은퇴생활을 지난 87년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당시 21세기를
대비한 LG그룹의 경영혁신을 구상하면서 자신의 퇴진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후계자인 구본무 회장이 95년 1월, 그룹의 이름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꾸는 기업 이미지 통합(CI)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을 보고, 그 해 2월 자신의 퇴진으로 경영혁신의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그는 또 허준구(許準九) LG전선 회장, 구태회(具泰會) 고문,
구평회(具平會) LG상사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경영인들의 동반퇴진을
유도, LG의 3세 경영체제를 확립했다. 그의 퇴진은 사망 직전까지
후계문제를 명확히 확정 짓지 못했던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이나
후계자는 확정했으나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경영일선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과 다른 스타일로 당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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