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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는 산천에서 나오고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
이번 답사보고서는 평택시청을 기점으로 포승면 마린센타 까지 약 35km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평택호관광단지를 사이에 두고 두 구간으로 나누어지는데 시청을 기점으로 하는 구간은 천안지역과 경계를 드나들며 주로 안성천 하류를 끼고 도는 길인 반면 평택호관광단지에서 포승면 마린센타 까지는 아산만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특징이 있다.
7월30일 날씨는 쾌청하지만 아침부터 푹푹 찌는 더위를 어찌 참아내야 할지 걱정스럽다. 8시30분, 시청을 출발한 일행은 이미 표시해둔 섶길 알림 표시를 따라 바로 시내를 벗어나 유천동 벌판을 가로질러 망건다리위에 섰다. 역사적으로는 청일전쟁당시 성환지역에 주둔한 청국군의 망루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망건다리는 청일전쟁 당시는 없었던 다리다. 이후 일제가 이 땅을 통째로 유린하고 경부간 도로를 설치하면서 목재에 타르를 입힌 통나무로 다리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다리를 경유하는 도로는 일제의 도로망과 통신망을 연결하는 수탈의 상징인 철도와 함께 신작로라는 이름으로 민족의 원한과 애환이 녹아 쌓인 도로다. 신작로엔 늘 백양나무가 있었다. 큰키를 자랑하는 백양나무 모습이 아련하다. 이 다리는 80년대까지 흔적이 남아 있다가 이후 하상 정리 때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80년 초까지만 해도 냇갈에 들어가 손으로 붕어를 잡아내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또 이병주 소설 ‘산하’에 보면 주인공 ‘이종문’이 아무런 기술도 없이 현대식 형교를 건설하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나온다. ‘이종문’은 아첨꾼으로 적산 하나를 요령껏 차지하고선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이승만에게 쌀가마를 대주며 신임을 얻는다. 그 결과로 동란 후 건설업에 뛰어드는데 이때 평택에서 성환으로 넘어가는 다리공사를 미군으로부터 얻어냈다. 당시 혼란했던 상황에서 한 인간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의 비리를 폭로하고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을 고발한 소설의 작은 무대가 된 곳이다.
안성천은 직강화 이전에 심한 S자형의 사행천이었을 것이다. 사행천은 물의 흐름을 따라 습지와 모래톱이 번갈아 나와 스스로 정화능력을 갖춘다. 천안땅이 평택쪽에 있고 평택땅이 천안쪽에 있는 시계의 흔적을 보면 전에 흐르던 강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직강화는 유속을 빠르게 해서 하천의 유실을 가져오며 여러 생태계를 혼란시켜 잃는 것이 많은 일이다. MB의 4대강 사업을 비롯한 전국 하천의 홍수방지 대책은 나라를 온통 환경망국으로 몰아가는 행위일 뿐이다.
망건다리를 지나면 안성천과 합류하는 성환천을 따라 성환읍 와룡2리마을을 지나게 된다. 평택 섶길이지만 여기를 거치는 것은 따로 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봉긋이 솟은 마을 뒷산에서 평택시내를 조망할 수가 있어서 의미가 있다. 섶길의 의미가 내가 사는 땅을 걷고, 바라보고, 음미하는데 있다고 보면 사방에서 바라볼 수 있는 지점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평택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를 눈치 챌 수 있다면 그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하나는 행정구역이 다른 서로 이웃한 마을들이 어떻게 교류하고 소통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올망졸망 이마를 맛댄 농가들이 서로 이웃하며 때로는 피가 섞여 큰고모댁이 있기도 하고 작은처남이 살기도하여, 길과 길들은 연결되기에 이르는데 이는 행정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우리네 삶을 다른 연결고리로 들여다 볼 수 있다.
현재의 망건다리(정식명칭은 안성천2교)
다시 평택으로 들어와 노와리에 이른다. 노와리에는 신대추리가 보기 좋은 전원주택단지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대추리는 공동체의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공동체가 아직도 유지되는 농촌이긴 하지만 두레가 살아있는 옛 모습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대추리가 두레의 모습은 아니지만 자신들만이 가지는 실향의 아픔을 기억하고자 하는 공동체로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또 마을이 여기 들어선 곡절들은 평택의 어두운 한 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만하다.
노와리를 지나 대사리로 접어들면 거기에도 아픈 사연의 문화마을이 있다. 그들 또 한 대추리 이주민으로 한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바로 건너가 송화리 솔숲인데 이 길은 말 그대로 시원한 솔숲길이다. 그러나 이 솔숲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군의 작전지역으로 훈련장이었고 사격장이었다. 반환된 우리 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가 고민되는 땅이다.
여기엔 일본군들이 만든 지하벙커가 여러 개 남아있다. 일본군이 나가고 난 뒤 미군이 주둔하며 땅의 주인인 한국인들은 금지의 땅으로 남았던 송화리 미군 사격장, 숲이 깊고 어두워 아직 훼손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관리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와룡리마을뒤 솔숲, 비보풍수로 마을뒤편의 허함을 보충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대추리 마을 입구
농성은 무엇으로 쓰인 것인지 정확치는 않다고 한다. 추측컨대 말을 키우던 말목장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평택이 말목장이 많이 있고 중국에서 뱃길이 가장 빠른 곳이니 중국에서 수입한 말들을 임시로 먹이던 곳이라는 추측일 뿐이다. 임명직 도지사 마지막이 임사빈씨 였던걸로 기억 하는데 이양반이 평택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라고 해서 이 농성을 평택임씨의 세출지로 확인하고 대대적으로 복구 복원 사업을 했던 기억이 있다.
농성에서 아기자기한 마을 고샅길을 걸어 대로를 잠깐 걷다가 동창리로 들어서면 시골마을의 한적함이 기다리고 있다. 동창리에서 옛 대추리 들어가는 고갯길로 올라서면 눈앞에 푸른 강이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가슴을 시원하게 만든다. 고갯길은 눈물의 길이다. 어머님이 보따리를 넘겨주며 잘 다녀오라고 신신 당부하던 길이 아니던가.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며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고개 아니던가. 고개는 만나고 헤어지며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곳이다. 여러 곳의 고개가 섶길의 중간중간에 배치되어 인문학적 섶길로 안내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행운이다. 이내 눈을 들면 광활한 오성창내 들이 손짓하며 부른다. 동서로 뻗은 38번 도로와 40번 고속도로 그리고 새로 건설중인 미군기지로 들어가는 철길이 수평선으로 나란하고 들판에 점점히 찍힌 마을 들이 그야말로 그림처럼 다가온다. 바로 강가의 자전거 도로를 올라서면 평택호의 남쪽 부분을 끼고 노양리 까지 연결된다.
섶길은 여기서 강을 건너지 못한다. 강폭이 넓어서 띠배를 띄우지도 못할 것인데,,, 허나 길은 늘 이어지는 법 이어지지 못할 길은 없다고 한다. 언젠가 배다리(부교)라도 띄울 수 있을 런지 알 수 없다.
강을 건너면 덕목리 고등산(미사일기지)으로 올라붙는다. 이 길은 등산로로 되어있다. 평택에서 이만큼 높은 산은 오랜만에 만나게 된다. 한때 발목지뢰를 매설한 지역이 폭우로 붕괴돼 발목지뢰가 유실돼 수확기 농민들의 가슴을 조이게 했다. 다른 지역의 둘레길이 산과 마을을 잇는 것이라면 평택은 들과 마을을 잇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끔 낮으막한 산들이 햇볓을 가려주는 미덕이 있다. 마치 낮으막하게 “여보세요” 하고 부르는 듯 그 그늘에서 몇 시간을 쉰들 무슨 상관이랴.
맞은편이 노양리다. 건설중인 철교가 보인다.
산을 넘으면 원신왕 마을이다. 마을의 추녀들이 닿을 듯 말 듯 이어지는 원신왕에서 부터 송말, 마두, 와촌들이 아직은 공장의 그림자가 없어 보기에 위안이 된다. 마을 앞산이 마안산이다. 마안산의 형국이 말의 안장에 해당한다고 한다. 신왕리 마두마을은 말 그대로 말머리에 해당한다. 그래선지 산길은 아기자기하다. 높지도 낮지도 않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다. 말의 안장처럼 편안하다. 평택호를 끼고 있어 바람이 더욱 시원하다. 산이라고 말하기도 열적은 해발 약100m 높이 산이지만 산이 가진 미덕을 가감 없이 내어주는 산이다. 중간쯤 오르다가 등산로를 버리고 평택호쪽으로 내려서면 아! 가슴이 탁트이는 넓은 호수가 출렁인다. 호수 주변을 풀숲을 헤치며 나가면 대안리 구진개마을이다. 구진개마을은 이름그대로 갯벌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둑을 막아 논으로 간척해서 얻어낸 땅일 것이다. 전라도 개땅쇠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개는 개펄을 말한다. 그러니까 개펄을 논으로 만든 땅의 사람이란 말이다. 구진개도 개땅이고 여기사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개땅쇠가 되는 셈이다. 평택의 산천은 한량들의 눈요기거리는 없다. 지역마다 그 흔한 정자하나 없는 것을 보면 양반의 동네는 아닌 듯 싶다. 아니 산천이 허락하지 않을 것일터다. 반면에 개땅들이 발달해 곳간은 풍족했을 것으로 추측 된다. 따라서 인심이 후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풍류는 산천에서 나오고 인심은 곳간에서 나오는 것이다.
구진개 앞들을 가로질러 가면 기산리 벽화 마을이다. 벽화마을은 나름대로 지나가는 길손들이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벽화는 자연 환경과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답다. 있는 듯 없는 듯 살펴봐야 보이는 정도면 더 좋을 것도 같다. 그 길로 평택호관광단지로 이어지는 길을 평택호에서 불어오는 바람 가닥을 헤아리며 내딛으면 어느새 평택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변모한 평택호관광지가 나타난다.
권관리 사람들은 반농반어로 생계를 꾸렸을 것으로 보인다. 평택호 주변이 방조제를 막기전에 바닷물이 군문교까지 올라 오는 곳이고 보면 주변엔 반농반어로 생계를 꾸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평택호의 옛 이름을 계양바다라고 평택사람들이 불렀다는 사실만 해도 이를 입증하고 남는다. 그래선지 팽성지역에 전해지는 ‘강다리’(조기새끼) 이야기는 우리들 삶의 애환이 바다에도 이르고 있음을 눈치채게 한다.
이곳에서 재미있는 것은 버려진 쪽배에다 페인트를 칠하고 평택 섶길이라고 큼직하게 써놓은 것이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분이 그렇게 해놓았다고 하는데 그 기지가 박수 받을 만하다. 섶길이 만들어 지는 과정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애정이 표현된 것이라서 기쁘기도 하지만 그런 적극적(?) 의외적 행동이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까닭이다.
화살표가 표시된 샛길을 걸어 국도 39호선 지하통로를 거쳐 권관리를 벗어나자마자 장수리에 이르는 농로로 들어서게 된다. 올라섰다 내려서기가 반복되는 완만한 구릉에 시야가 탁 트이는 계단식 농경지들이 한 폭의 구상화를 보는 듯 펼쳐진다. 중국의 라이스테라스 같기도 하고 필리핀의 그것과도 흡사하지만 더욱 인간적 친근감이 도는, 걷는 사람을 그대로 꼭 안아주는 듯 한 그러면서도 넓게 펼쳐진 논들은 막 푸르게 포기를 불리고 있는 중이다.
평택의 쌀 생산량은 도내 31개 시군 중 14.7%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1976년부터 IBRD자금지원으로 시작한 남양만 방조제와 아산만 방조제를 건설하고 담수화가 시작된 것으로 비롯된다. 비교적 경사도가 낮은 구릉지에 수로를 만들고 펌프질로 물을 끌어올린 덕분에 구릉지에 논농사가 가능해 지면서 쌀자급의 목표에 근접하게 된다. 그전에는 과일이나 고구마나 기장 등 밭작물중심에서 흰쌀맛을 보게 된 것은 평택 사람들에겐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나마 한 때 농민들도 잘 수 있다는 자신감이 폭발적으로 일던 시절이다. 이런 논들은 농사짓는 조건이 좋을 리 없다. 막모내기라고 한 달간 모내기를 하고나면 손가락이 퉁퉁부어 뻘을 밀치고 손가락을 집어넣기가 힘든데 이곳 논들은 토질이 뻣벗하고 물빠짐이 심해서 여간한 인내 아니고는 모를 내기가 어려운 조건이지만 그래도 모포기를 끝내 꼿고야 마는 농부들의 노력은 생존의 기록이기도 하다. 폭이 2m정도의 논이 구불구불해서 기계화하기엔 어려운 점이 있으나 농민들의 열정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단보당 500Kg이 넘는 수확을 기록 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고시히까리는 슈퍼오닝이라는 상표로 우리밥상에 올라온다.
권관리에서 장수리로 넘어가는 길 별명이 평택의 산티아고길이다.
길에 역사가 없을 리 없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알고 지나는 것과 모르고 지나는 것의 차이만큼 벌어지기도 한다. 풍광을 만들어 내는 여러 조건 중에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풍광의 으뜸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는 길이 이곳 장수리코스다.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천연의 풍광이 성스러운 신의 영역이라면 사람의 손때가 묻어 만들어진 풍광은 따듯한 어머니의 영역이다. 이곳에서 늙은 어미의 젓가슴이 연상된다면 그 사람은 가슴이 매우 따듯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산티아고길이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길이라고 하면 이 코스는 자신과 주변을 찻아가는 길이라 말할 수 있다. 해서 평택의 산티아고 길이란 별명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서해대교를 바라보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여유로운 이 길을 따라 신영리를 지나 희곡리로 들어서면 제법 규모가 있던 포구였던 만호리는 자취를 감추고 평택항이 눈앞에 나타난다.
歸廬齋에서 더운 날 씀
첫댓글 답사이야기로서 섶길을 걷고 난 후, 다시 말해서 땀내서 가을 걷이를 한 농부의 마음이 이럴것이다라고 할 만큼
섶길에서 느끼는 잔잔한 감동과 여운이 제게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