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적곡 마로가 오래간만에 회원분들께 인사 올립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솔직히 원작이 훼손되는 것 같아 착잡한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것을 달래고자 원작 1,2권의 흐름을 중심으로 드라마 1,2부의 내용 일부와『삼국사기』원전을 활용하여 6세까지의 무휼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자료가 적은 관계로 무휼 그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무휼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이야기를 한다는 편이 맞겠지요. 어떻든 진행해봅니다.
원작『바람의 나라』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지만『삼국사기』기록을 보면 해 명이나 해 무휼이나 상당히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삼국사기』「유리명왕 본기」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二十三年, 春二月, 立王子<解明>, 爲太子, 大赦國內.
(유리명왕) 23년 봄 2월, (유리명)왕의 아들 해 명을 태자를 삼고, 국내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인간적으로 볼 때 유리명왕은 참으로 꼬인 인생을 산 사람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점은『바람의 나라』에서 잘 묘사되고 있지만요.
유리명왕 19년인 기원 전 1년에는 유리명왕이 신하인 탁리와 사비를 죽였다가 병이 들었고(이유인 즉슨 탁리와 사비를 죽인 탓이라고 무당이 설명합니다), 유리명왕 20년인 서기 1년에는 해 명과 무휼의 형인 태자 도절이 죽었습니다.
해 명이 태자가 되기 1년 전, 그리고 무휼이 태어나기 1년 전, 즉 유리명왕 22년인 서기 3년에는 드라마 주몽을 통해서도 유명한 협보가 고구려를 떠났습니다. 유리명왕과의 갈등 때문이지요.
여담이지만 협보는 임대호 씨 같은 인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임대호 씨의 상대역으로 나온 사용 역의 배수빈 씨 같은 인상이었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협보에게서는 무장이라기보다는 행정가나 지략가의 모습이『삼국사기』에 더 많이 투영되니까요.
차라리 한혜진 씨가 서투른 액션을 하는 것보다는 가공인물 사용을 소서노를 철통 같이 보호하는 배역으로 삼아 임대호 씨가 연기하고 협보를 배수빈 씨가 연기했다면 더 그럴 듯했을 것입니다.
여담은 여기까지 하고 유리명왕 23년은 서기로 치면 4년이 되는 해입니다. 알아보기 쉽게 쓰면 A.D. 4년이 되지요.
무휼이 '응애'하고 태어났을 때 해 명의 나이는 16세였습니다.
지금이야 중학교 3학년 정도 밖에 안 되는 나이지만 당시 15세를 성년으로 취급했던 시대 정황으로 보면 해 명은 이미 어른인 셈이지요.『삼국사기』「백제 온조왕 본기」를 보면 성년의 대략적인 나이가 15세라는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여하간 해 명의 태자 등극과 무휼의 탄생은 유리명왕에게 적지 않은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협보가 유리명왕 22년 음력 12월에 고구려를 떠난 후, 만 3개월 정도 되는 유리명왕 23년 음력 2월에 해 명의 태자 책봉을 한 것은 유리명왕의 심중을 반영한 행위라고 봅니다.
물론 도절의 죽음 이후 만 3년을 기다린 것은 해 명이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려는 유리명왕의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도절의 죽음 전후로 좋지 않은 일들이 줄줄이 일어나니 유리명왕은 어떻게든 심기일전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즉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노력이지요.
무휼은 그러한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러니『바람의 나라』전개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무휼이 일종의 복덩어리였던 셈입니다.
사실 아들의 이름을 '근심이 없어라'라는 뜻의 무휼로 짓는 것은 당시 유리명왕의 심정을 헤아려볼 때 지극히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이 무휼이라는 이름을 상당히 왜곡하고 있지요. 기계적으로 해석하여 냉혹한 인간이라는 뜻으로 풀이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대무신왕 해 무휼이 후고구려를 세운 김 궁예 왕도 아닌 바에야 드라마의 전개는 너무 지나치다 못해 역사적인 고증을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하간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흐릅니다.(드라마에서는 1부와 2부 사이의 기간입니다.)
○二十四年, 秋九月, 王田于<箕山>之野, 得異人, 兩腋有羽. 登之朝賜姓<羽>氏, 尙王女.
(유리명왕) 24년 가을 9월, 왕이 기산의 들에서 사냥하다가 비상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우씨 성을 주고,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서기 5년, 곧 해 명이 17세, 무휼이 2세 되는 때에 유리명왕은 딸을 시집 보냅니다. 우리가『바람의 나라』원작에서 세류로 알고 있는 공주 바로 그 사람입니다.
고구려 풍속으로 볼 때 정확하게는 우씨가 장가 든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겠지요. 어떻든 여기까지는 상당히 태평세월입니다.
다사다난했던 유리명왕의 인생으로 볼 때 이 시기가 가장 태평하고, 나름대로 즐거웠을 시기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인 무휼도 이 바람에 나름대로는 무탈하게 성장했겠지요.
그러다가 서기 8년인 유리명왕 27년에 원작『바람의 나라』에서도 언급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해 명과 유리명왕의 갈등이지요.
유리명왕 27년 음력 정월 즉 1월에 해 명이 황룡국에서 보낸 활을 부러뜨리는가 하면 음력 3월에 황룡국을 방문했던 시기가 이 시기입니다.
이 때 해 명의 나이는 약관 20세이고 무휼은 5세인 때입니다.
나이로 보아도 해 명은 이때 한창 혈기방장한 나이입니다.『바람의 나라』에서의 사려 깊은 해 명의 모습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순화되서 나온 것도 사실인 듯합니다.
그러다가 해 명은 결국 21세 때 아버지 유리명왕에게 자결을 강요받게 되지요. 이때가 유리명왕 28년인 서기 9년, 무휼의 나이 불과 6세였습니다.
음력 3월에 있었던 이 해 명의 죽음에 아무리 어린이라도 충격을 받지 않았을 리는 없습니다.
무휼이 과연 해 명과 잘 지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무휼이 5세였던 시기에는 해 명이 옛 도읍지인 졸본에 있었을 터이니 만나기는 어려웠겠지요. 결국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굳센 점을 보이려는 차원에서 두 사람은 노선이 서로 같은 듯합니다. 이러한 점을 잘 활용하여 괴유와 마로의 복선을 깔아둔 김 진 선생님의 스토리 구상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해 명의 죽음이 있은지 불과 5개월 후인 유리명왕 28년 음력 8월 드디어 부여의 대소 왕은 유리명왕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나라 안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일어나는 외부의 압박에 과연 유리명왕과 6세의 무휼은 어떻게 대처할까요?
다음 글에서 다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단도용대응본부에서 적곡 마로가 썼습니다.
첫댓글 역시나 멋진글이십니다 역사와 바람의나라를 잘 조화를 이룬 글 잘 읽었습니다... 드라마 바람의나라 1회 5분을 보고 바로 tv를 꺼버렸는데... 이젠 보고싶지 않네요 ㅠㅠ
vchoicev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에서 밝힌 대로 드라마 바람의 나라는 이미 개연성을 상실한 듯하군요. 무휼의 즉위 이전까지는 아역을 썼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 그 이전에 개연성 있는 스토리가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