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마지막 이사였으면
이기숙
며칠 전 이사를 하였다. 인천 서구 불로동이란 곳에서의 4년 생활을 접고 서울로 다시 이사를 했다. 이사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묵은 살림이라 새집으로 들어가면서 가져가기 싫은 물건들이 많았다. 과감히 버릴 것은 버리고 줄 것은 주었다.
12시, 짐은 모두 실어 놓았으나 이사 올 사람이 오지 않으니 난감하였다. 하는 수 없이 남편과 짐을 먼저 보내고 나는 떨어져 복덕방서 오는 사람을 기다렸다. 1시, 2시, 애타게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전화가 왔다. 그 집도 돈을 못 받아 짐만 먼저 보냈다고 아무래도 늦겠다고...
남편은 우리가 들어 갈 집에서 나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데 왜 안 오느냐고 성화다. 구좌 번호 받아 놓고 먼저 갈 곳으로 가서 짐부터 풀라고 하였다. 강남의 부모님 댁으로 들어간다며 시간은 자꾸 가고 짐은 해전에 들여야 하니 그리 하겠다 하고 갔단다.
결국 오후 3시 반에야 돈 가진 사람이 왔다. 계산 해 받고 나니 4시가 다 됐다. 받을 사람은 그 돈 찾으려고 은행에서 대기 중이란다. 택시 타고 은행으로 갔다. 현찰로 바꿔 송금하고 나니 4시 5분, 받을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금 송금했으니 찾으라고 하였다. 2분 후에 찾았노라고 전화가 왔다.
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조금 전부터 뿌리던 비는 시야가 잘 안 보일 정도로 세차게 온다. 빗속을 뚫고 혼자 차를 몰면서 이사 간 집을 향해 달렸다.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4년 간 인천 시민 되었다가 다시 서울 시민이 되는 순간 만감이 교차된다.
결혼 후 46년간 무려 스무 번의 이사를 다녔다. 그동안 내 집에서 살아본 건 전주에서의 5년 간 뿐이었다. 나머지 기간은 사택, 아니면 셋집 생활이었다. 남편이 군목 생활하는 13년은 보따리 살림으로 무려 열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전주에서 내 집을 가지고 살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당시 남편이 35사단 군목으로 있을 때이다. 건축업하는 장로 한 분이 적십자사 임원인데 군부대 지원 차 부대를 가끔 드나들었다. 그분이 남편에게 집을 장만하라고 권하였다. 집을 살만한 형편이 아니라고 하였다. 자기가 덕진동에 집을 12채를 짓는데 그 중 2채는 아직 임자가 결정되지 않았다고 외상으로 지어 줄 터이니 집값은 월부식으로 조금씩 달라는 것이었다.
집이 다 지어 진 후 전세금 빼서 주고 옆방 하나 세 놓아 주고는 나머지는 2년간 다달이 얼마씩 갚아 나갔다. 집값 지불이 끝나갈 무렵 남편은 제대를 하였다. 나의 직장이 경남 진해에서 전북으로 옮겨진 지 2년 밖에 안 되었을 때라 쉽게 또 타 지역으로 전출 하기는 힘이 들었다.
전주가 살 만한 도시라며 그곳에서 살자고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목사, 하나님의 종이니 남편의 뜻을 어길 수 없었다. 힘껏 도와 내조하면서 3년 만에 200평 대지에 80평 2층 교회를 아담하게 지었다. 교인들도 100여 명, 자립 할 정도 되었다. 무리하여 좀더 좋게, 좀더 크게 짓다보니 재정이 모자라 빚을 졌다. 헌당식을 해야 하는데 빚이 있으면 안 된다고 그 빚을 갚는 방법을 제직회에서 논의하였다. 결론은 목사 집을 팔아 전세로 살게 하고 우선 빚을 갚고 나중에 그만한 집을 사 주겠다고 합의를 본 모양이다.
며칠 후 대표자인 집사 집으로 초대를 받아 갔더니 그 이야기를 내 놓는다. 남편인 목사는 집사람만 허락하면 그리하겠노라고 하였단다. 기가 차 말이 안 나온다. 아무리 교회 일이라지만 목사 개인의 사유 재산을 자기네 마음대로 교회 빚을 갚기 위해 판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나는 기도 해 보고 결정 하겠노라고 대답을 하지 않고 왔다. 집에 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잠이 안 온다. 그들의 약속을 믿고 그리 할 수가 없다. 교회 일이란 그 때 그 때 제직회에서 상의 해 결론짓는데 그 교인들이 백년 만년 그 교회에서 일한다는 보장도 없는 일, 목사가 교인들을 향해 약속을 지키라고 대응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 교인들이 그 목사를 끝까지 섬긴다는 보장은 더욱 없는 일, 목사가 싫으면 떠나가는 게 교인들인데.....
차라리 우리가 자진해서 하나님께 바쳤으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떳떳하기나 하지 교인들이 요구해서 그리 한다면 이건 바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차용해 준 것도 아닌 정말 내 놓고도 바보가 되는 일이다.
그렇잖아도 처음 교회를 개척한다고 할 때, 집을 팔고 전세로 살자고 하였다. 교회 부지 사는데 일익을 담당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집값의 반이나 되는 군 생활 13년의 퇴직금을 나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전액을 바쳐 교회부지 사는데 3분의 1을 담당하였다. 그만큼 했으니 집은 팔지 말자는 것이다. 30대 후반, 모든 것을 남편만 의지 하고 살던 나로서는 강력히 남편의 의사를 꺾을 수 없었다. 요즘 같으면 아내 동의 없이 하는 그런 일은 이혼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몇 사람이나 알며, 알면 또 뭐 하겠는가. 눈에 보이는 집을 팔아 바치지 않고도 3년 만에 교회를 지은 남편은 그 지방 목회자들에게 시샘을 받으며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 타 교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우리 교회로 오더니 그들이 그것을 문제로 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바친 헌금을 자랑 할 수도 광고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사모가 신앙이 없어 안 된다느니, 목사가 마누라 하나 휘어잡지 못하느니, 사모가 왜 죽기 살기로 남편 내조해야지 딴 직장을 갖는다느니, 있는 대로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마누라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남편, 어찌 교인들을 휘어잡고 이끌어 가겠는가. 결국은 개척한 교회에서 사임을 하고 전북노회 직영 기독교교육원 원장으로 갔다. 하지만 그 자리도 노리던 목사가 있었다며 타 지방 목사에게 그 자리를 왜 주느냐며 목사들이 추방 운동을 벌리는 것이다.
그들과 맞서 싸워봤자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망신이라고 판단 한 남편과 나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미련 없이 그 지방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먼저 서울로 온 남편 또 다시 목동에서 개척을 한다. 나는 사표를 내고라도 서울로 이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82년 늘어나는 서울의 취학 아동 수 때문에 지방 교사들을 서울로 끌어 들이는 일이 생겼다. 이미 주민 등록을 옮겨 놓은 나도 자격기준에 합격돼 서울로 전근이 되었다. 아마 늘 개척만 하는 남편에게 생활고의 책임을 지우지 말라는 뜻인가 싶었다. 서울로 들어온 나는 나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하기로 했다.
집으로 인해 시험을 당한 나는 집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그래 사택이면 사택 아니면 셋집에서 살기로 했다. 그러나 80년대 90년대 격동기, 기하급수로 인프레이 현상이 일어나고 천장부지로 치솟는 부동산을 잡지 않고 적금 들어 돈 모아봤자 몇 년 후엔 오르는 전세금도 따라가지 못하니 앉아서 바보가 되는 것이다.
내 나이 50대 중반에 이르고 아들이 혼기에 찼는데 집 한 채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들어가 살지는 못해도 내 집을 하나 사 놓기라도 하자. 마음이 급해진 나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공무원 특별 분양을 받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서울 전입이 늦고 청약부금 기간이 짧아 뜻대로 되지 않는다.
포기하고 주공 미분양을 받았다. 들어가 살지 않으니 전세를 놓으면 들어간 돈이 거의 다 나온다. 팔고 다시 민영을 잡았다. 몇 년 후 파니 산값에 배 이상이란 값을 받게 된다. 이렇게 사고팔기를 몇 번, 은행 융자 끼고 전세 받고 실질적인 내 돈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늘 집이 한 채는 있었다.
2003년 교회 은퇴를 한 남편이 인천 검단 병원에 원목으로 일 하게 되어 이를 계기로 인천으로 이사를 하였다. 다행이 전세금이 싸 아주 적은 돈으로 32평 아파트에 세 들어 살았다.
훗날 서울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사놓은 우리 집으로 가기는 싫었다. 강북 이문동이란 지역도 맘에 안 들었고 집도 10년이 넘는 낡은 집이 되겠기에 팔아 다시 사기로 마음을 굳혔다.
2004년 3월, 세 들어 살던 사람 나가겠다기에 절호의 기회다싶어 매매로 내 놓았다. 며칠 후 팔렸다. 전세금을 주고 융자 갚으니 1억 정도 남았다. 아무에게도 말 않고 혼자 많은 고민을 하였다. 인천에 조금 더 살아야 할 형편이고 돈으로 가지고 있자니 불안하고.
전철을 타고 오던 중 누가 보다가 놓고 간 신문을 보게 되었다. ‘부동산 경제’란 신문이었다. 큰 글씨에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권에 미분양을 잡아라.’ 관심 있게 훑어보았다. 여기 저기 서울에서 가까운 지방 도시들인데 그 중에 서울 강서구 가양동이란 글자가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신문을 가지고 목동 오목교 역에서 내려 모델 하우스를 찾아갔다.
1층 3층 한 채씩 남아 있었다. 위치와 분양 조건이 파격적이었다. 가진 돈은 집값에 3분의 1도 안 되지만 호감이 갔다. 50%를 중도금 융자를 해 주는데 입주 때까지 이자를 회사에서 책임진다는 것이다. 3층이라도 잡으려면 빨리 결정지으라는 것이다. 계속 문의 전화가 오고, 오겠다는 전화가 온다. 난 결심 하였다. 하지만 이왕이면 남편의 동의 하에 잡으면 일이 수월 할 것 같아 남편을 불러냈다.
설명을 들은 남편도 사고는 싶어 한다. 문제는 돈이라며 당신이 해결 할 자신 있느냐는 것이다. 정 안 되면 입주 할 때 세 놓으면 된다고 우선 잡자고 우겼다. 왼 일인지 쉽게 승낙을 하는 것이다. 쉽게 호응 해 주는 남편이 고마워 남편의 명의로 사자고 하였다. 속셈은 남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지만...
2006년 입주가 가능 하였지만 인천 집 계약 기간도 남아 있고 대출금의 이자를 안고는 살 수 없어 우선 월세로 남을 주었다. 남편의 병원 근무도 끝나고 선교사업도 이제 좀 억제하기로 하고 인천 집도 계약 기간이 다 되어 내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물론 아직 1억이란 대출금 이자를 주면서 살아야 하지만 더 늙기 전에 집 같은 집, 남의 집이 아닌 내 집에서 살아 보기로 결정 하였다.
이사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오기 전, 온 후 거의 한 달은 온통 이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자식들 삼 남매, 이제 부모님의 노후가 편안하여 마음이 놓인다고 무척 좋아한다. 좋아진 환경, 25년 만에 나의 집으로 와 살게 됨을 감사드리며 ‘내 생에 마지막 이사였으면’라는 소원을 빌어본다.
2000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