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가정
① 개요
광주시 북구 충효동 396번지에 있는 정자로 김덕령 장군의 후손들이 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김덕령 장군이 석주 권필이라는 사람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한 취시가를 읊었기 때문에 취가정이란 이름을 달게 된 것이다.
② 취가정의 창건시기와 창건자
일반적인 정자의 기능은 “개인적 수양을 위한 풍류의 기능, 강학을 위한 교육의 기능, 조상숭배를 위한 종교의식의 기능, 지연과 혈연의 계 모임을 위한 기능, 은둔과 수학을 위한 주거의 기능, 단순한 휴식을 위한 기능”으로 구분지을수 있다. 이러한 틀거리에서 취가정을 바라보면 이 정자는 조상을 기리기 위한 추모의 형태를 띠고 있는 정자로 파악할수 있다.
정자가 군집되어 있는 이 지역에서 취가정은 가장 늦게 생겨난 정자로서 1890년에 세워지게 된다. 정자를 지은 이는 난실 김만식 1834~190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 1869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판서와 평안도 감사를 지냈음. 을 비로한 문중 사람들로 그들의 조상인 김덕령 장군을 추모하며 정자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사진: 원효계곡에서 본 취가정)
당대는 국운이 쇠하고 일제의 간교가 시작되는 시점으로서 임진왜란때 왜적들이 두려워마지 않았던 김덕령 장군을 추모하여 정자를 지었다는데 의의가 크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정자가 불에 타고 1955년에 후손인 김희준과 문중에서 다시 중수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③ 취가정에 담긴 의미
취가(醉歌)라는 말뜻을 그대로 보면 취하여 노래를 부른다는 의미를 지닌다. 정자를 찾으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직접적인 한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세한 내력을 알지 못한다면 단지 표피적인 글 몇마디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자의 이름이 취가정이라고 지어진 것에는 그만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바로 광주의 빼어난 용장이라고 하는 김덕령장군의 생애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덕령장군은 바로 이 지역에서 태어난 이로 어릴적부터 지략에 빼어났으며 효심이 지극한 이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웠으며, 모친의 상을 당했는데도 상복을 입고 의병을 일으켰던 장군이다. 특히 왜적의 호남지방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와 고성, 남원 일원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런탓에 장군을 왜적들은 무척 두려워 하였는데 1596년 28살이었을 때 이몽학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한 일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고문을 당하고 그로 인해 생을 마감하였던 사람이다.
그가 젊었을때 함께 공부했던 이중에 석주 권필 1569~1612년: 자는 여장이고 호는 석주로서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다. 여러 차례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우계 성혼, 송강 정철에게서 수학하였다. 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무척 다감한 사이였는데 그분의 꿈에 장군이 나타나 시를 불러 주었다고 한다. 그 시의 제목이 바로 취시가(醉詩歌) 이다. 장군이 읊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술취해서 부르는 노래 듣는 이 아무도 없구나 꽃과 달에 취하면 무엇하리 공훈을 세운들 무엇하리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취해서 노래해도 내 마음 누가 알까 다만 긴 칼 부여잡고 임금께 보은할수 있기만을 원하노니라.
장군의 억울한 심정과 우국충정의 마음이 들어 있는 이 시를 들은 석주 권필은 이렇게 화답한다.
장군께서 예전에 칼을 잡으셨으나 장한 뜻이 중도에 꺾이니 이 또한 운명이로고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여 분명 이 노래는 취시가로구나.
이런 깊은 뜻을 간직한 후손들은 장군이 넋을 위로하기 위해 무등산이 잘 조망되는 고향의 언덕위에 정자를 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취가의 의미는 술에 취하여 노래를 한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억울함에 통한을 한 김덕령 장군을 의미하는 것이다.
④ 남겨진 시와 유품
정내에는 설주 송운회의 현판이 걸려있고 문헌공 송근수의 정기와 후손 김만식의 상량문, 김덕령 장군의 시와 석주 권필의 화답시 및 주련 주련(柱聯)이 있다.
김덕령 장군의 유품은 광주시로 가는 길의 충장사라는 사우에 장군의 영정을 비롯하여 충장공묘 이장시 발굴된 관곽과 의복을 전시하고 있다. 충효동의 입구에는 정조가 내려준 마을의 표리비가 서 있고 마을 윗편으로 보면 생가가 생기를 잃었지만 반듯하게 남아 있다.
송근수의 취가정기
광주의 석저촌에 김 장군 충장공께서 사시던 동네가 있다. 우리 정조 대왕이 특별히 이 마을을 표하여 충효 두 글자로써 정려(旌閭)를 표하셨으며, 이윽고 별도로 봉사인(奉祀人)을 두어 관리하게 됨으로써, 이 고장이 더욱 더 빛나게 되었다. 금상 경인년(1890, 고종 27)에 그 멀고 가까운 후손들이 장군께서 계시던 옛 터 근처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취가정이라고 정자 이름을 지어 현판을 붙이었다. ‘취가’라는 이 말은 취하여 노래한다는 뜻으로 이 정자의 이름을 ‘취가’라고 한 이면에는 나름대로의 깊은 사유가 내포되어 있다.
그 옛날 석주 권필 공의 꿈에 장군께서 나타나 비통한 심정으로 취시가라는 시가를 한편 읊으며 그의 비장한 감회를 토로하였다. 시의 뜻은 이러하다.
한 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또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 구름, 한 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원키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고자.
그 살아 계신 동안 돌아가신 뒤의 억울하고 한이 맺힌 말은 옛날 중국의 연나라와 조나라의 비가- 연조비가(燕趙悲歌)는 옛 중국 주나라의 제후국인 연나라와 춘추전국시대 조나라 선비들이 나라를 근심하는 우국의 충성이 깊어 비분강개한 슬픈 노래를 읊은 당시의 우국지사를 가르켜 일컷는 말이다.-의 유파라 할 것이다. 권공께서 감격한 마음으로 그 아래에 시를 지어 보태기를,
칼을 잡고 일어섰던 지난 옛날 장한 뜻이 중도에서 꺾였으나 운명인걸 어떠하리 한이 서린 그 영혼이 지하에서 통곡하며 마음속의 울분을 술에 취해 읊었도다.
세대가 다른 데도 이렇게 서로 느낌을 함께 하여 스스로 지사의 눈물을 금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땅에 이 정자의 이름이 어찌 썩 어울리지 않겠는가.
어허 슬프다! 장군께서 이미 무목-武穆:송나라가 망할 때 한을 품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악비(岳飛)-의 원통한 한을 품었으니 그 충성스러운 혼과 의로운 넋이 분명히 산하의 장한 기운으로 맺히었고, 떨쳐서는 천둥 같은 위엄이 되었다.
지금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이빨에 칠을 하는 왜놈들이 나라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게 되니, 만약에 장군의 영혼이 앎이 있다고 한다면, 대마도를 뛰어 건너 일본을 짓밟을 의기가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러하겠는가 아니하겠는가. 이 정자에 올라 그 노래(醉時歌)를 읊으니 또한 어찌 그 감정이 격하고 기운을 토하지 않겠는가. 그런즉 '취가란 이름이 어찌 우연이라고 하겠는가?
어허! 서석산이 앞에 있으니 장군께서 항상 오르내리던 바요, 조대가 그 뒤에 있으니 장군께서 오가던 곳이라, 언제까지나 생각하고 잊지 말아야 할 일 이다.
그런데, 나는 본디가 잔약한 사람이라 능히 한번 정상에 올라가서 큰 술잔을 올리고 노래를 불러 장군의 그 넋을 위로하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감개한 마음만 품고 있으면서, 드디어 이 글을 써서 취가정기로 삼는다. 공의 후손들이 모두 정자 아래에 거주하며, 지금 와서 기문을 청한 사람은 만식과 희문이다.
숭정 5년 신묘 중춘(1891, 고종 28)
대국보국 숙록대부 영중추부사 은진인 송근수(순조 18년인 1818년에 태어나 광무6년인 1902년에 돌아가신 이로 1848년에 병과로 급제, 대사헌, 공조, 병조, 이조의 판서, 좌찬성,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으나 한미수호조약등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사임하고 돌아가신후 문헌이라는 시호를 받은 당대의 대신임)는 기하노라.
취가정의 원운
잔을 멈춘 슬픔속에 이 내 생각 길어지니 안개속에 묻힌 다리 그 모습이 망망하네 말을 모는 봄 언덕에 신마의 채찍끈이 끊어지고 용이 잠긴 가을 물에 긴칼의 날이 무뎠도다. 옛날 유업 계승하여 한 정자를 일으키니 이 마을의 새 모습이 한없이 빛났도다. 고기잡는 늙은 어부들이 당시 일을 알수 있을까 낚시터에 홀로 앉아 석양빛을 낚았도다.
후손 김만식
각 기둥에 붙어 있는 주련은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聲閒于天, 忠貫日月, 氣壯山河, 醉歌於地 그 의미를 보면
하늘에 대고 고요히 노래하니 곧은 마음은 해와 달을 꿰뚫으네 기운은 산하에 넘쳐 이 땅에 취하도록 노래하네
⑤ 현재의 관리상태와 주변상황
취가정은 역사성을 담고 있는 중요한 공간임에 반해 문화재 보호법이 요구하는 50년 이상된 건물이 아닌탓에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충장공의 유훈을 지키고자 하는 후손들에 의해 깔끔하게 잘 관리되고 있다. 주변의 숲도 연륜에 비해 비교적 울창한 편에 속한다. 몇해전 혹심한 날씨에 낙뢰로 부러진 소나무가 춤추는 모습으로 서 있어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대체목을 심어 놓고 보살피고 있는 상황이다. 건물의 바로 뒤편에는 새로운 슬라브 집이 들어섰는데 다소 경관이 이질적이긴 하나 그 집에서 앞장서서 관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취가정의 동쪽으로는 무등산에서 발원한 계류가 만나 흐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무등산이 정면으로 내려 보이는 곳이라서 전망이 빼어난 곳에 위치한다. 여름이면 후손들이 모여 계회를 가지기도 하면서 보존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유산중의 하나이다.
⑥ 답사의 포인트
취가정에서는 무엇보다 김덕령 장군의 생애를 그려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의 생애를 모르고서 정자를 방문한다는 것은 자칫 집 이름에서 비롯된 오해로 경솔하게 행동하기 쉽기 때문이다.
주변의 소쇄원이나 식영정, 환벽당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탓에 방문객이 많지 않아 조용한 분위기에 상념에 잠기기 좋은 곳이 바로 취가정이다. 아울러 소쇄원쪽에서 이곳을 찾았다면 다음 코스인 환벽당으로 가는 조그마한 농로를 타고 들판 사이를 걷는 것도 무척 흥미진진한 일이다.
오른편으로 흐르는 시냇물의 물줄기를 보며 시야에 들어오는 지실마을의 소담한 정경을 관상하면서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곳이 취가정이다. 또한 충효동에 들어서면 장군의 생가와 사당을 함께 볼 수 있다.
⑦ 취가정에서 경관을 노래한 시
추모의 정자에서 경관을 노래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탓에 취가정을 찾은 선비들은 김덕령 장군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담고 그분의 생애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려 하는 시문을 지었다. 그중 난와 오계수라는 분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김씨 취가정의 운을 따라 지음
흩어지는 연우(煙雨)속에 마을 하늘 길어지니 생각나는 옛날 일에 이 내 마음 아늑하네. 깊은 가을 검굴(劒窟: 칼을 만든 곳)위에 누런 낙엽 가득하고 늦은 봄철 조대(釣臺)위에 푸른 이끼 거칠었네. 두임금의 높은 은혜 풍운처럼 느끼었고 천만고의 곧은 충성 일월처럼 빛났도다. 술에 취한 노래처럼 다시 살아 일어나면 여러 군음(群陰) 옳지 못한 불의가 정의를 짓눌러 없앰을 뜻하는 말 사라지고 밝은 빛이 나타나리
⑧ 취가정 가는 길
광주 서방시장이나 문화동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125번이나 225번을 타고 가사문학관에서 내려 소쇄원 방향으로 300미터쯤 걸으면 좌측으로 청산가든이라는 식당이 나오고 우측에는 오래된 다리가 나타난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보면 언덕이 눈에 뜨이는데 그곳에 취가정이 있다. 자가용은 광주에서 망월동과 보촌 삼거리를 지나 고서4거리에서 887번 지방도를 타고 광주호 쪽으로 가서 가사문학관을 조금 지나면 좌측으로 나오는 다리를 따라 들어가면 된다. 주차장은 없지만 취가정의 진입로를 들어서기 전에 약간의 빈땅이 있어 차를 주차할수 있다.
[출처 : 무등산권 문화유산 해설 http://tourism.dkc.ac.kr/htm/tour/namdo/index.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