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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종군로에 들기 전에 하고 싶은 말
백의종군의 축자적 의미는 "흰옷 입고 군 대열을 따른다"는 뜻이다.
의사, 간호사가 아닌 현역군인이 백의종군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이라면 기존의 계급과 직책을 모두 내려놓고 무관(無冠, 無官)의 신분
으로 전선에 나가 싸우라는 것이므로 군인에게 내리는 벌(罰)이다.
군(軍)형벌의 일종인 백의종군의 기원은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220-589)
의 백의영직(白衣領職)에 있단다.
문관이 받는 형벌중 하나로 백의를 입고 업무를 수행하였으므로 무관(군인)은 당연히 백의
입고 종군했다는 것.
영직은 이조시대에 종구품 잡직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당시(중국)에도 하위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순신 장군이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한데, 이조시대에 백의종군이라는 군 형벌이 있었던가.
하필, 이순신 장군만 2번이나 백의종군했다고 말할 뿐 내가 이 분야에 과문하기 때문인지
그같은 형을 받은 사람을 알지 못한다.
정란, 반정, 정변, 군란과 사옥이 반복되고 문무 가릴 것 없이 진동한 피비린내가 멎을 날이
없던 왕조에서 이처럼 신사적인 형벌을 받은 군인이 하나뿐이라면 엄청난 특전 아닌가.
세간에서는, 사계(斯界)의 전문가들까지도 하나같이 이 벌에 대해 성토로 일관하나 이유야
어떻던 사형에서 백의종군으로 감형되었다면 이순신 외에는 아무도 누리지 못한 은총이다.
한인들(閑人)이 백의종군이라는 형벌을 놓고 왈가왈부하고 있으나 금과옥조처럼 받들었던
대명률(大明律)에도 없고 형벌의 종류나 형명(刑名), 행형 기록에도 없는 벌이다.
관작의 박탈 여부가 시빗거리가 되고 있는 이 벌의 경중이 어떠하던, 법에 없는 자의적 왕명
이라 해도 감수해야 할 벌임에는 틀림 없다.
선조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는 유서(諭書)에도 백의종군을 명했다는 말은 없다
직함을 내려놓고 속죄하라(而頃者遆卿之職。俾從戴罪之律者)고 한 것이며 백의종군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는데 그를 기리는 후세인들이 지어낸 말 아닌지.
백의종군이건, 속죄의 길이건, 관작을 상실했건, 유지했건 중벌이건 경벌이건 각설한다.
종이품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장군이지만 우여곡절을 겪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기는 했으나
무관의 이순신으로 권율 도원수의 휘하에 들어갔다.
나이로나(1537년과 1545년) 이전직함(품계/정2품과 종2품)으로나 도원수의 수하였으므로
특별하게 거북할 것도 없는 처지였다.
파렴치범도 아니고 대역죄라 하나 정치판의 희생양인 것을 모두 알고 있으므로 전관 예우도
받으며 의논해서 정찰에 나섰다.
원균의 참패가 계기가 되어.몇명의 장졸(?)과 함깨.
백의종군 형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이 정찰의 길이 백의종군로가 되며 출발함으로서
백의종군이 시작된 것이다.
이순신(장군이 아님)은 수곡면 원계리(경남 진주시)에 있는 손경래의 집에 체류 중에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는 선조의 유서를 받고 즉시 복귀함으로서 백의종군은 끝났다.
그러므로 이순신의 백의종군로는 이 집(손경래의 집)까지다.
이 집 이후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행차가 되니까.
사실이 이러함에도, 망해서 속빈 강정의 꼴이 되어 있을 망정 삼도의 수군을 호령 질타하는
총사령관이 행차한 길까지 백의종군로라니 하도 어이가 없어서 포복절도할 일이다.
백의종군로를 엿가락 늘리듯 길게 하면 소위 떡고물이 많아지기 때문인지 80km 남짓 밖에
되지 않는 길을 배로(161km로) 늘리는 황당한 짓을 하고 있는 무리들 낯 뜨겁지 않은가.
그 뿐인가.
도성의 감옥에서 나온 이순신이 왕명을 이행하기 위해서 쉬엄쉬엄, 돌고돌아 권율 도원수의
진영이 있는 합천까지 간 길도 백의종군로라고 우긴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여전히 통제사의 행차로 착각하리만큼 대소 관직의 오만 사람을 만나고
대접받으며 갔는데 복권의 가능성이 있으며 실인심하지 않은 전관예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형벌로 인해 몸이 피폐해지기는 했지만 시각을 타투고 밤을 도와 달려야 할 전시였다.
그럼에도 고향(아산)에 도착하여 선산에 성묘하고 친구들과 만나 그동안의 회포도 푸는(난중
일기) 등 일촉즉발의 위기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왕명이 지엄하지 않았던가.
왕명의 지엄 여부와 관계 없이 풍전등화,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염려하는 충무공의
우국충정의 본성과도 괴리가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불가사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왔던 도원수에게 신고하고 휘하에 편입되면 그 때부터 백의종군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전속명령이 아닌, 입영명령을 받고 훈련소 앞까지 간 길에 해당하는 그 길까지도
백의종군로라고 우겨대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왕이 시기하리만큼 강렬했던,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숭앙의 정서는
이해하나 그 정서와 길(백의종군로)의 길이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과공이 되레 비례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각기 다른 목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라고 우기는 한양~합천과 진주~하동 길의
극히 일부 구간 외에는 모두 걸었다.
그래서 표현의 혼란을 막기 위해 전자를 백의종군 '전길9前路)', 후자를 '후길(後路)'로 구분한다.
불경(不敬)의 오해를 막기 위해 호칭은 시기에 맞게 사용하겠다.
가령 백의종군 중일 때는 무관이므로 성함만 사용하는 등>
합천으로 가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전길과 후길은 거의 걸었음에도 정작 백의종군로는 단성의 일부 구간 외
에는 걷지 못했기 때문인가.
온 국민과 함께, 앞을 다투며 경모하면서도 장군의 주변만 맴돌고 있는 듯 했는데 '백의종군
로의 완전 복원' 소식들이 인터넷을 통해 거듭 전해 오면서 점화되었다 할까.
진짜 백의종군로를 걷겠다는 불이.
합천에 있었다는 옛 권율 도원수의 진영으로 가려는데 합천에 대해서는 해인사와 황매산을
품고 있는 지방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명찰 명산과의 인연으로 더러 들렸음에도 합천은 내게 10지 안에 드는 낯선 지역이었다.
밤 사이에 새 길이 나올 정도로 급변하는 도로 사정이기 때문에 내 정보 이상의 첩로를 기대
하며 페북에 방을 올렸다.
댓글이 떴다.
반갑기 그지없게도 2015년 8월 어느날의 까미노 인연 김범수 군이었다.
뽄떼베드라의 알베르게에서 심야에 만났는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어 리스본
까지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는데"라는 20대 중반의 비씨끌레따(bicicleta/bicycle) 청년.
합천 안내는 새로울 것이 없다 해도 그를 다시 보는 것은 축복이라 할 수 있다.
부산산(産)으로 알고 있는데 창원에 거주중이며(직장?) 시간 내주면 식사 대접하겠단다.
까미노에서도 그는 신라면과 짜파게티를 내게 주고 갔으며 나는 짜파게티 조리를 몰라서 딸
의 자문(전화)을 받아 맛있게 먹었는데 이후에 나는 짜파게티 마니아가 되었다.
산청의 이학근님도 우군으로 챙겨 놓고 집을 나선 때는 2017년 11월 20일 새벽.
07시 50분발 합천(22.000원) 경유 의령행 시외버스에 오른 후 4시간이 지난 정오까지 1회
의 휴게소 이용 외에는 거의 다 잠으로 때웠다.
장거리 스케줄 전야에는 밤새워 뭘 하고 주행 중에 잠을 보충하는 신종 버릇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을 애끼고 알뜰살뜰 쪼개어 쓰는데도 아 시간의 부족으로 쩔쩔매는 이즈음이다.
아마도, 여광이 없기 때문에 해가 지면 바로 어두워지는 황혼기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내 많은 버릇이 나쁘다 해도 기다리는데 익숙한 것만은 내놓을 만한 버릇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비롯해 비행기와 선박을 포함한 교통 기구, 식당과 어떤 행사 시간 등 기다리는 일은
오랜 나그넷길을 통해서 잘 길들여진 버릇이다.
해인사와 황매산 외에는 모두 낯선 곳인데 군영(권율도원수 진영)이 있었다는 초계에 가려면
많이 기다려야 한단다.
내가 사는 우이동에도 대중 버스가 오전과 오후, 하루에 2번 다니던 시절이 있었는데 길어야
한 두시간쯤 기다려야 한다면 농어촌의 대중교통 사정이 예전에 비하면 엄청 좋아진 것이다.
수익성을 고려하면 폐지해야 할 노선이 많으며 횟수도 많이 줄여야 하는데 불만은 무슨.
백의종군로 걸을 준비를 할때 문제로 부상한 것은 군영이 있었다는 초계면의 족보(?)와 그에
따른 군영의 실제 위치였는데 초계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내가 잘 짚헜음을 확인했다.
<이곳은 정유년(1597년)에 권율 도원수의 도원수부 자리이다.
이순신 장군이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기 위해 원수부가 있던 합천 초계인근인
모여곡 이어해(李漁海)집에 거처를 정한 후 택정재를 넘어 5차례나 권율 장군을 방문하여
전략을 수립한 곳으로 . . . . . 천혜의 요새지이다>
면사무소 입구에 있었다는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행로 안내도" 안내판 마저 없어졌고 오석
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지'라고 새긴 비만 있는데 면 직원들이 모두 장님(?)이다.
인터넷에 어떻게 떠돌고 있던, 그들은 오불관언의 자세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정만 실토했다.
초계면의 변화가 많았기 때문에 이 충무공의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아는 직원이
없는데다 직원들의 자리 이동이 심하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
그들 중에 관련 업무가 아닌 환경개발계장(하상범)만이 설명할 능력이 있으며, 그가 지도를
출력해 합천군내 백의종군로 사정을 지도에 표기해 주었다.
총무계의 여직원 김선임도 결정적인 도움의 길을 열어주었다.
합천군 문화원 사무총장 김규열을 소개해 준 것.
김규열은 어떤 행사준비 때문에 도움을 줄 사정이 되지 못한다며 향토사학자 이강중과 접촉
하게 도와줌으로서 큰 가닥을 잡게 되었으니까.
초계면청의 념녀 직원 2인을 만난 것은 백의종군로를 걷는데 큰 행운이었다.
초계향교를 비롯해 시장을 살펴보았다.
군의 다운타운에서 동동남 12km지점에 위치한 면으로 합천 동부지역의 교육, 문화, 교통의
중심지가 되며 시장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는 면.
면의 시장(市場)으로는 규모 있고 활성적인 것이 그 증거라 할까.
옛 도원수 진영이라고 하는 허허벌판 농경지 사진이 황당하기는 했으나 이 사진을 따라가서
현장을 살펴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문화원 사무총장의 연락을 받았다는 율곡면의 향토사학자 이강중.
즉시 택시를 불러 율곡면 모여곡으로 달려갔다.
이순신이 7월 18일 백의종군을 시작하기 전야(7월 17일)를 보냈다는 이어해의 집 마을이다.
이 집은 이 날 밤 이전에도, 이순신이 합천에 도착한 후 줄곧 머문 거처다.
나보다 10살 연하인 이강중의 현 직함은 사)21세기이순신연구회 합천군지회 회장이다.
대구대학교 출신으로 합천신문 편집주간을 거쳐 남명학 회원이며 향토사학자다.
그가 나를 안내한 곳은 이순신이 묵었다는 집의 주인 이어해의 10대손 이종규의 방.
나와 동갑(84세)인 이종규 역시 이순신 연구 향토사학자라는데 이순신 관련 책자가 가득한
방의 벽에 걸린 이 충무공의 초대형 영정이 이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 2명의 이순신연구 향토사학자는 모두 율곡면 여기 모여곡 출신이란다.
향토사학자는 주로 정사로 기록되지 않고 구전되어 오는 그 지역의 야사와 전설을 비롯하여
각종 내력에 정통한데 이순신에 올인하는 듯한 이강중, 이종규 두 분에 의하면,
바야흐로 이순신으로 인하여 초계면과 율곡면이 첨예한 대립 관계가 되어 있단다.
군과는 무관한(어느 면이라도 상관 없으니까) 면 단위의 큰 이해가 걸린 문제라 쉽사리 양보
하거나 타협으로 될 일도 아니며 그들도 자기 소속 면을 위해서 진력해야 하는 처지란다.
문제의 발단은 이순신의 백의종군로 복원에 맞춘 합천군의 권율 도원수부 재현계획이다
96억원의 거금을 들여 초계관아와 객사 등 13동의 재현과 근린공원의 조성으로 역사 복원은
물론 관광상품으로 만들겠다는데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면들이 잠잫고 있겠는가.
왜란 당시의 기록에 초계가 못박혀 있으므로 당연히 초계면에 건립해야 한다는 초계면측의
주장에 반하여 율곡면측은 당시의 초계군에는 율곡면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정확한 고증
으로 확인되는 지역, 즉 율곡면 모여곡 일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
지명 초계가 최초로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고려의 8대 현종(顯宗/992~1031/재위1009년~
1031년) 9년(1018년)이다.
27대 충숙왕(忠肅王/1313년~1330년, 1332년~1339년)의 복위3년(1334년)에는 현에서
군으로 승격했다.
이조때는 3대 태종(太宗)13년(1413)에 군에서 현으로 강등과 승격을 거듭했고, 26대 고종
(高宗) 32년(1895년)에 진주부에 예속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1914년의 행정개편 때에 합천군에 합병되었으며 북으로 율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합천군사에서 발췌)
행정구역 문제는 율곡면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말단 지역명까지 세밀하게 기록하지 않고 군 또는 현 단위로 처리하는 것이 통상적이니까.
가령, 누가 내게 거주지를 물으면 서울이라고 답한다.
자세히 물으면 강북구, 더 세밀하게 물을 때 비로소 우이동 573-9라고 답하니까.
초계와 율곡 어느쪽도 나와는 무관하며, 정확한 고증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지기 바랄 뿐인데,
유적이라도 발견되지 않는 한 500년 전의 일이 정확하게 규명되기 어렵겠다.
시발지도 찾지 못한 백의종군로를' 복원 완료'했다고?
이 기사를 퍼뜨린 기자들에 대한 연민이 나로 하여금 2013년 7월 17일로 되돌아가게 했다.
섬진강과 영산강의 자전거길로.
그 때 나는 "희대의 사기 행각에 당했다"(메뉴'길따라강따라'의 1번글 참조)고 표현했다.
일부 구간은 토지 매입도 되지 않은 섬진강, 영산강 자전거길의 준공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룬
장관(현 인천시장)을 비롯해 신문과 방송으로 떠들어댄 소위 기자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똑같은 말을 다시 하게 되다니.
두 영감의 횐송을 받으며 모여곡을 떠나는 내 발걸음은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혹 떼러 갔다가 되레 혹을 하나 더 달고 나오는 기분이니 아니 그랬겠는가.
문제를 속 시원히 풀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더 복잡한 문제 속으로 말려들어간 듯 했으니.
그들은 내게 자기네의 주장에 동의하는 우군이 되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진실을 잡으려는 내 충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네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나의 이해로 끝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아직 백지다.
그래서 이 백지에 일방적으로 그림 그리기를 아무에게도 허용할 수 없다.
그들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틀린 그림보다는 차라리 백지 상태로 진행하는 편이 더 낫다.
백지라면 바른 그림을 그려넣을 기회가 100% 열려 있지만 잘봇된 그림은 그 기회를 0%로
만들어버리니까.
귀한 시간을 소비하며 챙긴 소득으로 간주하며 걸었다.
이 밤이 지나면 바로 출발하기 때문에 시발지를 정하는 화급한 문제를 안고.
그래서 버스 탈 기회들이 왔지만 낮에 알아둔 합천읍의 찜질방을 향하여 걸었다.
생각하며 걷고 걸으며 생각하고.
걷고 있는 동안에도 이강중으로부터 전화가 거듭 왔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여 미진한 느낌을 갖고 있는지 부언을 반복하며 율곡면사무소에
들러 부면장과 대화하기를 권해 왔다.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확인해줄 사람이라고 생가하고 있는 듯.
그러나 어두워지는 시각이라 면청 들르기를 접고 10km여의 밤길을 걸었다.
걷는 일에 등한한 사이에 몸(특히 하체)의 대부분이 나태해진 듯 하기 때문에 점검하고 적응
하는 훈련의 일환으로.
찜질방에 여정을 풀었다.
옥에도 티가 있드시 약간의 불편한 점이 있지만 지방 군청 소재지의 찜질방으로는 놀랍도록
잘 갖춘 시설이다
합천군의 크기는 경남도의 9.4%의 면적으로 도내 최고로 큰 군이며 서울의 1.6배라 하지만
인구는 47.448명밖에 되지 않는, 크지 않은 군이다.
다운타운인 읍 인구는 12.155명에 불과하나 도시와의 경쟁에서도 기죽지 않을 찜질방이다.
그러나 하마터면 큰 사고로 번질 뻔 했다.
돌연한 무리가 원인이었는가 장시간의 온욕으로 정신이 혼미해졌기 때문인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것을 붙들어준 분이 없었다면?
한동안 그분의 간호를 받아 정상으로 복귀했지만, 대간과 정맥들, 8도의 길을 걷는 동안 온
나라의 찜질방을 섭렵(?)한 경력에 치명적 오점을 남길 뻔 했으니까.
결국 나에게도 경고 신호가 온 것인가. <계 속>
2017년 11월 20일 정오에 합천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으나(위) 정유재란때 권율 도원수진영이
있었다는 초계면의 사무소(아래)로 가기 위해서는 1시간 반 이상 기다려야 했다.
좀 더 많이 기다려야 하면 아예 걸어서 가는 쪽을 택했을 텐데...
백의종군로 답사 자료에 의하면 수년 전까지도 위'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지'오석 뒤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 안내도'가 서있었다는데 사라지고 그 자리에 트럭이 주차하고 있다.(위)
면 사무소 직원들은 그곳에 대형 안내도가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이해관계 부서 외에는 권율 도원수부 재현에 대해서 마저 모르거나 무관심이다
면 단위 시장 치고는 짜임새 있고 활성적인데(위) 들판을 가리키며 권율 도원수 진영이 있었던
곳이라는 주장은(아래) 아무래도. . . . .
초계향교(위)가 많이 시달릴 것 같다.
이순신이 거처한 이어해의 집이 모여곡에 있었다는 것은 양측이 일치하는데 초계측은 그 모여곡이 현재의 초계향교라고
주장한다니까 임란때 소실되었다가 재건했다는 초계향교의 역사만 규명해도 진위가 가려지지 않겠는가.
모여곡(율곡면/아래)의 향토사학자 이강중을 빨리 만나려는 초조감이 지방 나들이의 금기(택시/위)를 깨게 했다.
(이순신 백의종군로 개념도(위)
이순신이 백의종군 전에 여러 날 묵었다는 이어해의 집(위)과 그 가솔의 집(아래 좌)
(이 집이 반 천년의 풍상을 버텨온 집의 원형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모여곡이 아니라는
주장은 따로 입증해야 한다)
이강중이 맨 먼저 안내하고 저간의 일들을 설명한 곳은 이순신이 여러 날을 묵었다는 이어해의 집.
모여곡이 아니라면서도 이 집 전체를 매입해서 관리하겠다는 당국의 모순을 그는 신날하게 비판했다.
더구나 백의종군로의 복원과 권율 도원수부의 재현에 따른 역사적인 의미 외에도 관광효과가 큰 지역인데
헐값으로 구매하려 한다나.
여기에도 돈 문제가 걸려있는 것 같다.
돈. 돈. 돈. 돈. 온통 돈. . . . .
이강중이 화를 낼 이유로 충분하겠다.
다음으로 안내한 집은 이어해의 10대손 이종규의 집(아래)
이 지역 향토사학자 이종규(위)와 이강중(아래)
율곡면측이 주장하는 모여곡인 낙민리 매실마을(위)과 모여곡에서 맞은 일몰(아래)
여광마저 사라져가는 시각에 아무도 없는 길을 생전 처음 걷는다면 국내와 해외의 구분이 무슨 의미 있는가.
권율 도원수가 900명의 군관을 양성한 들이라면 역사적 의미는 있겠지만 고증 없이 구전되어 왔을 뿐이고.
초계에서 율곡 경유 합천 다운타운으로 가는 길(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