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다시 보는 그때 신문들... 지금 그들은 부끄러워할까?
광주를 죽이고 전두환을 우상화하던 그때 언론 다시 보기
권태윤 기자
광주 민주항쟁과 관련한 보도는 계엄사 발표 일인 21일부터 본격 게재됐다.
<중앙 일보>는 21일자 1면 머릿기사에서 '학생, 시민들 광주에서 소요, 18일부터 민간인 1명, 군경 5명 사망, 평온 회복 위해 모든 대책 강구, 지역 감정 유발하는 유언비어가 퍼져 자극'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다음날 <서울 신문>과 <조선 일보>도 같은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5월 22일, <서울 신문>은 '안보적 중대 사태' 라는 제하의 사설을 실었고, 다음 날 '북괴 방송이 광주 사태만 집중적 선동'이라는 묘한 기사, 24일에는 사회면 머릿기사로 '광주 시위 선동, 남파 간첩 검거'를 올리고 그 옆에 '광주 유혈 소요 6일'이라는 제하 기사로 18일 이후의 공공건물 파괴 상황을 일자별로 게재했다. <경향신문>은 24일자 사회면 머릿기사로 '북괴 간첩 1명 검거'가 실렸다.
특히 <조선일보>는 23일자 '새 내각에의 절실한 기대' 라는 제하의 사설을 통해 "...온 시가지가 무정부 상태로 화했으며 군경은 시외곽으로 철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부 군중들은 각 처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한 채 대치중이라 하니 지난 날 사북사태 이상의 심각하고 우려할 사태가 국토의 일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이 엄청난 비극이 누구를 위해 전개되고 있는가"라며 광주항쟁이 마치 북의 사주로 이뤄지고 있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했다.
<조선일보>는 또 25일자 사설에서 "...피흘림을 보고 불길이 솟고 군중의 격앙된 심리상태에 이성을 잃게 되면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분별력을 가질 수 없는 법이다. 57년전 일본 관동대지진때 조선인 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 며 광주항쟁을 관동대지진 때 일제의 조선인 학살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한 26일자 <서울신문> 사회면에는 "광주는 죽음의 도시, 공포의 도시가 돼있다... 광주시 화정동 광주육군병원 입구에서 시가를 향해 8백미터 거리를 두고 계엄군과 과격파 난동자들이 맞서있는 현장이 목격됐다... 그리고 사상범 등 중범이 가득한 광주교도소를 7차례나 습격하고 그 때마다 어린이와 중학생을 보초로 세운 행태 등은 도저히 데모나 소요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당국의 설명이다"라는 기사가 등장하고 있다.
이밖에도 수많은 신문과 방송이 앞다투어 '광주 죽이기'에 앞장섰다.
살인마 전두환? 웃기지 말라! 위대한 전두환
'광주 죽이기'에 앞장섰던 언론들은 곧이어 본격적인 '전두환 우상화' 작업에 나섰다.
<서울 신문>은 80년 8월 19일 부터 '새 시대를 여는 새 지도자 전두환 장군'편을 시리즈로 마련, 전두환 우상화에 앞장섰다. 총 7회에 걸친 이 시리즈를 위해 정치, 사회부 기자 6명을 동원, 특별 취재반까지 구성해서 홍보에 열을 올렸다.
첫회 '장군은 누구인가'에서는 "...80년대 국가 지표로 민주정치의 토착화, 복지사회의 건설, 정의 사회 구현을 제시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 위원장은 역사적 분수령에 선 이 국가, 이 민족을 가장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목자이며, 과거의 모든 악폐와 구습을 일소하고 새로운 사회 개혁,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킬 견인차임을 국민은 알고 있다...
그렇다. 장군은 숨은 별이었다. 비록 그의 가슴에 그의 머리에 이 민족, 이 국가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이 이 겨레를 살리는 길인가를 위해 위대한 경륜과 포부를 쌓고 있었더라도 그가 바로 우리의 지도자요 목자임을 우리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나대니얼 호돈'의 '큰바위 얼굴'은 장군 - 바로 그 자신이었다..."고 하고 이것으로는 성이 안차서 그런지 곳곳에서 '男中男', '王中王' 등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두 번째 회 '포용의 바다'에서는 "...장군이 대구공업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학기말 시험때 교실에 들어 선 선생님은, '오늘 답안은 너희들이 책을 보든지 옆사람과 의논해서 하든지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신난다며 좋아했다. 이 날 시험지를 거둬 가지고 교실을 나서던 선생님은 갑자기 돌아서며 '오늘 시험을 치르면서 책도, 옆사람 것도 안보고 답안을 작성한 사람은 전두환 학생 한사람뿐이었다'고 말했다. 옳지 않은 일이면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로 하지 않는 장군의 곧은 성격이 약동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가 봐도 앞뒤가 맞지 않은 이 글은 기자의 어설픈 작문이 틀림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선생이 이른바 '오픈북' 시험을 허락하고서도 그렇지 않은 전두환만이 정직한 학생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선생이 학생을 기만했거나, 전두환 자신이 책을 보거나 옆사람과 의논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학생이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전두환 찬양하려다 욕먹인 꼴이다.
세 번째는 '화랑의 샛별'이란 제하로 게재됐다."...사심을 버린 타고난 지도자, 애국심과 리더십으로 한평생 군을 이끌어 온 견인차..." 내용은 이랬다.
네 번째 '황강의 새벽'에서는 "...장군의 고향인 내천 뒷산 용덕산과 이어져 하나의 지맥을 이룬다. 이 가운데 영봉 황매산의 정기를 타고날 인물이 세 사람 있다. 그 중 두 사람은 이미 태어났고 한 사람은 뒤에 태어날 것이다. 이미 태어난 두 사람은 조식 선생과 무학대사이다...어쨌든 장군은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이어 마지막 부분에서는 "<서울 신문>특별 취재반은 밤하늘 별빛을 받아 번쩍이는 황강의 물줄기를 끼고 참으로 험하고 먼길을 돌아 나오며 이렇게 기원했다. 조국이여, 이 겨레여, 장군과 함께 광영 있으라..."라고 적고 있다. 북한의 김정일 우상화와 비교해 전혀 손색없는 걸작(?)이다.
<서울 신문>은 이어 제 5회에서 전두환의 효성을 나열하고, 제 6회에서는 '백넘버 1'이라는 부제로 전장군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지도자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마지막회 '구국의 새아침'에서는 "...정직과 성실로 일관해 온 대통령,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구현해 온 대통령,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충성심으로 평생을 불살라 온 대통령, 그는 이제 앞으로 7년간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영도자로 우리 앞에 섰다..."고 적고 있다.
참으로 유치한 이런 일방적 아부는 다른 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향신문>은 '새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이란 기획물을 89년8월 19일부터 4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 연재 역시 "전대통령의 위기 대처 능력과 과단성 있는 국정 처리 능력은 평소 깊은 사색을 통해 미리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예견하고 현재의 상황에 대한 방책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자기희생을 철저하게 감수하고 오직 민족의 영광을 앞세워 역대 정권이 엄두도 못 낸 전대미문의 과감한 사회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새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더욱 다짐될 전대통령의 비장한 각오로 봐 앞으로 시행착오와 국운 퇴조는 절대로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중앙 일보> 역시 '합천에서 청와대까지'란 제목 하에 '전두환 대통령 - 어제와 오늘'이란 부제로 시리즈물로 연재했다.
첫회 '솔직하고 사심 없는 성품'이란 제목에서는 "...그는 공, 사간에 청교도적인 엄격함이 체질화되어 있는 사람이다...그는 사사로운 청탁이나 이권에는 철두철미 냉정하다..."라고 썼다. 전두환은 퇴임후 '5공비리' 라는 엄청난 비리와 부패의 인물임이 드러났다.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도 예외가 아니다. <동아 일보>는 80년 8월 29일, 3면 전면을 할애한 특집에서 "의협심 많은 청소년 시절"이란 제목 아래 "흰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연습...절검의 습관 길러..."등으로 전 장군을 찬양했다.
<조선 일보>는 80년 8월 23일자에서 '인간 전두환'이란 특집을 마련, 3면에 걸쳐 인간 전두환의 영웅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기사에서는 "...6.25가 발발하자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밤마다 목총을 들고 가 학교 교사 순찰을 돌았다. 담력도 센 학생이었지만 그는 당시 그만큼 동료를 사랑하고 학교를 아끼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자긍심에 불탄 학생이었다...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 생활 보다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생활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 것인 듯하다..."고 적는다.
돌지 않은 사람이라면 전시에 목총을 들고 아무도 없는 학교 순찰은 돌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대언론사라 자부하는 <조선 일보>의 자화상이다.
이밖에도 각 언론들은 '육사의 혼이 키워 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 - 인간 전두환', '우국충정 30년 - 군 생활을 통해 본 그의 인간과 새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 - 육사 입교에서 대장 전역까지' 등 전두환 찬양 시리즈를 내면서 '충성 경쟁'에 몰두했다.
'참군인' 전두환 만들기
또한 각 언론들은 전두환의 군 경력 미화하기에도 열심이었다.
김신조가 체포되었던 68년 1.21사태와 관련, <동아일보>는 "68년 1.21사태 때 더 큰 비극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던 숨은 공로자가 전대통령이었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당시 수경사 30대대장으로서 ... 부하들의 물음에 '청와대까지도 적이 들어올 수 있으므로 준비를 해야 한다고 전대통령은 대답했다"고 보도한다.
또 전두환이 1사단장 재직시 새벽 4시 보초 근무 중이던 하사가 우연히 발견한 땅굴 발견에 대해서도 "전대통령은 항상 무슨 결정을 내릴 때는 혼자 생각해서 처리하는 하향식이 아니라 부하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상향식을 택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보초 근무하던 하사가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전두환의 육사 입교에 대해 <조선 일보>는 '인간 전두환'이란 글에서 "그가 육사를 지명한 것은 적의 군화에 짓밟힌 나라를 위하는 길은 '내 한몸 나라에 던져 총칼을 들고 싸울 수밖에 없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적인 결단은 그를 군의 지도자가 아니라 온 국민의 지도자 상으로 클로즈업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2.12사건만 해도 그렇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쪽에 서면 개인 영달은 물론 위험부담이 전혀 없다는 걸 그도 잘 알았으리라. 이미 고인이 된 대통령의 억울함을 규명한다고 하여 누가 알아줄 리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배우고 익혀 온 양식으로선 참모총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높은 상관일지라도 국가원수의 시해에 직접, 간접적인 혐의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철저히 그 혐의가 규명되어야 바른 길이었다... 그의 이런 판단은 육사 선후배라는 사사로운 정리를 떠나 국가 장래를 내다보는 대승적 윤리관에서 내려진 결론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10.26사태 이후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위는 육사에서 익히고 오랜 군대 생활에서 다져진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행위라는 게 주위의 얘기다..." 라고 적고 있다.
8월 24일 <조선일보>는 또 '길 - 새로운 길잡이가 나타나는데 붙여'란 사설을 통해 "어떠한 국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군인만은 절대적인 중립을 지키고 오로지 군사적인 임무에만 전념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데는 분명히 사고와 의식의 맹점이 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의 원칙은 정치가 군으로 하여금 중립을 지킬 수 있도록 순리에 의하여 이루어져서 사회의 질서와 안정이 유지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군이 안보의 견지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며... 군이 진일보하여 나라의 강력한 구심체를 형성하고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 또한 이 나라에 있어서 현실을 사는 논리의 필연적 귀결인 것이었다"며 군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제하의 '전두환 어록'을 곁들였던 <한국일보>의 찬양 시리즈도 빠뜨릴 수 없다.
이 글은 "그는 초급장교 시절 레인저훈련을 받기 위해 도미, 유학 길에 올랐다.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군 청년 장교들은 미혼 장교 숙소에서 전쟁의 잿더미에 불과한 조국의 앞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그러나 전장군에게 있어 이 쓰라린 역경들은 오히려 견인 분발의 인내심, 물욕에 대한 초탈, 체질화된 서민 의식, 도덕적 겸허 주의, 남의 고통에 대한 연민 등의 덕성을 길러 낼 수 있는 토양이 되었음을... '양담배 한갑' 정도의 부조리도 참아 넘기지 못하고 바로 잡았던 원칙 장교로서의 용맹을 날렸다고 한다. 청년 장교의 우국의 울분 속에 이미 개혁과 숙정의 의지는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고 적었다. 참으로 낯간지러운 표현들이다.
<중앙 일보>는 서종철 전국방장관을 등장시켜 '내가 아는 전두환 장군'을 만들어 냈다. 여기에서는 "솔직 담백하고 청렴결백했던 전장군은 공사가 분명했다... 군에서 전장군은 자리를 옮겨도 흔히 말하는 자기 사람은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적고 있다.
<한국 일보>는 9월 2일자 '긍지와 정성의 군인 가정 - 이순자 여사를 통해 본 사생활의 면모' 제하의 기사에서 "이여사는 가계부와 씨름하는 군인의 아내들에게 식료품비, 교육비, 난방비 등을 예산대로 봉투에 딱딱 갈라 넣고 그 한도 내에서만 지출하면 적자를 줄일 수 있다는 '가계의 지혜'를 들려주기도 하고... 자신이 미용 기술을 배워 미장원을 열고 편물일 까지 하며 7,8년 모은 돈을 보태어 보광동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했을 때 그는 너무나 그 집이 소중해서 임신까지 한 몸으로 마당에 깔린 자갈까지 모두 물에 씻어서 깔아 놓았다고 한다..."고 적었다.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 너도나도 내가 먼저
또한 각 언론들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데 있어 평탄대로를 닦는 선봉이기도 했다.
신문들은 80년 8월 5일, 국보위의 전국 불량배 일제 소탕 방침 발표를 시작으로 전두환 국보위 상임 위원장을 1면에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각 신문들은 이후 앞다투어 '미국, 전두환 장군 지지', '전두환 장군 한국민 지지 획득', '미국, 전두환 장군 지지 결정했다', '미 조야가 보는 전두환 장군, 한국의 난국 헤쳐 나갈 새 지도자 등장', '전두환 장군을 새 지도자로', '활기에 넘치는 리더가 필요하다', '가장 잘 훈련. 조직된 군부 엘리트, 도덕성 성실성 높고 추진력 강해', '우리의 영도자는 귀를 크게 열어 하나님의 음성과 국민의 소리를 듣습니다 - 나라와 새 대통령을 위한 우리들의 기도', '국민 여망 집결 - 시대 맞는 정치 엘리트 주도', '새 역사 새 물결 새 결의에 법적 정통성 완비 - 식민지 교육 세대 퇴장에 따른 후속 조치 주목', '안정구축. 도덕정치 강력 추진 - 사회 개혁 국가창조 차원으로 이뤄져야' 따위의 기사가 연일 언론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중 <경향 일보>가 전두환의 전역 참관기라며 작가 강유일 씨를 통해 묘사한 내용은 실로 압권이다.
"......지장이며 용장으로 불리는 전위원장은 이제 국민의 지도자로서 전역식이 끝난 연병장을 돌아 나오며 나는 살아 역사하는 우리의 신이 우리 새지도자에게 풍성한 영적 분별력을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글쓴이가 자신의 글을 지금 읽는다 해도 참으로 낯간지러운 표현일 것이다.
지금 그들은 다 무엇하고 있을까? 사람이라면 펜을 접고 산중에서 속죄의 삶을 살지 않을까?
2001/05/14 오후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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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윤 기자는 두 아이의 아빠다. 언론사 기자와 국회의원 입법공보비서관을 거쳐 지금은 자유로운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