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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국어 대학교 태국어과의 이병도선생님의 글에서 발췌했습니다..
태국의 외교정책의 기본은 국가안보, 국가이익, 세계평화, 자유이다. 이러한 대외적 선전명분 속에서 태국외교를 실제적으로 재배해돈 가장 중요한 지도원칙으로는 국가의 독립유지라는 목표이다. 경제적 실리나 세계평화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국가안보와 연결된 정치적 자유의 확보라는 현실적 목표야말로 시대와 집권세력을 초월하여 태국 외교정책을 주도항 온 주요한 특색이 아닐 수 없다.
태국을 연구하는 외교관들이나 많은 학자들은 태국외교의 특성으로서 기회주의 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주의 성을 태국의 입장에서 보면 주변 강대국 세력 속에서 중립과 독립을 유지하려는 약소국의 현실성과 신축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과거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주 나타났던 것처럼 중요한 외교적 사태가 발생하면 태국인은 자신의 태도를 먼저 결정함이 없이 그 사태의 전개방향이나 결과를 냉정하게 주시하고 또 기다린다. 그런 후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승자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독립을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국외교의 특색은 마치 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갈대나 대나무가 바람이 부는 방향에 거슬리지 않고 그에 따라 순응하며, 그런 방법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흔히 비유되고 있다. 탁월한 현실성과 놀라운 신축성을 발휘하여 비교적 성공리에 독립을 지켜온 태국의 외교를 흔히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1. 근대 이전의 외교
근대 이전의 태국외교는 對중국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중국은 태국인 들에게 강대국의 위협이 어떠한 것이며 또 강대국과의 외교를 어떻게 수행해야 자국의 이익을 유지할 수 있느냐를 일깨워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13세기에 건설된 쑤코타이 왕국은 몽고족의 확장정책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강대국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때에 타이족은 중국이 제시한 정책인 일방적 우호관계 요구를 수락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험과 대외 자세가 태국외교산 최초의 경험적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쑤코타이 왕국은 對중국외교에 강대한 외부세력의 함을 처음부터 그대로 인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자국의 정치적, 군사적 발전을 도모한다는 현실적 실리성이 중요한 지도원칙의 하나가 되었다. 이 원칙은 중국에 대해서는 그 종주권을 인정하여 아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가면서 주변 영토에 대해서는 중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적극적으로 확장하여 갔다.
쑤코타이 왕국의 랑캄행 대왕은 인근 여러 나라들과는 형제지국이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우호관계를 유지한 반면 중국 강대세력에게는 종속의 지위를 스스로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3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중국(원)에 조공사절단을 파견하여 종주국의 예우 속에서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고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교역을 통한 문물교류에도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현실적 자세가 효력을 나타내어 람캄행대 왕은 몽고제국으로부터 각별한 지지를 받아서 오히려 자신의 영토확장을 위해 몽고의 세력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또한 랑캄행 대왕은 중국의 세력을 인정하고, 중국에 대하여 우호적이고 복종적 입장을 취했으며, 몽고 또한 그 당시 동남아에서 최대 강국이었던 크메르 제국을 약화시키는 수단으로서 정책적으로 쑤코타이 왕국을 강화시키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은 태국엣 크게 도움이 되었다.
쑤코타이 시대 이후에도 태국이 역대 왕조들은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륙에서 왕조가 바뀔 때마다 사절단을 파견할 정도였다. 이 사저단도 처음에 정치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점차로 무역으로서의 성격이 높아져 갔다. 조공사절단 파견은 아유타야 시대에 30회 가량에 달했으나 랏따나꼬씬 왕조(현 방콕왕조 혹은 짝끄리왕조)의 4대왕인 몽끗 왕(라마 4세)에 이르러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매하고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중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이에 중국이 강대세력이 못된다는 계산 하에 태국 스스로 조공 사절단의 파견을 중지하였다.
쑤코타이 왕국이 쇠퇴해지면서 1350년 아유타야 왕국이 들어서자 이 때에도 국왕들은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능숙한 외교로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우호적 관계를 지속하여 북으로는 쑤코타이 지역으로부터 서남쪽으로는 벵갈만 그리고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에까지 세력을 뻗치는 강력한 왕국을 확립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중국 이외에 서양과의 교섭이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대상은 주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로서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외교적, 종교적인 문제로 이루어졌다. 태국이 서구와 최초의 교섭을 가진 해는 1512년으로 이때 포르투갈이 말라카로부터 아유타야에 사절을 보냄으로써 그 접촉이 이루어졌는데 아유타야에서는 완전한 통상의 자유와 교회까지 세우도록 허용하였다. 그 후 약 1세기 후에 네덜란드와 그리고 위이어 영국인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의 영향력이 태국정치에 광범위하게 미치자 네덜란드와 아유타야 왕국간의 관계에 갈등이 발생하였고, 1657년에 등극한 나라이(Narai)왕이 네덜란드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태국진출을 지원하였으며, 네덜란드와 분쟁이 생겼을 경우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약을 체결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당시 영국의 이해가 태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통상상의 양보에 한정되고 있어서 협상이 되지 않자 나라이 왕은 방향을 바꾸어 영국대신 프랑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정책을 썼다.
나라이 왕은 프랑스에게 교역과 선교활동에 있어서 특권을 부여했으며, 1685년에는 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프랑스 고문관을 받아들였다. 이 결과 그 후 3년 동안 프랑스인들은 태국에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영국의 선박에서 선실보이 노릇을 했던 그리이스인 콘스탄틴 훨컨(Constantine Phaulkon)이라는 사람이 당시 태국의 대외무역을 전담하는 「짜오프라야 프랑클랑」 지위에까지 올랐다.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함께 그는 태국을 가톨릭화하고, 프랑스 군대를 태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외국의 개입을 두려워한 태국인 프라펫라차는 1688년에 나라이 왕이 사망한 틈을 타서 궁정혁명을 일으켜 훨컨을 죽였으며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들을 추방하였다. 이러한 훨컨 사건을 계기로 태국은 모든 유럽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종의 쇄국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랏따나꼬씬 왕조의 2대왕 때 이르러서야 교섭이 재개된다.
아유타야 시대의 對 서양과의 교섭에 있어서도 태국의 외교교섭의 일면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어느 강한 외부 세력 한 나라에 의존하지 않는 항상 균형된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후 랏따나꼬씬 왕조의 외교정책과 유사한 점을 보이고 있다.
2. 랏따나꼬씬 왕조와 對 영․불 외교
태국의 현 왕조인 랏따나꼬씬 왕조는 약400년간 계속된 아유타야 왕국이 1767년에 미얀마에 의해서 멸망한 후 15년간으 톤부리시대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에 의해서 창건된 후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아유타야 왕국 시대부터 서양과 교섭을 시작해 온 태국은 현 왕조의 라마 2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제국과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1826년 영국과 버니(Burnay)조약을 체결하여 서양국가와 평등한 루호통상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태국은 서구 세력의 팽창이라는 시대적 배경하에서 어쩔 수 없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아시아의 최강국인 중국은 아편전쟁엣 영국에 패하였고,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었으며, 또한 영국과 프랑스는 태국을 사이에 두고 식민지 확장을 위한 강력한 팽창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태국의 외교정책은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태국에 경제적인 관심을 계속 보여 온 영국은 절대적인 무역의 우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조약체결을 원하게 되었고 그 결과 태국은 정치적, 경제적 열세를 감수해야 하는 바우링(Bowring)조약을 영국과 1855년에 체결하였다. 태국은 바우링 조약의 체결로 정치, 경제에서 열세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 조약은 뒤이어 체결된 서양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에 전례를 만들게 되었다.
서양 및 국제정세에 이해가 깊은 라마 4세의 즉위는 태국으로 하여금 불평등한 관계의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호의적인 태도로 조약에 임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조약의 체결은 강제성을 띤 무력행사에 의하지 않은 표면상으로 자발적인 문호개방을 가능케 하였다. 영국 정부는 태국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태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조약을 수정하여 태국의 열세를 더욱 심화시켰다.
1860년대에 이르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세력을 떨치고 있던 프랑스의 위협이 점차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에 희생되는 주변지역을 목격하면서 태국은 프랑스의 세력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의 세력균형적 중립보다는 영국에 기울어졌다. 처음에 영국은 태국의 중요성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93년에 태국 영토의 일부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영국의 개입으로 인도차이나에서의 태국의 지위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였다. 이 합의는 태국의 독립에 대한 공식승인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태국은 더 나아가 1897년에 영국과 비밀조약을 맺어 독립에 대한 확고한 지원을 다짐받은 바 있었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프랑스의 팽창이 계속되어 베트남을 장악하고 1867년에는 태국의 속국이었던 캄보디아와 태국령인 6개 섬을 차지 하였다. 그러나 팽창정책이 계속되자 태국은 1886년, 1893년, 1904년 그리고 1907년 등 4차례에 걸쳐 동부와 동남부 등의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태국은 자신의 속국과 영토의 일부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정치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태국외교의 툭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사항으로는 이러한 일부 영토의 표기와 그 대가에 의한 독립유지가 비록 실제적으로는 강제적 상황에 의한 것이었지만, 외형상으로는 시종일관 태국의 자의에 의한 것이라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바로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그러나 강대국 세력의 압력 속에서의 약소국의 수동적 순응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태국외교의 전형적 특징의 하나로 지적되는 ‘대나무 외교’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3. 제 1 차 세계대전 중의 외교
19세기 말엽에 거듭되어 온 독립상실의 위기를 모면하면서 태국은 보다 많은 새로운 강대국과 우호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는데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이 그 대상 국가들이었다. 특히 1차대전의 발발은 태국에게 그들의 새로운 국제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주었다. 이 때는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에 오래 시달리던 라마 5세가 승하하고, 그 아들 라마 6세(와치라웃)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여 1910년 이후 태국을 통치하고 있을 때였다.
와치라웃 왕이 즉위하자 그는 선왕의 뒤를 이어 태국인의 근대화에 주력하였다. 보이스카웃을 창단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켜 국민들을 계몽하였으며, 당시 태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국인을 “동양의 유태인”이라고 비난하며 탄압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선왕대에 맺어진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국제사회에서 타국과 대등한 입장에 서려고 노력하였다.
제 1 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태국은 처음에 중립을 견지하였다. 왕 자신이 영국에서 교육을 받아 영국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독일에 유학한 고급장교나 왕자들 중심의 친 독일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또 영국과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과의 불편한 과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이 태국의 철도개발에 직접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측에 기울지 않고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고 선전포고를 하자 연합국측의 승리가 명백해졌다. 이에 태국은 1917년 7월 22일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이어 1918년 4월에는 약 1,000명의 군대를 프랑스에 파병하였다. 그 결과 태국은 연합국측의 일원이 되어 승전진영의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도 태국외교의 탁월한 순응성 및 유연성을 엿볼 수 있다. 태국이 연합국측에 가담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첫째, 서양의 강대국으로부터 승전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리품 분배문제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게 되고, 특히 태국의 독립유지라는 태국외교의 지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태국은 베르사이유 평화회의에서 승전국의 일원으로 발언하고 국제연맹의 창설국가가 되었다.
둘째,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다른 서구 국가와 과거에 맺은 불평등조약을 바로 잡고자 했던 점이다. 베르사이유회의 내에서 태국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법적으로도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세계 열강에게 인식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미국과의 조약의 수정을 약속 받기에 이르렀다.
1920년 12월 태국과 미국은 새로운 우호통상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으로 미국은 오랫동안 태국에서 누려온 치외법권을 포기하고 경제적 권리의 수정에 동의하는 등 태국과의 완전한 평등을 인정하였따. 이러한 미국의 양보는 태국인들에게 친미적 성향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다른 유럽국가들과의 교섭은 순탄치 않았다. 이에 태국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사위인 세이어(Francis B. Sayre)박사를 외교고문으로 임명하여 유럽을 방문케 하는 등 설득외교를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26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할 수 있게 되어 태국은 명실 상부한 주권국가의 면모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와치라웃 왕의 외교는 태국외교의 특질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태국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분명해질 때까지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고 정세를 냉정히 관망하는 ‘기다리는 외교’를 전개하는 것이다. 강대세력 속의 한 약소국이 취할 수 있는 생존전략으로서의 외교정책의 전형이 어떤 것인가를 태국외교는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태국외교는 대체로 강한 나라에게는 순종의 태도를 취하고 주변의 약한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책을 고수 하면서 실리를 취해 왔다. 이러한 예는 태국이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망하자 중국을 외면하고 승자인 영국편에 가담, 의존하였으며, 후술하겠지만 2차대전 중에는 아시아의 강자인 일본에게,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에 의지한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4. 제 2 차 세계대전 중의 전시 외교
유럽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태국은 여러 면에서 국내외적으로 변화가 있었다. 우선 1932년 무혈혁명으로 인하여 절대왕정이 붕괴되고 그 대신 서양 선진국가에서 교육받은 젊은 엘리트들이 중심이 되어 입헌군주체제의 민주주의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방상이었던 피분쏭크람 원수가 1938년에 수상이 되자 혁명 후의 태국정치는 민주주의 라기 보다는 군부 중심의 극단적 민족주의 조류에 휩쓸리게 되었다.
1930년경에는 ‘랏타나욤’ 정책을 표방하는 ‘범태국운동(Pan Thaism)’이 국내에서 전개되어 태국인의 영광과 긍지를 고취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국내적으로 화교의 활동을 제한하고 과거에 영국과 프랑스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여 쑤코타이 시대와 같은 전성시대를 꿈꾸었다 그리고 인도타이나 반도에서 태국어를 구사하는 모든 종족으로 구성된 거대한 태국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 등 국내의 소수민족들도 태국인화 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야심은 1939년에 피분쏭크람 정부가 국호를 싸얌(Siam)에서 타이랜드(Thailand)로 바꾼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태국에서 피분이 이러한 국수적인 정책을 추구한 데에는 일본의 ‘아시안을 위한 아시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라는 구호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태국은 1차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표방하고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그러면서도 전쟁에 대비하여 1940년에는 영국, 프랑스, 일본과 상호불가침조약을 맺기도 하였다. 1941년 여름 일본이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태국은 새로운 위협세력을 등장한 일본을 경계하여 신흥강국인 미국과 영국에게 무기의 제공 등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필리핀 방어에 급급하였으며 영국은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에 무기를 공급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은 사전통고도 없이 싸얌만(현재의 타이만)에 들어와 태국주재 일본대사를 통해 미얀마와 말레이반도로 진격하는 통로를 제공하라고 통첩하였다. 그러면서 태국이 일본에 협조하면 과거에 태국이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강압에 의해서 상실한 영토를 회복시켜주겠다고 제의하였다. 태국은 이러한 일본의 요구와 제안에 순응하였다. 그 배경으로는 첫째 피분쏭크람 수상이 일본의 승리를 믿고 있었으며, 둘째 과거에 태국이 영국과 프랑스에게 할애한 영토를 일본이 찾아주겠다고 한 약속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태도를 바꾼 태국은 1941년 12월 21일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고 1942년 1월 25일 미국과 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2차대전 중의 대외관계를 검토함에 있어서 태국외교의 이중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피분쏭크람은 당시 친일 외교파의 중심이었고, 라마 8세의 섭정으로 활약하고 있던 쁘리디가 대 연합국 외교파의 중심이었다. 피분이 일본 군대를 받아들였을 때 당시 재무상이었던 쁘리디는 각료직을 사임하고 왕의 섭정직에 임명받아 반일세력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쁘리디는 국내 반일세력을 지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내의 태국인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반일 운동인 ‘자유타이 운동(Free Thai Movement)’과 관련을 맺어 연합국의 인도차이나 지역내의 활동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쁘리디 중심의 자유타이운동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 태국을 패전국이 아닌 승전국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42년에 피분 쏭크람이 “이 전쟁에서 어느 편이 패배하리라고 생각하느냐? 패배하는 쪽이 바로 우리의 적이다.”라고 한 말을 보면 어떻게 하여 쁘리디가 피분 쏭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된다.
5. 제2차 세계대전 이후 - 현재까지의 외교
1944년 7월 일본의 패색이 짙어 완연해지자 피분 쏭크람 수상이 사임하고 대신 중도파의 거두인 쿠엉 아파이윙이 수상이 되어 전후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로써 태국은 또 다시 전승국의 입장에 서서 독립을 보존할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쁘리디는 그 다음날부터 2차대전 중에 처했던 태국의 입장을 연합국 측에 해명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쁘리디는 주장하기를 1942년의 對영국돠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한 위헌적 행동이며, 따라서 그 선전포고는 무효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1943년에 일본으로부터 얻어낸 영토를 모두 반환하겠으며 국호도 다시 싸얌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어 2차대전 중에 주미대사였던 쎄니 쁘라못이 귀국하여 수상에 취임하고 쁘리디와 함께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협상을 개시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태국의 양보, 미국의 협조, 그리고 소련과 중국과의 타협에 성공함으로써 태국은 1946년 12월에 이르러 패전국인 독일이나 일본과는 달리 승전국의 일원으로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태국 내에서도 쁘리디와 쎄니가 중심이 된 진보주의적 민간세력이 민족주의 및 군국주의를 대신하게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영국에서 새로운 강대국인 미국으로 방향을 돌려 주로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1946년 5월에 아난타마히돈 왕(라마 8세)이 암살 당하자 태국은 극단적 보수세력인 군부가 집권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태국의 주변정세도 매우 혼란하였는데 즉 미얀마, 말레이, 북베트남 등 인도차이나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공산세력의 위협이 현실적으로 증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내외정세의 영향을 받아 1948년에 재집권한 피분쏭크람 정권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세력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이 고조되자 태국은 직접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반공전선에 적극 참여하여 친 서방 진영임을 과시하였다. 1954년에는 동남아조약기구(SEATO)에 가입하고 그 본부를 방콕에 설치하는 등 미국과의 밀월관계가 계속되었다.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도 공산세력의 팽창을 동남아에서 봉쇄하고 또 그 중심지로 태국이 필요했기 때문에 태국에 대하여 막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를 제공하였다.
1957년 10월 싸릿이 무혈혁명에 성공하고 그의 뒤를 이어 1963년에는 타넘 끼따카썬이 수상이 되었다. 이 두 사람도 친 서방 외교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자 태국의 외교는 변화하는 주변정세에 적응하면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과 중국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인 태국은 강대국의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하여 1967년 8월에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와 함께 지역협력기구인 동남아국가연합(ASEAN)을 창설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1966년 6월 14일 아스팍(ASPAC) 1차 회의에서 당시 태국의 타맛 커만(Thanat Koman) 외무장관은 “태국은 反중국도, 反소련도, 反북한도, 反북베트남도 아니다. 우리는 어느 나라와도 적대관계에 있지 않다.”고 말하여 중립노선의 의사를 확고히 한 바 있으며, 1969년 2월에도 평화를 위한다면 중국과 협상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3월에 타낫은 “이제 우리는 미국이 장래에도 계속해서 원조해 줄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획이 있어야 한다. 중국은 강대한 나라이고 고립주의 정책을 추구한다. 우리는 중국을 고립시키는 것보다 평화적인 공존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1969년의 닉슨 독트린과 1972년의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1973년 10월 14일 혁명으로 들어선 민간정부는 중국과의 개방정책을 추구하게 되었다. 1975년 3월 큭릿 쁘라못 수상은 태국에 호의를 갖고 있는 모든 국가와는 정치적 이념이나 정부체제 등을 초월하여 우호관계를 맺을 것이며, 중국과의 정산관계를 위해서 일년 내에 미군을 태국으로부터 철수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였으며, 실제로 태국은 1975년 7월 1일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개설하기에 이르렀으며, 동시에 동남아조약기구(SEATO) 해체에 참여하였다.
1970년대 후반기에 태국은 1941~42년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사태에 처하고 있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고 아시아에서 손을 뗀 상황에서 최대한으로 인근 주변의 공산주의 세력과도 교섭하여 스스로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는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다. 특히 1979년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은 아세안 국가 특히 태국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따라서 캄보디아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베트남세력 확장을 저지하는 완충지역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태국은 그들의 완충지역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베트남에게 캄보디아의 완전철수를 강요함으로써 완충지역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태국은 인도차이나 문제에 있어서 그 동안 아세안 각국을 캄보디아 문제에 통일된 입장으로 유도하는 일에 외교정책의 기조를 두어 왔고 베트남에 대하여 스스로 영향력 있는 입지를 가지고 다른 아세안국가들이 행했던 것보다 더욱 깊이 국가안보에 대처하였으며 그 결과 더욱 문제해결에 의지를 보여왔다.
정치이데올로기나 이념에 집착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실리주의에 입각한 태국외교는 1980년대 이후 다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베트남 군대가 크메르에서 철수할 것을 동의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여 인도차이나반도의 평화유지에 노력하였고, 미얀마, 라오스, 크메르, 베트남 등의 인도차이나 국가와 평화공존체제를 끊임없이 모색하는데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자 태국은 개방정책을 더욱 확대하여 이념과 정치체제가 다른 나라들과의 대화의 통로를 확대하여 이념과 정치체제가 다른 나라들과의 대화의 통로를 확대하고 기능적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외교정책을 수행해왔다. 1988년에 찻차이 수상이 “현재 국제 정치적 상황은 국제관계에 있어 상호 독립적, 불간섭 방향으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중대한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자국의 미래와 운명을 위해서는 약화되어 있는 현재 태국외교정책의 일면을 경제 우선주의로 전환하여 국제정치면에서 점짐적인 완화를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태국외교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이 태국외교의 최고 목표는 어느 시대,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독립의 유지에 있었으며, 이를 성취하기 위한 현실성과 신축성, 그리고 변화하는 주변 상황에의 적응성이 태국외교의 주요한 특성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그 유연함과 실용주의적 외교노선을 오랫동안 잘 지켜와 주위의 강대국들이 부침할 때마다 열강들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고 이들과 협력하거나 때로는 변화하는 세력균형을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왕국을 보전하고 국가의 실리를 도모해왔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