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人과 學人의 경계를 넘나드는 「노력하는 돌머리 天才」 ●서태지 못지않은 인기 구가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에듀테이너(Edutainer) ●중고교 시절 술, 담배, 여자, 당구 등에서 마지막 빠진 곳은 바로 학문 ●氣철학 원리 완성해 인류의 보편적 자산 만들려는 야심찬 도올의 인생 설계 ●우리나라 최고의 학술분야 베스트셀러 작가 - 지금까지 낸 저서 36권, 약 100만 부 팔려 ●그의 끊임없는 호기심은 어린애 같은 순수함에서 나온다 [도올 金容沃 약력] 1948년 충남 천안 태생. 고려대 생물과, 한 국신학대학, 고려대 철학과 졸업. 국립대만 대학 철학과 석사 . 일본 동경대학 중국철 학과 석사. 하버드대학 철학박사. 고려대 철학과 교수.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교수. 용인대 무도대학 유도학과 교수. 중앙대 의과대학 한의학 담당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 원 강사. 미국 뉴잉글랜드 복잡계연구소 철 학분과 위원장 역임. EBS 「알기쉬운 동양 고전 노자와 21세기」 (1999년). 현재 KBS 「도올의 논어이야기」 강의 진행, 도올서 원 강주 李濟 月刊朝鮮 기자 (now@chosun.com) ------------------------------------------------------------------- 주요내용(목차) 도올 마니아들 돌머리라는 의미-도올 효심 갸륵한 괴짜 도올 은사 권도원과 金忠烈과의 운명적 만남 하얗고 아름다운 선배 崔玲愛와의 만남 포마드 바른 머리와 두루마기 한복 / 돌머리의 천재성 교수보다 藝人이 더 적성 철저한 프로근성으로 노력의 代價 챙긴다 배울 때는 대상 가리지 않는다 노골적 감정표출로 反感 유발 도올과 언론, 그 애증의 관계 / 김용옥의 슬럼프와 재기 得天下英才而敎育之 / 학자인가 엔터테이너인가 도올 마니아들 ...... 『자리가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의자가 없으신 분들은 바닥에 앉으시거나 서서 들으셔도 괜찮습니다』 2000년 12월26일 오후 4시 KBS 본관 제3 스튜디오. 꽤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올의 논어 이야기」 녹화현장은 스튜디오를 꽉 메운 청중들이 내뿜는 열기로 후끈거렸다. 녹화 시작 두세 시간 전부터 스튜디오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날 모인 방청객은 약 400여 명. 자리가 없어 방청객 몇 명이 돌아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엄마 손을 잡고 온 초등학생에서 백발이 성성한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방청객의 신분도 가지각색이다. 서로 낯이 익은 듯 가벼운 눈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EBS 「노자와 21세기」부터 방송 스튜디오에서 도올 金容沃(김용옥)의 강의를 빼놓지 않고 듣고 있는 「도올 마니아」들이었다. 이 프로를 담당하고 있는 吳康善(오강선) PD 는 『매번 강의 때마다 녹화현장을 찾는 골수 도올 팬들만 40명이 넘는다』고 했다. 吳PD의 말. 『11월28일 전남대학교 강의 때에는 녹화시작 5시간 전인 오전 9시부터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더군요. 그것을 보고 학자도 서태지나 HOT 못지 않은 인기를 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희를 넘긴 朴佑瀅(박우형?76)씨는 『처음부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도올의 논어 이야기를 방청하고 있다』며 『이렇게 교육적이고 유익한 프로는 일반인은 물론 정치인 등 지도층들이 꼭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엄마, 동생과 함께 스튜디오를 찾은 정한울 (서울 우장 초등학교 5학년) 군은 『도올 선생님 강의를 직접 듣고 싶어 영어학원 수업도 빼먹고 찾아왔다』며 『훗날 그 분의 훌륭한 제자가 되고 싶다』며 밝게 웃었다. 녹화가 시작되기 전 PD 한 명이 무대에 올라와 방청객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리겠다 』고 했다. 도올 선생 입장시 뜨거운 박수로 맞아달라는 것이었다. 녹화 시작 사인 이 내려지자 스튜디오 입구 쪽에서 예의 두루마기 한복을 휘날리며 도올이 입장했다.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방청객들은 그동안 TV를 통해서만 본 도올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게 신기한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계속해서 손뼉을 쳐댔다. 방 청객에게 90도로 깍듯하게 절을 한 도올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쩌렁쩌렁 울리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스튜디오가 삽시간에 대학강의실로 바뀐 듯했다. 도올은 지 난 주 초청강사로 나온 유학시절 친구인 구로즈미 마코토 도쿄대 교수의 강연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 방송을 보고 한 분이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왜 한국과 일본이 저렇게 다른지에 대한 의문이 싹 풀렸다 그러더군요. 정말 명강의였어요』 (웃음) 본격적으로 강의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도올의 목소리 톤은 높아져 갔다. 더운 듯 연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리며 열변을 토하는 도올의 모습은 신들린 사람 그 자체였다. 이 날도 그는 동양사상의 위대성을 강조했다. 『우리 동양에는 사람 못지않게 세상 만물 모두를 소중히 여기는 귀한 마음씨가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인권이 있다면 여기 이 책상에도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20세기가 인권만을 추구한 시대였다면 21세기에는 바로 물권, 이 물권을 회복해야 합니다』 강의 중간중간 방청객들은 그의 열변에 환호성과 박수로 호응해 줬다. 돌머리라는 의미-도올 ...... 도올 김용옥의 대중적 인기는 이제 신드롬 수준이다. 1999년 11월22일 EBS 「알기 쉬운 동양고전-노자와 21세기」가 첫 방송을 타면서 서서히 번지기 시작한 도올 신드롬은 2000년 10월13일부터 방송되고 있는 KBS 「도올의 논어 이야기」로 절정에 이른 듯하다. 그의 강의 모습을 흉내낸 코미디 프로까지 등장했다. 현재 「도올의 논어 이야기」의 평균 시청률은 12~15% 선. KBS의 대표적 교양프로그램인 「일요스페셜」과 「역사스페셜」의 평균 시청률이 5~10% 정도임을 감안하면 「도올의 논어 이야기」 의 위력을 실감케 된다. 이제 도올 김용옥을 모르고서는 21세기 한국의 사회문화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웬만한 드라마나 쇼보다 더 재미있는 지적인 쇼(Intellectual Show)로 사람들을 열광케 하는 김용옥은 누구인가. 그의 호는 원래 孟子(맹자)에 나오는 역사책 이름이다. 노나라에 춘추가 있었듯이 초 나라에는 도올이 있었다. 이 낱말은 다듬어지지 않은, 그래서 모든 가능성이 내포된 통나무를 뜻한다. 또 전설 속에서는 사나운 맹수 이름으로도 쓰이고 옛날 황제의 고집 불통 아들 이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 용옥은 어려서부터 「돌대가리」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도올=돌」의 음을 취하여 호를 삼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도올의 집안은 충남 천안에서 보기 드문 명문 수재집안으로 통한다. 도올은 故 金致洙(김치수)씨와 洪喜男(홍희남?91) 씨 사이에 막내로 태어났다. 천안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던 아버지 덕 택에 도올의 어린 시절은 유복한 편이었다. 도올 위로 형 세 명, 누나 두 명이 있다. 장형 金容駿(김용준?74 )씨를 비롯, 용균씨, 용환씨 누나 숙희씨, 용주씨 등이다. 6남매 중 박사학위 소지자는 도올을 포함해 4명이다. 도올 자신은 형제와 조카들로 인해 KS(경기고?서울대)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소연하곤 했다. 그렇다면 형제 중 KS 출신은 몇 명일까. 그의 장형 金容駿 박사는 경기고,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했고 미 텍사스 A&M 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 후 1965년부터 고려대 화공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김교수는 1991년 정년 퇴임 후 현재까지 수원대 화공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둘째형 김용균씨는 보성고, 전남대 의대를 나온 후 개업의로 활동했고 현재 한남대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셋째형 용환씨는 경기고, 가톨릭대에서 학사, 석?박사 학위를 취득 후 가톨릭대, 조선대, 순천향대 피부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개업의로 활동하고 있다.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1993년 12월~1995년 5월)했던 누이 金淑喜(김숙희?64)씨는 이화여고, 이화여대 졸업 후, 텍사스 여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1965년부터 1993년까지 이대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YWCA 연합회 회장이며 세계영양학회 부회장직도 맡고 있다. 김용주씨는 정신여고, 이대를 나왔고 현재 가정주부다. 도올의 형제 중 이른바 KS마크 소지자는 金容駿 교수 한 명뿐이다. 효심 갸륵한 괴짜 도올 ....... 도올은 천안 제3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상경한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다. 배재중학교, 서울사대부중 입학시험에 연달아 낙방하고 보성중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당시 서울 돈암동에 살던 형 金容駿 교수 집에서 살면서 보성 중?고등학교를 다 녔다. 도올과 맏형 金容駿 교수와의 나이 차는 무려 21년. 오히려 도올은 자기의 조 카들과 형제처럼 지낸다. 실제로 장조카인 金哲載(김철재?53)씨는 도올과 동갑이다. 도올의 조카(김용준 교수 자녀에 국한) 중 金哲載씨와 金隣中(김인중?49?숭실대 사학과 교수) 가 경기고 서울대 출신인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도올을 그토록 주눅들게 만든 빛나는 KS 소유자는 조카까지 포함해 3명인 셈이다. 金容駿 교수는 어린 시절 도올이 여느 아이들과 같이 평범했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끝까지 물고 늘어져 결국 해내고 마는 강한 집착력을 보였다고 한다. 다소 반항기도 있었고 엉뚱한 짓도 곧잘 했다고 한다. 『어려서도 그렇게 고분고분하진 않았어요 . 자기 고집도 있는 편이었죠. 청소년 시절부터 괴짜기질이 엿보이기 시작했죠. 대학 다닐 때 어느 날 홀연히 며칠 동안 잠적하더니 갑자기 가사를 입고 나타나 온 가족을 놀라게 한 적도 있습니다』 도올 자신이 말하는 어린 시절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머리는 좋지 않았으나 탐구력이 강했다. 그리고 매우 섬세한 감성과 탁월한 손재주의 소유자였다. 나는 홀로 있기를 좋아했으며 작은 일에 아픔을 감지하는 일이 많아 눈물이 특히 많았다. 지나가다가도 풀 한 포기가 이상하게 눈에 띄면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쭈그리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몰랐고 혼자 어두운 골방에 하루 종일 앉아 생각하면서 배고픈 줄을 몰랐다』 도올의 중?고교 시절은 결코 모범생의 세월이 아니었다. 말이 고교생이지 노는 것은 성인 뺨치는 수준이었다. 술, 담배, 여자 , 당구 등 그(도올)의 표현대로 타락된 유희란 유희는 다 하면서 보냈다. 싸움도 곧 잘 했다(도올은 태권도 공인 3단이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부모는 매우 엄격한 가정교육을 시켰다. 특히 도올의 어머니는 자녀교육에 대단히 엄격한 편이었다고 한다. 이화여고 출신의 개화여성인 洪여사는 자녀들이 잘못하면 가차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막내 도올도 예외일 수 없었다. 김용준 교수는 『가족 중 도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어머니 홍희남 여사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홍희남 여사에 대한 김용옥의 생각은 애틋하다. 도올은 대입 면접 때 면접관이 감명깊게 읽은 위인전이 무엇인가 묻자 서슴지 않고 『내가 읽은 가장 위대한 위인전은 엄마 의 삶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위인도 나의 엄마』라고 말했다. 도올은 또 저서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한없이 온유하고 순종하면서도 李朝(이조) 여인이 가졌던 특유의 강인함과 적극성, 그리고 원대한 사고의 스케일을 가졌던 여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고려대 교수시절 대학특강 「여자란 무엇인가」에 어머니 홍희남 여사를 직접 초빙강사로 모셨고 교육방송 「노자와 21세기」에도 洪여사를 등장시켰다. 은사 권도원과 金忠烈과의 운명적 만남 .... 도올 김용옥과 동양철학과의 조우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대학입시 제도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도올은 1965년 서울대 농대 농생물학과에 지원하지만 결국 취약과목인 수학에서 빵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 낙방한다. 대신 고려대 생물학과에 2차로 합격하게 된다. 그 자신도 『서울대 농대에 합격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며 『그것은 인류를 위하여 불행한 합격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고려대 생물과 진학 후 관절염을 심하게 앓게 되면서 학업을 포기하게 된다. 1년 반 병원 입원실 신세를 지는 동안 도올에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난 것. 그는 『온몸의 관절이 띵띵 부어 올라 一村(일촌)의 기동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순간도 잊어버릴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의 煉獄(연옥) 속에서 이 우주를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세상 보 는 눈이 좀 더 성숙해진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 1967년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간다. 그 곳에서 소홍렬 교수, 안병무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신학과 철학에 대한 학문적 맛을 보게 된다. 1967년 2학기 소홍렬 교수로부터 철학개론을 들으면서 다시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신학대학을 박차고 나와 고대 철학과에 편입한다. 이러한 학문적 구도 과정 중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氣哲學(기철학)에 대한 관심도 바로 이 사건을 통해 일어나게 된다. 1967년 한의사 권도원(80?제선한의원 원장)씨와의 만남이 그 것이다. 권씨의 침치료를 받으면서 그를 지겹게 괴롭히던 관절염이 호전되기 시작한다 . 그는 권도원 박사가 개발한 침의 원리적 체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한의학을 통해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을 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고대 철학과 입학 후 도올은 金忠烈(70?중국철학)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동양학 연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게 된다. 바로 金忠烈 교수의 老子 강의 덕분이었다. 김충렬 교수의 老子강의 세 번째 시간에 도올은 동양 철학의 사유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수 있는 예지라고 믿게 되면서 자신의 일생을 이 학문을 연구하는데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의 맹렬한 공부는 이때부터 불붙었다. 그러면서 김충렬 교수의 연구실을 찾는 횟수가 잦아졌다. 어느 날 도올이 김교수에게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김교수는 中庸(중용)을 권했다. 김용옥은 中庸을 철저히 독파한 뒤 읽은 소감을 보고서로 작성 해 왔다. 이때 김교수가 물었다. 『가장 감명깊은 대목이 어디였느냐』 『제26장이었습니다』 중용 제26장은 하늘과 땅의 위대함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담긴 부분이었다. 『어땠느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동양철학 할 자격이 있다』
하얗고 아름다운 선배 崔玲愛와의 만남
1972년 도올은 기나긴 유학 대장정에 오른다. 그 당시 고대 철학과 석사과정에 있던 도올은 김충렬 교수의 소개장을 들고 국립 대만대 方東美(방동미?1977년 작고)교수를 찾아간다. 동양철학의 대가 方東美 교수는 김충렬 교수의 은사이기도 하다. 74년 6월 도올은 대만대 철학연구소 석사과정을 1등으로 졸업, 석사학위를 받는다. 논문제목은 「老子 自然哲學 중 無爲之功能」. 그는 대만대 재학 시절 인생의 또다른 전환점을 맞게 된다. 부인 崔玲愛(최영애?55? 연세대 중어중문학) 교수를 만난 것이다. 도올은 崔교수를 처음 본 순간 바로 이 여자가 나의 평생 반려자가 되리라는 느낌이 왔다고 한다. 당시 중국어 음성학 박사과정에 있던 崔교수는 대만에 도올보다 4년 먼저 와 있었기에 모든 게 낯선 도올에게 친절한 안내자가 될 수 있었다. 도올은 당시 崔교수는 너무도 발랄한, 하얗고 아름다운 선배였다고 회상한다. 둘은 처음 만난 후 3개월만에 결혼에 골인하게 되고 대만에서 신혼살림을 차린다. 崔교수는 1946년 生으로 도올보다 2년 연상이다. 이들은 중국이라는 공통화제를 놓고 평생 같은 길을 가는 同志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지적 결합은 CK(최영애-김용옥) system이라는 독창적인 중국어일본어 한글표기법을 만들어 내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또 崔 교수는 EBS 「노자와 21세기」에 초청강사로 출연, 중국 갑골문자를 강의해 내조를 과시하기도 했다. 崔교수는 자기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전형적인 한국형 賢母良妻(현모양처)라는 게 주위 사람들의 일관된 평이다. 이들 부부를 잘 아는 사람들은 崔교수 같은 여성이야말로 김용옥씨에게 적격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영애 교수의 이런 면이 잘 나타난 일화 하나. 원광대 한의대 재학시절 도올은 금요일 오후 전북 이리(현재 익산)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올라와 가족들과 재회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금요일마다 崔교수는 빠짐없이 서울역에 나와 부군인 도올을 마중했다고 한다. 『서울역에 도착해 최영애 교수가 마중 나와 있는 모습을 보면 도올 선생은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무척이나 행복해 했습니다』<김두환(38?당시 원광대 한의대 재학생)씨> 도올 또한 애처가이자 경처가다. 부인에 대한 도올의 애틋한 정은 그의 저서 곳곳에서 드러나 있다. 『나의 한복이나 일상용구를 손수 다루는 아내는 바느질 솜씨가 천하 일품이다. 그녀의 손끝엔 神氣가 서려 있다 』고 극찬하는가 하면 잠을 한번 실컷 자고 싶은 게 평생 소원이라는 부인을 측은해 하기도 한다. 최영애 교수도 도올 못지않은 수재집안 출신이다. 崔교수는 최성재(81)씨와 박찬애( 79)씨 사이의 2남 5녀 중 둘째 딸이다. 큰 언니 최영자씨는 미국에서 공인회계사로 일하고 있고 둘째 여동생 최영인씨는 미국 대학병원 의사이고 셋째 여동생 최영씨는 한동대 교수, 남동생인 崔起榮(최기영?46), 崔茂榮(최무영?44)씨는 서울대 교수로 기영씨는 공대 전기공학부 교수, 무영씨는 물리학과 교수다. 이 집안 또한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박찬애 여사는 서강감리교회 장로직을 맡고 있다. 포마드 바른 머리와 두루마기 한복 / 돌머리의 천재성 ..... 1974년 대만대 졸업 후 도올은 일본 東京大 문을 두드린다. 1975년 동경대 중국철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한 도올은 新儒學(신유학)을 연구하며 후쿠나가 미쯔지(福永光司), 야마노이 유우(山井湧) 교수 등에게서 학문적 엄밀성을 배우게 된다. 일본 동경대에서 따낸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王船山(王夫之의 호)의 動論」. 그후 김용옥은 한동안 부인 崔교수와 함께 세계 각지를 유람하다가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들어간다. 하버드 대학에 6년간 머물면서 벤자민 슈왈츠( Benjamin Schwartz)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며 중국철학을 연구한다. 1982년 6월 박사 학위를 받는데 그때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王夫之의 철학(The Philosophy of Wang Fu-chih)」. 1972년부터 1982년까지 11년간의 학문 대장정을 마치고 귀국한 도올의 마스터플랜은 무엇이었을까. 대학교수나 연구원이 아닌 한의대 진학이었다. 하버드 박사과정 에 있을 때에도 그의 머리 속에는 한의학 공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장형 김용준 교수의 말. 『1978년 보스턴에 있는 용옥이를 방문했을 때 「형님, 저 귀국하면 한의학 공부를 시작해 보렵니다」 하는 겁니다. 저는 하버드에서 공부한 네가 한의대생이 되면 신문 가십란에 장식이 되겠지, 그냥 교수하는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그 아이의 결심은 단호해 보였습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경희대, 원광대 등에 편입학 여부를 타진해 보지만 여의치 않아 결국 한의대 진학을 포기하게 된다. 어찌 보면 차선의 선택으로 교수직을 택하게 됐는지 모른다. 1982년 고려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는 교수 재직 3년 반 동안 거침없는 언변과 파격적인 강의방식으로 학내외에 화제를 몰고 다녔다. 돌머리의 천재성 ...... 당시 도올 강의를 들었던 고려대 졸업생의 술회다. 『제가 입학한 1986년에 이미 金 교수는 고려대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그분 강의는 교양강의 중 최고 인기였죠. 첫날 강의시간이 아직도 안 잊혀집니다. 강의시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엔 포마드를 바르고, 007 가방을 든, 검은 두루마기 한복차림의 기괴한 신사가 나타나더라구요. 그러더니 연이어 육두문자를 쏟아내기 시작하는데… 정말 이런 분도 교수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칭 宇宙寶(우주보)다. 작고한 梁柱東(양주동) 박사의 자칭 국보론에 대비하여 자신을 우주의 보물이라 칭한 것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우주보라 할만큼 자신감 을 갖게 하는가. 그는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고 자신이 천재라고 느꼈다고 한다. 김용옥과 모차르트가 공유하는 천재성이란 무엇인가. 도올은 자기의 살아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용기라고 말한다. 기존의 전통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표출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모차르트가 모든 악보를 단 한번에 써 내려간 것과 같이 자신도 모든 원고를 일필휘지로 써내려 간다고 말한다. 그는 대만대 석사논문을 20일, 동경대 석사논문도 20일, 하바드대 박사논문은 40일 만에 써 냈다고 한다. 그와 같이 대만에서 유학생활을 한 고려대 朴모 교수의 회고담이다. 대만 유학시절 어느 날 김용옥 교수와 대만 서점에서 중국철학사 전집을 구입했다. 朴교수는 스무 권이라는 양에 질려 읽을 엄두도 못내고 있는데 일주일쯤 지난 후 도올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형, 나 그 전집 다 읽었는데 4권 마지막 부분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 그는 비상한 암기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곳곳에는 그가 知人들과 나눈 대화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대화의 상대자였던 사람들은 이러한 인용문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칠 정도의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원광대 한의대 韓宗鉉(한종현) 교수는 『그와 아무런 격의 없이 나눈 대화가 몇 개월 후 토시 하나 안 틀리고 활자화되어 나에게 나타났다. 이게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 』이라고 말했다. 놀라운 것은 대화 당시 도올은 아무런 메모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1986년 4월8일 그는 돌연 양심선언문을 발표하며 홀연히 고대 강단을 떠난다. 그 날 그는 레포트 용지 4장 분량의 장문의 글 「한국의 오늘을 사는 한 지성인의 양심선언」을 학생들에게 나눠주며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교수가 강단을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학교를 떠났다. 교수보다 藝人이 더 적성 ...... 그는 양심선언문에서 『보통사람이 보통사람이 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그들의 평범성을 극단으로 휘몰아 가는 현실을 참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가 양심선언을 하게 된 데에는 당시 고대 교수 28명이 서명한 시국선언문에 동참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라는 분석이 있다. 양심선언의 배경에 대한 결정적 단서가 되는 문구. 『서명교수와 비서명교수를 이원적 논리로 바라보게 만드는 이 상황이 나는 단순한 한 인간으로서 원망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비서명 교수도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비겁하고 나약하기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는 또 선언문에서 『나는 정치적 해결이 해결할 수 없는 복잡다기한 문제에 대해 큰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러한 열정이 순수할 수 있게 되기조차를 현 정치질서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교수 사퇴 후 그는 그 동안 잠재워져 있던 藝人(예인) 기질을 마음껏 발휘한다. 타고 난 감수성과 괴짜기질, 그리고 청소년 시절 섭렵한 다방면(?)의 경험 등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시, 시나리오, 희곡, 서예집 등을 내놓는가 하면 오페라 대본, 연극 연출에도 손을 뻗쳤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예술론이다. 너무 간단하다. 재미가 없으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1987년과 1988년 사이 자신의 기철학세계가 담겨 있는 사극 시나리오 「새춘향뎐」을 처음 내놓았고 연달아 정치사극 「깜동」 , 李箱(이상)을 모델로 한 초현실 기법의 「날개」, 80년대 학생들의 의식화과정을 정리한 「도바리」 등 3편의 시나리오를 잇달아 탈고한다. 이중 실제 영화화되기도 한 「깜동」은 조선 건국 초기 윤리의 모순 속에 몸부림 친 한 여인의 섹스스캔들을 그렸다. 기존 성인영화와 달리 사회성을 강조한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또 1991년에는 東學 2대 교주 海月(해월) 崔時亨(최시형)의 생애를 다룬 영화 「개벽」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91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5개부문을 수상했다. 연극에도 관심이 많아 극단 「美醜(미추)」 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제작비를 대기도 했다. 「美醜」라는 이름도 도올이 지은 것. 1991년에는 독일의 연극 연출가 마누엘루 트겐홀스트와 함께 「시간의 그림자」를 공동 연출한 적도 있다. 동양학에 눈뜨면서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대학생 시절 국립국악원에 가서 단소와 단가를 배우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단소 솜씨는 수준급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KBS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 애창곡 마이웨이를 가수 뺨치게 불러 청중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의 집 「무정재」도 그의 예술사랑이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곳이다. 통나무로 실내를 장식한 무정재를 방문한 사람들은 집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밖에서 보면 3층 정도의 높이인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6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중에서 5, 6층이 도올의 서재다. 예술의 전당을 설계한 金錫澈(김석철)씨가 설계했지만 상당 부분 도올의 아이디어가 첨가되었다고 한다. 도올의 예인기질은 그가 얼마나 판 벌이기를 좋아하는 것에서도 느껴진다. 그의 강의에는 온갖 이벤트가 다 벌어진다. 그 스스로가 연예인 못지않다. 어떨 때에는 코미디언 뺨치도록 기괴한 몸짓과 표정으로 관중들을 포복절도케 하는가 하면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로 방청객들의 눈시울을 붉히게도 한다. 보통 출판기념회가 참석자들과 저자가 인사를 나누고 책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간단한 다과회로 끝을 맺는 것과는 달리 도올의 출판기념회장은 공연장을 방불케 한다.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춤사위가 곁들여지는가 하면 대중가수들의 공연이 벌어지기도 한다.
철저한 프로근성으로 노력의 代價 챙긴다 ..... 그는 강의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스스로 두 시간 이상 청중을 웃기고 울리고 생각하게 하는 엔터테인먼트를 충분히 행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외부 강연시 그가 주최측에 요구하는 조건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강연시간이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일 것, 청중이 최소 1000명 이상일 것, 1회 강연비가 100만원 이상일 것(이 조건은 도올이 1980년대 중반부터 내세운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을 돈벌레라고 비난하더라도 상관 않는다고 한다. 그는 받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을 해내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자가 청빈해지기는 쉽지만 진정 어려운 일은 자기 값을 받을 줄 알고 그것으로 올바른 사회적 행위를 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EBS 「노자와 21세기」 프로그램 金裕烈 PD는 『자신의 생산물에 최종책임을 지려는 도올의 성실성에는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자와 21세기」 한 회 40분 강의를 위해 그가 읽는 책은 평균 10권 안팎. 그는 녹화 후 편집 과정에도 참여, 모든 방송분의 자막을 직접 집어넣었다. 새벽 2~3시는 기본이고 밤을 꼬박 새는 것도 다반사였다. 金PD는 『4개월 동안 일주일에 4일을 이렇게 보낸 것에 대해서 그가 프로다운 프로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저술활동에서도 그의 프로근성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통나무 출판사 남호섭 사장은, 『다른 작가들은 탈고하면 교정 등 뒷작업은 나 몰라라 하는 식이 대부분인데 도올 선생은 二校(이교) 이상의 교정작업을 손수 한다. 집필시간과 교정시간이 거의 같을 정도로 교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했다. 그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첫째 승중(여), 둘째 일중(남), 셋째 미루(여)다. 승중은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프린스턴大에서 박사과정에 있다고 한다. 일중은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에 귀국, 군복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일중은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국시민권이 있어서 군복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원 입대한 것이라고 김용준 교수가 전했다. 막내 미루양은 현재 컬럼비아大에 재학 중이다. 도올은 공부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바로 자기수련이며 이는 인사 등 기본예절과 자기 방은 자기 스스로 청소하는 부지런함을 배우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대학교수 시절 그는 강의시간에 학생이 삐딱하게 앉아 있거나 기본적인 예절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가차없이 매를 때렸다. 때림으로써 그들에게 더 많은 교육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면 소신껏 때릴 수 있는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百言이 不如一打」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그의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이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회초리를 드는 嚴父(엄부) 도올이지만 아이들을 때리고 난 후 더욱 가슴 아파하는 평범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원광대 한의대 시절 같이 공부한 김 두환 삼화한의원 원장이 전해준 아버지 도올의 모습. 『하루는 도올 선생님이 매우 울적해 보였습니다. 이유는 전날 딸 승중에게 회초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승중이 다리에 피멍이 든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며 저에게 피멍이 빨리 낫게 하는 약을 구할 수 없겠느냐며 애원하는 모습이 참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배울 때는 대상 가리지 않는다 ..... 세간에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도올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도 극과 극 을 달린다. 그중에서도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부분은 그의 인간적인 면이다. 바로 겸손함에 관해서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알려진 것처럼 실제로 거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내성적인 면이 있어 낯을 가리는 편이라고 말한다. 도올의 제자 金炫(42?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책임연구원)씨는 그가 낯을 가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그가 거만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착오라고 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남을 우습게 알고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올 선생은 남의 말을 놀랍도록 주의 깊게 경청한다』고 했다. 이는 상대방의 지식과 경험에 대한 존중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EBS 김유열 PD는 도올 선생이 사람을 가리고 까탈스러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金PD의 말. 『도올 선생님은 자기가 생각했을 때 대화 상대가 안되겠다 싶으면 아예 상대를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하는 學人(학인)이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김용옥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열심히 배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규정지었다. 그는 자기가 배워야겠다고 결심하면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찾아 나선다. 물론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명실상부한 대가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인터뷰 대상으로 가장 까다롭기로 소문난 도올이 白南準(백남준)이라는 천재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다닌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도올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장점 중 하나로 순수함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다. 그가 항상 호기심이 많고 뭔가를 자꾸 배우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그가 때가 묻지 않았다는 것. 순수함에서 그의 학구열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도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순수함도 지나치면 유치함으로 흐를 수 있다. 도올에게도 이 속담이 적용 될 소지는 충분히 있다. 어린아이들이 싫은 것 좋은 것에 대한 구별이 확실하듯, 도올도 好不好가 너무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자신을 실망시키고 분노케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다. 이는 그의 저서들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도올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인신공격성도 상당수다. 1988년 고대 교수 복직이 좌절된 후 그는 자신의 은사들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자신을 배반한 제자에게도 분노의 붓을 휘둘렀다. 「노자 철학 이것이다」서문에 해당하는 求原諒(구원량)에서 수 페이지에 걸쳐 자신의 은사인 김모 교수와 신 모 교수 등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도올은 또 그의 저서 「노자와 21세기」 에 대해 호의적인 서평을 하지 않은 모일보 기자를 방송에서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자기 감정을 억제치 못할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 바로 이 부분 때문에 도올 김용옥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거부감을 산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감정적, 다혈질적 언사에 대해 사과, 해명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는 1989년 한 일간지와 가진 대담식 인터뷰에서 자신은 「분노를 잘 절제하지 못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자인하기도 했다. 노골적 감정표출로 反感 유발 ...... 원광대 한의대 재학시절 도올은 김우중씨와의 대담을 글로 정리한 「대화」에서 원광대생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해 원광대생들의 집단 반발을 산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KBS 「도올 논어 이야기」 녹화시 일어난 기독교 비하 발언, 70대 방청객 퇴장 사건 등으로 계속 구설수에 올랐다. 기독교 비하 발언 사건의 발단은 2000년 10월27일 방송에서 그가 예수는 사생아일 가능성이 있다는 발언을 하면서부터다. 그는 또한 당시 로마에는 호적령이 없었고 마리아가 만삭인 몸으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가 예수를 낳았다는 것은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비롯 각종 기독교 단체에서 공개적으로 KBS에 방송 중단을 요구했고 KBS는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유감표명을 했다. 도올 자신도 그 다음 방송에서 자신이 특정 종교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해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계속해서 이를 문제 삼고 있다. 방청객 퇴장 파문은 작년 10월17일 녹화 직전에 일어났다. 몸이 다소 불편하지만 잘 듣고 보기 위해 앞자리에 앉아 있던 노 모 (76?전직 정신과 의사)씨에게 도올은 『지난번에 앞에 앉지 말라고 했는데 왜 계속 그 자리에 앉냐』며 『잘 보이지 않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명령했다. 이에 노씨가 반발하자 김용옥은 이런 상태에서 방송을 못하겠다고 선언했고 급기야 노씨가 격분해 녹화현장을 퇴장하게 된 것. 도올은 문제를 일으키고 난 후 잘못을 시인해야겠다고 판단되면 신속하게 후속조치를 취하는 처세술을 보이기도 한다. 원광대 폄하 사건의 경우 그는 병가 휴학원을 내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문제가 되었던 부분도 삭제해 일단락됐다. 최근의 노씨 퇴장사건은 문제 발생 후 도올이 노씨 댁을 수차례 방문, 사과를 시도했다. 노씨측이 도올의 화해 제스처에 계속 불응, 소송할 뜻을 굽히지 않다가 작 년 말 시내 음식점에서 두 사람이 만나 화해를 했다고 한다. 1월8일 「도올의 논어 이야기 」 녹화현장을 다시 찾은 노씨는 『그는 우리나라의 국보급 존재다. 내 자신의 감정 때문에 그에게 일말의 위축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 화해하게 됐다』며 『오랜만에 녹화현장에 오니 금의환향한 듯한 기분』이라며 기뻐했다. 그는 종종 大人(대인), 선비임을 자처한다. 선비는 바른 말을 해야하며 끊임없이 학 문에 정진해야 한다고 믿는 그다. 그는 왜곡되고 실추된 조선의 선비상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시국선언문에 서명을 하지 않아 곤경에 빠졌던 그는 1987년 4?13 호헌 조치가 내려지자 이번 기회를 통해 사회 참여에 소극적이었다는 이미지를 벗어나 보려는 듯 홀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간다. 도올은 깐깐한 선비답게 공중도덕 등 기본 예절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예를 들어 목욕탕에서 수건 함부로 던지거나 물을 함부로 쓸 때 직접 그 상대방에게 가서 타이른다.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꼭 지적한다. 공중장소에서 어린애들이 마구 떠들면 그 자리에서 부모와 아이를 한꺼번에 호통친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놀라울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공부벌레라고 한다. 그의 자택 무정재로 이사 간 이유도 어느 글에서 밝혔듯이 너무 많은 책 때문이었다. 1993년 도올과 인터뷰를 한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는 『당시에도 그의 집에는 온통 책뿐이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1만5000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의대 재학시절 다른 학생들은 모두 스터디를 한다, 족보(기출문제)를 구한다 소란을 떨며 공부했지만 그는 정말 미련할 정도로 각종 의학사전을 펴가며 정석대로 공부했다고 한다. 당시 도올과 같이 공부한 김두환 삼화한의원 원장은 『도올 선생을 만나기 전까지는 공부와 생활이 유리된 것인 줄 알았는데 도올 선생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부가 곧 삶이요, 삶이 곧 공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의대 시절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의 강의 를 경청했다고 한다. 한의대 졸업 때 4.5점 만점에 총평점 3.35를 얻었고 1993년 1학기, 2학기, 1995년 1학기 등 3 학기에는 평점이 3.75이상인 자에게 주어지는 우등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답안을 채점한 원광대 한의대 韓宗鉉 교수의 말이다. 『시험이 서술식인 경우 그는 정말 탁월하게 풀어나갔다. 다른 학생들이 시험지 반장도 못채웠을 때 앞뒤로 꽉꽉 채웠을 정도니까. 그러나 단답형에는 약했다. 정답 대신 정답이 요구되는 맥락을 파악, 그 전후과정을 써 놓거나 그 당시 교수가 강의했던 내용을 써 놓는 등 매우 성실한 자세를 보여줬다』 도올과 언론, 그 애증의 관계 / 김용옥의 슬럼프와 재기 ... 그에게 언론계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세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그런 의미로 언론과 김용옥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그는 TV에 대해 이중적 자세를 갖는다. 자신은 미국 유학시절부터 일체 TV 시청을 하지 않았고 TV 때문에 20세기 인류가 망했다고 개탄하면서 결국 그는 TV 덕분에 화려한 스타가 되었다. TV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언론에게 있어 도올은 충분한 상품가치가 있었고 그는 이러한 언론 상업주의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인터뷰 조건이 매우 까다롭기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기자들이 그와 한 번 인터뷰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은 물론 약간의 굴욕감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는 특히 신변잡기성 인터뷰는 절대 사양이다. 인터뷰 방향 도 자기식대로 끌고 간다. 항상 그는 기자에게 지식인 사회에 의미있는 차원 높은 질 문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와 인터뷰를 한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는 그에게 신변 잡기성 질문을 던졌다가 『한 학인이 고민해 온 의식세계를 조명하기는 커녕 그런 피상적인 질문밖에 할 줄 모르냐』며 면박을 당했다고 한다. 김용옥의 슬럼프와 재기 요즘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하지만 그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저서가 물경 30만 부나 팔리는 등 한해에 무려 6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염을 토한 적도 있는 그이지만 1990년대 초반 들어 그의 시세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 당시 낸 「너와 나의 한의학」 등 일련의 저서들은 1만 부를 넘지 못했다. 이런 현실에 대해 도올 자신이 누구보다 비참하게 느꼈다. 그는 「기옹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실 나는 요즈음 용돈이 궁하다. 나는 수입이 없다. 요즈음 내 책은 팔리질 않는다. 그래서 인세도 얼마 들어오는 것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도올은 이런 침체기를 거쳐 1996년 원광대 졸업 후 도올 한의원을 개업했다. 개업 당시 그는 임상과 연구를 병행하면서 불치병 치료에 도전하고 필생의 업으로 삼는 氣哲學(기철학)을 완성해 보겠노라고 야심찬 목표를 피력했다. 1997년에는 SBS 「名醫 특강-건강하십니까」에 출연해 특유의 걸쭉한 입담으로 다시 한번 안방극장을 강타한다 . 『먹는 것보다 싸는 것에 신경써야 한다 』 『섹스는 한 달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그만의 독특한 건강철학을 선보여 1980년대 못지않은 인기를 회복한 그였지만 1998년 8월 연구에 전념하겠다며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 으로 홀연히 사라진다. 그후 1년도 채 안 되어 한국에 돌아와 「노자와 21세기」로 화려하게 컴백한다. 이런 그의 행적에 대해 어떤 이들은 일관성이 없는 좌충우돌 스타일이라고 꼬집기도 한다. 반면 도올처럼 대중이 가려워하는 곳을 정확하게 파악, 시원하게 긁어주는 이도 드물다는 분석도 있다. 다양한 분야의 저서와 TV강의가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사람이라는 분석도 있다. 온갖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랫동안 대중적 지지를 잃지 않는 것은 일반 대중 의 관심사를 동물적으로 파악하는 능력과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이라는 것이다. 得天下英才而敎育之 / 학자인가 엔터테이너인가 ... 도올과 같은 비제도권의 재야 학자 입장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길은 사설학원에서의 교육뿐이다. 1994년부터 그는 동숭동에 위치한 도올서원에서 후학양성에 정성을 쏟고 있다. 매 여름, 겨울방학을 이용해 대학 및 대학원 재학생을 상대로 한 달 동안 동 양고전 한 권과 서양 고전 한 권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지금까지 교재로 선택된 고전들도 다양하다. 지난 14번의 방학을 걸쳐 孟子, 論語, 大學, 中庸, 道德經, 莊子, 周易, 詩經, 般若心經(반야심경), 金剛經(금강경),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 등의 동양고전을 강론하였고, 서양고전으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헤겔의 정신현상학, 마르크스의 자본론, 플라톤전집, 아리스토텔레스선집 등을 강독했다. 수업방식은 조선조 서원의 전통을 이어 학생(이곳에서는 齋生이라 불린다)들이 무릎을 꿇은 채로 수업을 듣는다. 또 도올의 강의 외에도 초청 강사로 유명인사들이 많이 초대되었다. 김우중, 국악인 황병기, 만화가 이두호, 가수 조영남, 이장희, 이문세,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탤런트 최명길 , 시인 박노해 등등. 강의마다 약 100~150여 명의 齋生들이 모여들었고 지금까지 14林(학기에 해당)의 재생들이 배출되었다. 2001년 1월에는 15림이 시작되었으며 이번에는 「맹자」와 「순수 이성비판」이 강독된다. 도올서원에 오는 학생들의 전공도 다양하다 . 인문학도나 사회과학도는 물론이고 의대생, 공대생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세 번에 걸쳐 도올서원 강의를 들었다는 빈동철 (고려대 석사과정)씨는 『대학에서 배우기 힘든 것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도올 서원은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라며 『지나치게 기능주의적으로 흐르는 대학교육을 보충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하는데 도올 서원은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학자인가 엔터테이너인가 그에 대한 평가 중 제일 엇갈리는 부분은 그의 학자적 자질에 대한 평가다. 소장학자들이나 학술전문기자들은 도올이 한국사회에 동양철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은 크나 독창적 학설은 거의 없고 철학적 성취도 높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일보 문화부 이한우 기자는 『그가 철학의 대중화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대중의 철학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저서들만 해도 연극, 무용, 미술, 음악, 태권도, 시나리오 등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에까지 관여함으로써 박학하나 깊이가 없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언론사와의 인터뷰 때마다 자신의 학문세계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는 기자들의 수준을 사정없이 질타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포부를 역설해 왔다. 한의학을 통한 난치병 치료, 새로운 한의학적 체계설립과 인류의 보편사적 인간학(기철학) 건설, 과학, 예술 사를 다 포함하는 한국사상사 저술, 중국의 기초경전 완역 등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작업의 성과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공자는 스스로를 述而不作 (술이부작?옛 것을 설명하나 새로운 것을 만들지는 않는다: 논어)하는 사람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김용옥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척박한 우리나라의 학문적 토양에서 도올에게 述과 作을 모두 바라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예인과 학인의 기질을 골고루 갖춘 도올은 누가 뭐래도 이 시대 최고의 에듀테이너 (edutainer: education(교육)과 entertaine r(연예인)의 복합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도올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그는 앞으로 TV 강연이 끝나면 그가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는 일들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했던가. 엉덩이에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우직하리만큼 성실한 도올을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지켜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
출처: 무비캐스트 원문보기 글쓴이: 무비 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