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41)안중근은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안중근 의거 발생지인 하얼빈은 중국 영토이므로 영유권은 중국에 있고, 그곳을 러시아가 조차(租借)하고 있었으므로 관할권은 러시아에 있었다. 또 의거 결행자는 한국인 안중근이고 포살·응징된 인물은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이므로, 한·러·일·중은 물론 국제적으로 그 처리가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국제여론은 의거 발생 시부터 훼예(毁譽·비방함과 칭찬함)가 엇갈리는 논평이 쏟아져 나오는 정황이었다.
거사 당일(10월26일) 밤 일본은 러시아 측으로부터 재빨리 안 의사를 비롯한 관련 인물들을 넘겨받아, 겉으로는 공정하고도 합법적인 심문과 재판을 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안 의사에 대한 철저한 보복처리를 기도하고 있었다. '한국 병합'을 목전에 두고 그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축소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조사가 진행될수록 안 의사의 주장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고 일본이 명치유신 이래 국시(國是)로 추진한 한국침략과 대륙침략 정책을 전면에서 공박하는 것이어서 일본으로서는 감당하기 난처해졌다. 안 의사의 주장을 그대로 두면 일본의 불의와 침략의 실상만이 국내외적으로 크게 선전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외형적으로 재판이란 절차만 밟을 뿐 실제는 위장된 '보복재판'으로 끝내고 만 것이다.
그들은 안 의사를 위협·강압해서라도 '일본의 정책과 이토 히로부미의 행적이 옳은 것을 잘못 알고 의거한 것'이라는 허위자백이라도 끌어내려 했다. 그 방법에는 갖가지 교활하고도 잔인한 행위가 뒤따랐다. 일반적으로 안 의사의 심문 시 일제의 고문과 학대가 적었던 것 같이 선전되고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정황이 도처에서 산견된다.
안 의사가 그에 대해 조금도 겁을 내거나 위축되지 않자, 일본은 반대로 '이해와 생명'을 미끼로 유인하려 하였다. 먼저 쇠사슬과 족쇄를 풀어주고 좋은 음식과 간사한 말로 '이제 죽게 되었으니 지난 일은 어떻든 이토의 행적과 일본의 정책을 오해하여 감행한 것이라고 자백하면 살려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출세까지 보장한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안 의사는 그들에게 "이 의거는 나의 명리와 현달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한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한 것이므로 다시는 그런 유인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일본은 또 광무황제가 4만원의 거금을 하사하여 이토를 모살하게 하였다는 터무니없는 억지주장도 펴면서, '이는 정확한 정보이다'라고 추궁하였다. 안 의사는 이를 듣고 "일본이 하는 짓은 다 이런 종류로 이웃나라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라고 질책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토를 살해하면서 이미 목숨을 내놓기로 한 사람인데 죽은 뒤에 무슨 돈이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하였다. 3월 26일 순국하기까지 안 의사가 일관되게 소신을 피력하자, 영국 '그래픽'지의 찰스 모리머 기자는 "마침내 안중근은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ㆍ한국사
조선일보 2009.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