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빛낸 10인의 첼리스트]
바하와 함께한 '백년 동안의 고독'
① 선정 개요
20세기의 위대한 연주가들을 살펴보고 있는 ‘객석’의 창간 14주년특집 연재 ‘20세기를 빛낸 음악가들’ 편에서는 예고한 대로이번호에는 ‘10인의 첼리스트’를 선정해 소개한다.
이번 선정에는 국내 음악평론가, 칼럼니스트 외에 첼리스트들도선정위원으로 참여했다. 선정위원은 강민석, 김경순, 김길영, 김범수,김상현, 김용만, 김정순, 김지훈, 류태형, 박상민, 박성수, 박제성,서동진, 송영택, 양성원, 유윤종, 유형종, 윤정열, 윤지희, 이석렬,이성일, 이일후, 이재준, 이지은, 임경원, 임화섭, 정재윤, 조승환,최갑주(가나다 순) 등 모두 30명이었다.
첼로와 함께 비올라 다 감바주자를 포함해 진행한 이번 선정의결과는 고득점 순으로 1위부터 30위까지가 1.파블로 카잘스 2.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3.야노스 슈타커 4.피에르 푸르니에 5.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6.폴 토르틀리에 7.모리스 장드롱 8.요요 마 9.자클린느 뒤 프레 10.안너 빌스마 11.엠마누엘 포이어만 12.하인리히쉬프 13.미샤 마이스키 14.다닐 샤프란 15.앙드레 나바라 16.레너드로즈 17.가스파르 카사도 18.엔리코 마이나르디 19.조르디 사발 20.페터 비스펠베이 21.개리 호프만 22.안토니오 야니그로 23.린 해럴 24.나탈리아 구트만 25.스티븐 이설리스 26.파울 그륌머 27.트룰스 뫼르크 28.지크프리트 팔름 29.빌란트 쿠이켄 30.로베르트 코헨의 순이었다.아깝게 여기에 진입하지 못한 첼리스트는 벡커·벤징거(감바)·크누세비츠키·아이젠베르크 등이었다.
카잘스의 경우 압도적인 지지로 1위에 선정되었다. 그를 첫 손에 꼽지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한편 카잘스에 버금가는 자리엔 로스트로포비치를 선정한 경우가 많아 두 사람과 나머지 연주가들사이의 지지도 격차가 큰 편이었다. 푸르니에·토르틀리에·장드롱·뒤 프레·나바라 등이 상위권에 몰린 프랑스계 첼리스트들의 초강세가 두드러졌으며, 역시 로스트로포비치·피아티고르스키·마이스키·샤프란·구트만 등이 30위안에 선정되어 구 소련 및 러시아계도 강세를 보였다. 여기에 여성첼리스트는 자클린느 뒤 프레와 나탈리아 구트만 단 두 사람만이선정되어 첼로가 중량급 악기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밖의 특징은 바로크 첼로와 현대 첼로를 병행하는 사제간인 빌스마와 비스펠베이, 그리고 감바 연주가인 사발과 쿠이켄이 선정되어 다른 악기보다 원전연주가들의 상위 진출 성향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이제 연주가별로 '10인'을 살펴본다.
② 20세기를 빛낸 10인의 첼리스트
1. 파불로 카잘스(1876∼1973)
카잘스. 살아생전에 그만큼 존경받은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인성과 음악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던 모범적인 예술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척 고독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생김새도 그렇고,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자욱한 연기를 뒤덮은 채 찍은 사진하며, 바흐의무반주 첼로 모음곡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이미지. 이런 것들이그에게서 받는 고독한 인상을 더욱 부추긴다. 생김새로 치자면, 그는이미 20대에 머리카락이 ‘수치미달’이었다. 당시 미국의 한 공연매니저는 그가 가발을 쓰고 연주하면 개런티를 훨씬 올려주겠다고까지제안했다고 한다.
어쨌든 파이프를 물고 연주하던 습관이 있었던 카잘스는 고학시절,파리의 한 헌책방에서 발견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10년넘게 독학으로 연주했다. 그0는 그곡을 자신의 해석대로 연주하기에필요한 모든 것을 혼자 터득했다. 그가 그렇게 일찍 ‘늙어 보인’것은 가장 고독한 곡을 스승삼아 고독하게 연습하며 음악과 예술과인생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카잘스는 혼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끌어안고다듬어내며 테크닉 뿐만 아니라 19세기까지 첼로 연주가 극복하지못했던 난제들을 극복해냈다.
첼로 연주 자세는 어찌보면 바이올린보다 더 부자연스러운 자세다.각 현의 고음을 낼 때 지판을 볼 수도 없다. 엔드 핀이 생겨 부담이덜해졌지만 여전히 다리 사이에 악기를 끼우고 끌어안은 자세에서연주해야 한다. 활의 압력도 바이올린보다 더욱 커야 한다. 그리고소리를 내기도 힘들어 웬만큼 힘을 들이지 않으면 바이올린보다 음량이떨어진다. 현과 활의 마찰시 잡음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소리로 노래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하지만 카잘스의 존재로, 아니어떻게 보면 그와 바흐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첼로는 지금같이인간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소리를 내며 유연하고 유려하게 노래할수 있는 것이다. 카잘스가 첼로 연주에서 가장 중요시 한 것도유연함과 인토네이션이었다.
그리고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을 20세기 이후 다시 영생토록 부활시킨공적도 간과할 수 없다. 오늘날의 많은 첼리스트는 오전 연습을 바흐의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연주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카잘스의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녹음(EMI)은 현대 레코딩업계에선아직까지 성서로 통한다.
스페인의 카탈로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던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했다. 11세에 바르셀로나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호세 가르시아에게 첼로를 배웠다. 후에마드리드·파리 등지로 옮겨가며 어렵게 공부했다.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첼로 주자로 자리를 잡은 그에게 기회가주어졌다. 1899년 파리에서 라무뢰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대성공을거두어 세계적인 명성을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약 15년간그는 파리에 살면서 바이올린의 자크 티보, 피아노의 코르토와 트리오활동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1920년부터는 바르셀로나에 사재를 털어오케스트라를 창립해 지휘하며 노동자들을 위해 연주하기도 했다.
조국 스페인이 내란(1937)에 이어 프랑코 독재정권에 들어가자 그에대한 항의의 표시로 피레네 산맥의 작은 마을 프라도에 은거하며공식적인 연주활동을 중지했다. 1950년, 프라도에서 바흐 탄생200주기를 맞이해 음악제를 개최하면서 다시 연주를 시작한 그는1957년 푸에르토리코로 옮겼고, 60년부터는 말보로 음악제에서 지휘에힘을 쏟았다. 당시의 실황 음반(소니)들은 지금은 상당히 귀중한것들이다.
카잘스는 죽기 직전까지 페스티벌을 쫓아다니며 연주하고, 가르치고,인류애를 설파했다. 그리고 세상에 머문 지 100년을 못 채우고 97년만에 홀연 떠나갔다. 지금도 그가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산 살바도르의바닷가에는 ‘바흐의 정원’이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추억이 없는 곳’처럼, 그곳에도 추억보다는 고독이 남아 있을법하다.
2. 므스타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1927∼ )
로스트로포비치라는 이름은 첼리스트의 이름을 뒤지다 보면 두사람이 등장한다. 므스티슬라브와 레오폴드(1892∼1942) 부자가그들이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카잘스의 제자였다. 그리고므스티슬라브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핏줄 탓인지 환경 탓인지므스티슬라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4세때 폴카를 작곡해 스스로 연주했다. 5세 때는 집안이 모스크바로이주했다. 레오폴드는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에서 연주하며 그네신음악원에서 가르쳤다. 므스티슬라브도 그곳에서 코졸루포프에게 배우기시작했다. 10세 때인 37년, 레오폴드와 오케스트라 연주여행에동행했던 그는 최초로 협연의 기회를 잡았다.
1941년, 14세의 나이로 첼로와 피아노과를 동시에 졸업한 그는이듬해 아버지 레오폴드를 잃었다. 당시 레오폴드의 나이 50세에불과했다. 므스티슬라브는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첼로 클래스를물려받았다. 그는 10대 후반에 이미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 등을스승이자 동료로 두었다. 모스크바 필과 연주여행을 다녔고, 10년 이상위인 리히테르를 독주회 반주자로 두었으며, 길렐스·코간과 피아노트리오 활동도 했다. 1945년 모스크바 콩쿠르를 시작으로 프라하,바르샤바, 부다페스트에서 콩쿠르를 석권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끝나자 로스트로포비치라 하면 사람들은 모두 레오폴드를 떠올리기보다므스티슬라브를 떠올렸다. 카잘스에 비한다면 로스트로포비치의 젊은,아니 어린 시절은 ‘화려한 인생’ 그 자체였다.
그가 어린 시절 피아노를 병행해 공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그는 훗날 부인인 소프라노 가수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의 독창회반주를 암보로 연주할 정도로 전문 피아니스트 수준을 지니고 있다.물론 이는 지휘자로서도 큰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처음 첼로의 길을걸을 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협주곡에서 독주악기로 오케스트라와대적할 때, 그의 연주는 특히 빛을 발한다. 이는 첼로로써 피아노가내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
유리처럼 딱딱하고 금속적인 소리에서 돌변해 꿈꾸듯 부드러운소리를 내고, 어떠한 어려운 기교도 악상에 맞게 소화해 내는 연주.아버지 레오폴드를 통해 내려온 카잘스의 주법이 므스티슬라브에이르러, 약 50년 만에 다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그의 연주는 초인적이다’ ‘그는 첼리스트가 아니다.자연현상이다’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작곡가는그에게 앞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그의 레퍼토리가 현대곡에 폭넓게포진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거꾸로 그의 폭넓은표현력과 강렬한 연주효과는 작곡가들에게 첼로 협주곡의 한계를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가현대곡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인적인 연주만큼 그의레퍼토리도 초인적으로 넓다.
1956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된 그는 구소련에서 인권운동을펼치던 노벨상 수상작가 솔제니친을 옹호한 죄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추방당했다. 이 또한 정치와는 무관한 인류애의 발로였다. 따라서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 앞에서 연주하던 그의 모습이 전혀쇼나 이벤트로 비치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을 근거지로 활동하며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개시했다. 이전에도 그의 연주 모습을 보면 협연석에 앉아오케스트라를 향해 몸으로 얘기하는 듯한 동작을 자주 취하곤 했다. 몸속에 정열이 끓어오르던 그는 지휘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것이다. 안탈 도라티의 후임으로 1977년부터 워싱턴 내셔널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그는 이후로도 첼로와 지휘를 병행하며양쪽 어느 하나 허술함이 없었다. 그가 지휘한 텔덱 레이블의 음반중에는 이미 수작으로 거론되는 음반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나 바이올리니스트들과의 협연 음반들이 좋다.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아끼고 아낀 끝에 92년에 녹음(EMI)했다.새로운 해석을 많이 시도해 ‘장고 끝에 악수’라는 평을 듣기도했지만 아직 평가를 내리기는 성급하지 않나 싶다.
3. 야노스 슈타커(1924∼ )
슈타커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와 친근하다. 지난해 내한했을 때도‘한국은 참 많이 발전했다’고 되레 말해줄 정도로 옆집 할아버지같은 인상을 풍겼었다. 1924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그는 7세의나이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입학, 아돌프 시퍼와 레오 바이너를사사했다. 12세 때 최초의 리사이틀을 열었다. 당시 부다페스트음악원에 유학했던 안익태와 같은 스승의 문하였다. 안익태가 그에게‘한국 여자랑 결혼해 한국에서 살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고도전한다. 지휘자 임원식과의 친분으로 우리나라에는 일곱 차례나 들렀다.
졸업 후 45년과 46년에는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의수석주자를 역임했다. 동시에 바이올린의 죄르지 세복 등과 3중주단을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그후 헝가리를 떠나 서방으로 이주했다.
1948년, 파리에서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음반으로 발표해 전세계를 경악케 했다. 이 곡은 이후로 그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인연을 맺었다. 그해 10월에 미국으로 이주해 48년에서 49년까지댈러스 심포니의 수석주자로 일했다. 이후 49년에는 프리츠 라이너의권유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이 되었다.53년에서 58년까지는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으로 일했고, 58년 이후솔리스트로 자립했다. 그만큼 솔리스트 이전에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풍부한 경험을 쌓은 이는 드물 것이다.
인디애나 음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현재 그의제자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또한 그는 첼로의연주 교본, 악보의 교정과 편찬에도 큰 공을 세웠다. 현재 슈타커판의첼로 악보는 상당히 널리 통용된다. 이러한 점도 그를 금세기 위대한업적을 쌓은 첼리스트로 꼽는데 일조한다. 피아노의 줄리어스 카첸,바이올린의 요제프 수크와 2년간의 트리오 활동은 69년 카첸의죽음으로 정지되었다.
슈타커의 연주는 명확하면서도 강렬한 편이다. 그리고낭만적이라기보다는 즉물적인 데가 있었는데, 말년에 접어들면서 그런면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그의 음반으로는 위에서 말한 코다이의무반주 첼로 소나타가 대표적이다. 50년에 녹음한 음반(필립스)이 명반. 역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네 차레나 녹음했다. 그중 가장최근의 것(RCA)은 96년 녹음해 지난해 선보였다. 그보다는 과거의머큐리 레이블의 음반이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지지를 얻고 있는것만은 사실이다.
4. 피에르 푸르니에(1906∼1986)
“음악을 그 위대함 속에서 사랑하는 것. 그것은 위대함을 피나는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낙담해 있을 때는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될 수도 있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전해주는 것이다. 음악의 매력에 이끌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절대로끊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만들고 국경이 없는 왕국을 만들기 위해음악에 대한 사랑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음악교’의 교주 같은 설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을 남긴푸르니에의 음악인생은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는 9세라는 어린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고, 이후 장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처음에는 크게 상심했으나 주변의 많은 도움과 자신의 노력, 그리고음악의 힘으로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의 음악은 따뜻하다.하지만 그렇다고 고뇌하는 면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그가 프랑스인이란 것도 여기에 한몫한다.
파리에서 태어난 푸르니에는 처음에는 피아노를 하려 했다. 하지만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 전체가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항상 앉아서연주할 수 있는 첼로를 택했으나 불편한 다리로는 보통사람보다 몇백배나 힘들었다. 다만 그의 성품과 악기의 성격은 잘 맞았다. 12세에어렵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26세이던 1932년, 늦은 나이에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이후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구하고국외 연주여행길에 자주 올랐다. 프랑스 정부는 그 공로로 그에게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1937년, 코르토, 티보, 카잘스가 창립한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첼로와 실내악 교편을 잡았고, 41년에는 파리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전쟁통임에도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가 음악으로전파하는 사랑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도 많았다. 그는교육활동을 잠시 멈추고 연주에 전념했다.
전쟁이 끝나고 슈나벨, 켐프, 박하우스, 루빈슈타인, 굴다 등과 함께연주하며 ‘평화와 사랑’을 전파했다. 56년 제네바에 정착한 후피아니스트인 아들 장 피에르 푸르니에의 도움으로 마스터 클래스도열었다. 아들은 훌륭한 실내악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의 동생인 장푸르니에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푸르니에는 ‘첼로의 왕자’로 불릴 정도로 귀족적이고 우아한연주를 들려주었다. 거기에 소탈함과 단정한 양식감, 균형감 등의고전적 정신이 보태져 정갈한 음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음색도아름답고 따뜻함이 넘쳐났다. 이런 모든 바탕 위에 인간애가 더해져격조 높은 기품이 느껴지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는 프랑스 근대작품들에도 능했다.
5.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1903∼1976)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피아티고르스키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재능을 보였다. 비교적 어린나이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클랭겔에게 배웠다. 로스트로포비치에 버금갈 만한 빠른 행보로발전하며 연주했다. 첼리스트로는 어린 나이인 9세에 데뷔했고, 15세에오케스트라 수석단원이 될 정도였다. 첼로는 악기가 크다는 점 때문에어린 나이에 시작하기도 힘들고 신동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피아티고르스키는 워낙 기골이 장대한 편이었고, 성장속도도 빨라비교적 일찍부터 활약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연주도 성인들의그것만큼 완숙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그는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하이페츠처럼 영원히떠났던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더 배울 것이 없어 보였으나 그는배움의 길을 이어갔다. 1925년, 푸르트벵글러가 그의 연주를 듣고베를린 필의 수석으로 기용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1929년에 베를린을 떠나 세계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벌이던 그는미국에 정착했다. 당시 피아티고르스키가 협연 무대에서 즐겨 연주하던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키호테’와 드보르자크의협주곡이었다. 당시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타’로 녹음한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음반은 지금은 전설로만 전해내려온다.
미국에서 그는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고, 첼리스트 중에 가장많은 작곡가에게서 곡을 헌정받은 기록도 남기게 되었다. 그에게 곡을헌정한 작곡가는 대략 25명에 이른다. 그중 프로코피예프의 첼로협주곡 작품 58과, 에른스트 블로흐의 ‘셀로모’ 등이 대표작이다.그의 연주는 힘을 바탕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첼로를 마치 장난감다루듯 연주했지만 지나치게 과장된 연주는 절대 없었다. 절제와 균형, 그리고 진지함의 미덕을 아는 연주가였던 것이다.
이미 미국에 건너와 있던 바이올린의 하이페츠, 그리고 피아노의루빈슈타인과 함께한 트리오 활동은 ‘백만 불의 트리오’라는애칭으로 유명했다. 30여장이 넘는 음반도 남긴 이 트리오 활동으로피아티고르스키의 명성은 더욱 높은 것이 되었다. 미국으로 건너오기이전, 소위 ‘베를린시대’에는 피아노의 슈나벨, 바이올린의 플레쉬와트리오 활동을 했었지만 ‘백만 불의 트리오’만큼 유명하진 않았다.이외에도 프로코피예프, 바르토크 등의 작곡가가 그의 반주를 자청했고, 밀슈타인과도 함께 활동했다.
교육자로서 런던과 파리 음악원, 커티스 음대뿐만 아니라 말년에거주한 캘리포니아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의 공로 중에편곡활동을 통해 첼로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없다.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은 피아티고르스키와의 공동편곡이다. 독자적으로 편곡한 베버의 소나타도 유명하다.
6. 폴 토르틀리에(1914∼1990)
토르틀리에는 어린 시절, 음악을 상당히 어렵게 공부했다. 부모들도상류사회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가구직공이었고, 어머니는 하숙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초의파리의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도록 부추겼다.토르틀리에의 어머니는 아들을 음악 공부를 시키겠다는 일념으로자신은 굳은 일을 마다않고 했다. 오늘날 우리나 일본의 어머니들 같은모습이라 할까.
하숙집에서 음악가들의 점심을 제공하는 일도 했던 그녀는 어린아들을 이끌고 첼로 레슨을 시키러 다녔다. 거기다 토르틀리에의타고난 재능도 한몫해 10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한그는 피아르, 제라르 에킹에게 배운 후 16세 때 첼로 부문 1등상을차지하며 졸업했다. 35년에는 대위법과 작곡에서도 1등으로 졸업했다.이윽고 미국으로 건너가 쿠셰비츠키 지휘의 보스턴 심포니의 수석이되었다. 그가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두기까지 배의 요리사까지 마다않고뒷바라지한 어머니가 있었다.
어려운 서민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난히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것일까. 토르틀리에는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상심,연주활동을 잠시 중단했다. 첼로라는 악기는 사람을 너무나 깊은생각에 빠뜨리나 보다. 전쟁이 끝난 후 2년이 지난 47년이 되어서야비로소 연주활동을 제대로 시작한 그는 토마스 비첨과 리하르트슈트라우스의 ‘돈키호테’를 연주, 녹음해 성공했다. 이후 국제적인명성을 날리던 그는 1950년 프라도에 가서 역시 활동을 중단했다가다시 시작한 카잘스를 만났다. 이 만남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다.나이는 비록 40년 이상 차이가 났지만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음악적자향점도,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도 같았다. 처음 만나 마치오랜 친구인 것처럼 얘기했고, 음악으로도 대화했다.
56년 파리 음악원 교수로 초빙되어 12년간 재직했다. 해를거듭할수록 기술을 연마하고 개혁하는 대기만성형의 연주가로서,새로운 기술은 그의 역동적이고 정열적인 라틴민족의 본질과 어울려후대에게 전달되었다. 필요하다면 전통과도 과감히 맞서 새로운 장점을증명하고 반영했다. 그는 첼로 연주시의 몸움직임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악기를 보다 수평으로 잡는 것이 음의 울림을 좋게 만들며, 보잉을더욱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 구부러진 엔드 핀을고안하기도 했다. 이는 일명 ‘토르틀리에 핀’이라 불리는데, 그와친교가 있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이를 도입해 모스크바 음악원에보급하기도 했다.
그는 1년간 라무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도 있었고 작곡활동도 했다. 두 곡의 첼로 협주곡 두 대의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 스트링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과 많은 실내악 작품들을 남겼다.그의 아들 얀 파스칼 토르틀리에는 이러한 영향을 이어받아 지휘자로서활동중이다.
7. 모리스 장드롱(1920∼1990)
“내가 처음 공부할 때는 카세트도, TV도 없었고 오직 악기와악보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오히려잘된 것이었죠. 궁극에 이르면 예술은 결국 고독한 작업이기때문입니다.” 장드롱이 지난 1985년 내한했을 당시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한말이다. 그도 토르틀리에에 못지않게 어렵게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냉철하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연주로 토르틀리에와 좋은 대조를이뤘다. 이러한 연주풍은 그의 말대로 고독 속에서 음악을 만들며생겨난 것이 아닐까 한다.
니스에서 태어난 그는 신동이었다. 3세 때 이미 악보를 읽어냈다.주위의 권유로 5세 때부터 그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소형 첼로를가지고 배우기 시작했다. 니스 음악원에서 최고 상을 받고 파리음악원으로 옮겨 제라르 에킹을 사사했다. 이 시절 장드롱은 넉넉지못했으나 프랑스인 특유의 유머와 낙천주의로 지탱했다. 여기서 그는당시 파리를 풍미하던 위대한 예술가들과 친교를 쌓고 예술적인 교류를나눴다. 이때의 교류가 그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40년, 파리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바로 연주계로 뛰어들어활발하게 활동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장 프랑세와 공연했고,헤르만 세르헨, 멘겔베르크 등으로부터는 지휘도 배웠다. 그는 죽을때까지 지휘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47년 런던 필과 프로코피예프의 첼로 협주곡 작품 58을 유럽 초연해대성공을 거두었다. 50년대 들어 파리에서 카잘스 지휘의 라무뢰오케스트라와 하이든과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을 녹음했다. 카잘스는각별히 장드롱을 아껴 ‘그는 나의 황태자다’라고 말했을 정도다.역시 고독을 바탕으로 다듬어낸 그의 연주는 ‘고독의 성인’ 카잘스의마음에 꼭 들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테크닉 면에서도 둘째가라면서러울 정도의 완성도를 지녔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필립스)도명연 중의 하나로 꼽힌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연주로 오전 연습을 대신하는대표적인 첼리스트 장드롱은 연습벌레로 통하기도 했다. 장드롱은 역시내한 당시 연습의 중요성에 대한 얘기를 하나의 일화로 대신했다.“어느 날엔가 피카소에게 첼로를 그려달라고 부탁했죠. 이후 10년동안아무 말도 없어 포기하고 있으려니 어느날 불쑥 피카소가 첼로를 그린그림을 내놓더군요. 놀라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피카소가‘너한테 첼로를 그려달라는 말을 듣고 10년 동안 매일 첼로 그리는연습을 했다. 이제야 마음에 들어 보여주는 거다’라고 대답하더군요.예술은 오랜 세월 쌓여야 합니다.”
8. 요요마(1955∼ )
요요 마의 양친은 대만계 중국인으로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였고,어머니는 메조 소프라노 가수였다. 4세 때부터 첼로를 시작해 어린시절부터 신동으로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6세 때 파리 대학 예술고고학연구소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질 정도의 천재였다. 62년, 그가 7세 되던해 그의 일가는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고, 그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레너드 로즈에게 배웠다. 이듬해 번스타인이 지휘한 TV음악 프로그램에출연했고, 아이작 스턴과 카네기홀에서 함께 연주하는 등, 미국전역에서 신동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72년부터 말보로 음악제, 아스펜음악제 등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77년부터는 유럽으로도 연주활동의폭을 넓혔다. 베를린 필, 빈 필 등 최고의 악단과 협연한 그는78년에는 잘츠부르크와 루체른 음악제에도 출연했다. 워낙어린시절부터 연주해 왔으므로 그의 연주활동도 40년이 가까워진다.자신의 이름이 등장하는 음반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첼리스트 중의 한사람이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솔리스트로서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으나 실내악 연주도게을리하지 않았다. 김영욱과 엠마누엘 액스와의 트리오 활동부터아이작 스턴, 제이미 라레도, 초량린, 리처드 스톨츠만 등과파트너십을 이루며 이어온 실내악 활동은 최근에도 끊이지 않는다. 82년 발표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CBS)에 대해선 의견이분분했다. 빠른 템포 설정으로 약동하는 ‘춤곡’의 의미를 되살려낸참신한 해석이라는 찬성파와 너무 가볍고 경박한 ‘미국적인’ 연주란 반대파가 갈렸다. 올해 출반된 재녹음은 다른 분야의 예술가와 영감을교류해 내놓은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아줄 만하다. 전작에비해서는 진지함이 보태졌으나 여전히 높은 완성도를 갖진 못한다는평가를 얻고 있다. 오히려 그의 연주 중에서 ‘괜찮은 것’을 꼽자면프로코피예프나 쇼스타코비치를 선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의 연주는 보편적으로 템포나 아티큘레이션을 생동감이 넘치는쪽으로 잡아가는 편이다. 한편 감정도 풍부해 과장이 심하다는 비판도많이 듣는다. 너무 일찍 신동으로 각광받았고, 지명도만으로 볼 때는이미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첼리스트로서 자리를 굳혔다는 것이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그의 나이가 40대 초반이라는 것, 그리고 테크닉면에서나 표현력 면에서 완숙기에 접어든 것을 감안한다면 이제부터음악적인 면의 완성기에 들어서는 요요 마의 모습을 기대하게 된다.
9. 쟈클린느 뒤 프레(1945∼1987)
뒤 프레 그의 이름을 들으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란 말이생각난다. 그녀를 앗아간 병명이 ‘다중 경화증’이었기 때문일까.아니면 단명한 천재들에 대한 동경 때문일까. 어쨌든 금세기 최고의여성 첼리스트로 꼽힌 그녀가 너무나 일찍 무대를 떠나야 했던 것은음악을 듣는 사람들 모두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난 뒤 프레는 3세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소리 가운데, 특히 첼로소리를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졸랐다고 한다. 4세 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받고 5세 때부터본격적으로 배운 그는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를사사해 어린 나이에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섭렵했다. 16세가되던 1961년, 런던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가졌고, 65년엔 뉴욕에데뷔했다. 이후로 세계적인 첼리스트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23세이던68년에는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했고, 28세이던 73년, 희귀병에 걸려연주활동을 모두 중단했다. 이후 14년 동안 투병하던 그녀는 말로써지도하는 마스터 클래스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87년, 남편 바렌보임이지켜보는 가운데 42년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연주는 남성에도 뒤지지 않는 강렬한 힘과 표현으로 특징 지어진다. 마치 톱질하듯 썰어대던 보잉과 순진하고 솔직한동작으로부터 발산하는 순수한 열정이 돋보였다. 그는 병에 걸리기전까지만 해도 항상 웃음을 간직한 낙천주의자였고, 자신감에넘쳐흘렀으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달하기까지 했다. 그런 성격이그의 연주에도 반영된 것이었다. 그의 연주는 한편 ‘자신을 활활 태워 만들어낸 음악’이라는 평을들었다. ‘한 인간이 평생을 두고 써야 할 수명과 기를 짧은 기간에소진했기에 때이른 죽음을 맞이했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그의연주는 스케일이 크고 열정적이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나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거의 다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뒤 프레는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 이렇게고백했다. 그의 음반으로는 엘가의 협주곡(EMI)이 최고의 명반으로꼽히며, 코바셰비치와의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EMI)도 수작이다.
10. 안너 빌스마(1934∼ )
빌스마는 그 활동에 비해 다소 과소평가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1934년에 태어났으니 벌써 60대 중반인 그는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세계 정상의 첼리스트의 대열에 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시절 아버지로부터 첼로를배우기 시작해 헤이그 왕립음악원에 입학한 이후로는 당시 암스테르담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첼로 주자인 카렐 본캄프에게 배웠다. 그리고57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반적인 ‘신동’들보다는 훨씬 느린행보였다. 2년 후인 1959년, 25세의 나이로 멕시코에서 열린 파블로카잘스 국제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화려한솔리스트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62년부터 그는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의 수석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당시 원전악기 연주계의 ‘무서운아이’였던 가장 진취적인 원전악기 연주가─리코더의 프란스 브뤼헨,바이올린의 얍 슈뢰더, 쳄발로의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와 함께암스테르담 4중주단을 결성해 원전연주사를 개척하기도 했다. 지금이들중 브뤼헨과 레온하르트가 바로크시대까지의 고음악 지휘 분야에서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첼리스트로서의 자리를지켜온 빌스마의 비중이 어느 정도 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68년에 이르러 콘서트헤보를 떠나 본격적으로 솔리스트로서 활동을개시했지만 실내악 연주자로서의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근대,특히 현대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연주하는 런던 4중주단을 결성해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70년대 들어서는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을 원전악기로 연주해 이 분야의 주창자로서도 자리매김을 했다.엔드 핀 없이 다리 사이에 끼우고, 거트 현을 채용해 연주하는 바로크첼로를 전세계에 널리 알린 것도 그였다. 역시 네덜란드 태생의 그의제자 페터 비스펠베이가 현대음악과 바흐를 중심으로 하는 고음악에치중하는 모습은 빌스마의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투영한 것이라 할 수있을 것이다. 79년의 바흐 첼로 모음곡 전곡 녹음(세온)과 92년에 스미스소니안협회 소장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셀베’(이 명기는 보통첼로보다 약간 크다고 한다)에 의한 재녹음(소니)은 이미 거트 현을사용한 원전악기 연주의 최고 음반으로서 자리를 굳힌 지 오래다. 한편 그는 이탈리아어로 ‘거트활’이라는 뜻을 지닌‘아르키부델리’를 조직해 소니의 원전연주 서브 레이블인비바르테에서 음반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교육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는현재 그는 하버드 대학, 헤이그 왕립음악원, 암스테르담 스벨링크음악원 등에서 가르치고 있다.
③ 20세기 첼로계의 흐름
인자한 스승들이 들려준 인류애의 노래
20세기 들어 첼로의 역사는 파블로 카잘스에 의해 새롭게 열렸다는사실에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 악기 중에사람의 목소리를 제일 닮은 첼로는 이미 19세기에도 청중들의 마음을사로잡았고, 따라서 롬베르크(1767∼1841), 세르베(1807∼1866),다비도프(1838∼1889) 등에서 클랭겔(1859∼1933), 벡커 (1864∼1941)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첼리스트의 이름이 19세기 서양 음악사를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카잘스를 20세기 첼로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이유는 그가현대적 주법의 개발과 레퍼토리의 발굴로 모든 후대 첼리스트들에게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휘자와 스승, 모범이 되는 전인적예술가로서, 또한 독재나 억압을 예술로 극복하고 승화시킨 진정한자유인으로 1세기 동안 지킨 자리가 너무나 높고 크기 때문이다.
특히 주법에 있어서 카잘스는 경직된 자세로 연주하던 구시대의습관을, 인체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이용하도록 혁신해 강력한 힘과다양한 표현을 가능케 하는 음색을 구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연주는 늘 불 같은 열정과 미적 부드러움, 그리고 이성적 간결함이중용을 이루었다고 평한다. 그를 위해 많은 작곡가들이 곡을 증정하는 등, 카잘스는 전쟁과국제분쟁으로 침체되었던 금세기 초 첼로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카잘스를 장·단기간으로 사사한 인물들로는수지아·포이어만·아렉자니안·카사도·아이젠베르크·L.로스트로포비치(므스티슬라브의 아버지)·푸르니에·토르틀리에·사드로·파르나스·뒤 프레 등이다. 국경을초월해 거의 모든 첼리스트들이 그에게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받은것이다. 이후로는 국가별로 첼리스트들의 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서유럽 제국의 거장 첼리스트
프랑스는 거의 모든 대가들이 파리 국립음악원을 중심으로배출되었다. 금세기 초에 카잘스와 견줄 만하고 프랑스 악파의 기둥이되는 인물로 마레샬(Maurice Mar럄hal, 1892∼1964)을 들 수 있다.그는 파리음악원에서 파야드와 뢰브를 사사했다.드뷔시·라벨·오네게르·미요를 비롯한 프랑스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첼로곡을 작곡했다. 마레샬의 연주는 명료하면서도 음화적인 표현에특출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로는 미요·마틴(토르틀리에의 부인)·발레브스카·뮈니에·뮐러·드프라스 등이 있다. 마레샬을 프랑스 악파의 1세대라 한다면 2세대는 무척 화려하다.푸르니에를 비롯해 나바라·토르틀리에·장드롱 등이 그들로, 20세기중반에 세계의 첼로 중심을 파리로 놓이게 하는 데 공헌했다. 고상하고 귀족적 연주로 ‘아폴론적 첼리스트’란 명칭을 받은푸르니에는 파리 음악원에서 바즐레르와 A. 에킹을 사사했고, 졸업과동시에 주목받는 연주가로 20년대 말부터 국외에 이름을 날리기시작했다. 잠시 파리의 에콜 노르말과 국립음악원에서 가르쳤지만,사직하고 연주에만 몰두해 60여 년 동안 무대를 지켰다. 따라서 직계제자는 남기고 있지 않지만, 제네바·취리히·몬트로 등지에서주기적으로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 자신의 주법을 후배들에게 전했다.
나바라 역시 뢰브의 제자로 포이어만과 카잘스의 영향 아래서성장했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예술적이면서도 기교적이었다. 특히호흡이 길면서 다채로운 운궁법은 청중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는1949년 푸르니에에 이어 국립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은퇴 전까지오랫동안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는데, 그중에는드브로스·퀸느·로데옹·쉬폴로·쉬프·스트로스 등이 있다. 한편 토르틀리에는 음악원 예비학교에서 배운 파야드에게 유산으로그의 첼로를 물려 받을 정도로 사랑받았으며 음악원에서는 G. 에킹을,그리고 그후 카잘스를 사사했다. 그는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곡해석으로사랑을 받았으며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기도 했다. 제자로 잘 알려진첼리스트로는 뒤 프레와 노라스가 있다.
장드롱은 냉철하고 객관적이며 이성적 연주로 토르틀리에와비교되었다. 그의 이런 성격은 그가 편집한 하이든과 보케리니 협주곡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장드롱도 역시 G. 에킹을 사사했고,1970년부터 파리 국립음악원에서 그가 가르친 아테르톤과 같은 젊은제자들이 요즈음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밖에 언급해야 할인물들로는 미쉬렌과 프라쇼 등이 있다. 20세기 이탈리아 악파를 대표하는 첼리스트는 제1세대의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 1897∼1976)와 제2세대의 야니그로(AntonioJanigro, 1918∼ )가 있다. 마이나르디는 베르디 음악원에서 마리니를,그리고 베를린에서 벡커를 사사했다. 베를린 오페라의 첼로 수석으로음악활동을 시작한 그는 1932년에 스승 벡커를 계승해 베를린음악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마이나르디는 오랜 연주 생활을 통해특히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널리 알렸으며, 레게와 박하우스등과 함께 실내악 활동도 했다. 그의 문하생으로는발도비노·팔므·페레니 등이 있다. 한편 명성있는 연주가 부모를 둔 야니그로는 그 자신도 16세부터솔리스트의 삶을 시작했다. 밀라노에서는 크레팍스, 파리의 에콜노르말에서 카잘스와 그의 조교인 알렉자니안, 그리고 살몬을 사사했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완전한 기교와 강한 감정이 조화를 이룬 것으로보케리니·하이든·슈만·브람스 그리고 드보르자크 등을 음반으로남기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 가르쳤고 지휘자로도명성을 얻었다. 그의 제자로 우리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첼리스트로실바, 발도비노, 로시 등이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악파에서 가장 중요한 첼리스트는 짧은 삶을 산포이어만(Emanuel Feuermann, 1902∼1942)이다. 클랭겔과 벡커 같은거장들의 영향으로 전시대에 머무르고 있던 독일에서 그는 과감한주법으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카잘스가 20세기에 가장 뛰어난첼리스트로 서슴지 않고 포이어만을 꼽았다고 하는데, 그는 빈에서발터를, 라이프치히에서는 클랭겔을 사사했고, 불과 16세에 콜론음악원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클랭겔은 포이어만의 이상한 운지법이 긴 손가락 때문일 것이라고묵인했다지만, 그에게 새로운 차원의 첼로 기교를 열어준 스승은카잘스와 바이올리니스트 세브식이었다. 그는 첼로를 시작하기 전에그의 형과 함께 세브식의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는데, 그것을 첼로에많이 적용했다고 한다. 그의 연주는 강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따뜻했고완전한 기교와 명철한 선율선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는독주자로서뿐만 아니라 골드베르크와 힌데미트, 후버만과 슈나벨,하이페츠와 루빈슈타인 등과 함께 피아노 트리오로도 명성을 떨쳤다. 포이어만과 같은 시대의 또하나의 독일 첼리스트로 횔셔(LudwigHoelscher, 1907∼ )가 있다. 그는 초기에는 램핑에게, 그리고 그후에는 클랭겔과 벡커에게 첼로를 배워 독일의 전통적 주법을 계승했다.
독일의 2세대를 대표하는 연주가로는 팔름(Siegfried Palm, 1927∼ )을 꼽는데, 그는 특히 현대음악 해석에서 가장 권위있는 첼리스트로알려져 있다. 그의 이와 같은 성향에는 스승인 마이나르디의 영향이크게 작용했다. 그로부터 팔름은 현대음악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주법과곡해석 방법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언급해야 할 독일첼리스트로는 타워·매이·핸켈·쉬프 등이 있다. 영국에서는 유독 여류 첼리스트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20세기전반에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첼리스트’라는 그림의 주인공인 수지아(Guillhermina Suggia, 1888∼1950)와 엘가의 협주곡을 세상에 알린해리슨(Beat- rice Harrison, 1892∼1965)이 있다. 수지아는 클랭겔과카잘스를 사사했고, 해리슨은 화이트하우스와 벡커에게 배웠다. 그러나 가장 우리에게 기억을 남긴 여류 첼리스트는 뒤 프레일것이다. 뒤 프레는 런던에서는 프리스, 파리에서는 토르틀리에,모스코바에서는 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했고, 카잘스에게도 배웠다.최고의 훈련을 바탕으로 한 그의 연주는 어떤 남성 연주가보다도 더강한 소리를 낼 수 있었고, 또한 어떤 난해한 패시지도 장애가 될 수없었다. 지휘자 바렌보임의 부인이기도 했던 그녀는 너무 일찍이찾아온 병마로 인해 짧은 연주가의 생을 마쳐야 했다.
스페인 출신으로 기억해야 할 첼리스트로는 카잘스가 가장 아낀 제자카사도(Gaspar Cassado, 1897∼1966)가 있다. 어린 나이에 떠난6년간의 파리 유학은 카잘스로부터 배운 첼로뿐만 아니라드뷔시·라벨·사티·파야 등으로부터의 음악적 양분으로 그를 특별한음악가로 만들어주었다. 1934년에 프랑코의 독재를 피해 피렌체에정착한 카사도는 솔리스트와 실내악 주자로 두각을 나타냈고, 작곡과편곡으로 훌륭한 작품을 여러 곡 남겨 첼로 레퍼토리를 확장하는 데크게 공헌했다. 카사도 연주의 매력은 고상하고 섬세한 음악성과 진정한 예술성에있다고 한다. 그의 음악에는 낭만적 정신, 고전적 엄격함, 그리고자제력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극찬을 받았다. 카사도는 후진양성을 위해 시에나 아카데미와 콜론 음악학교에서 주기적으로 강의를했다.
미국의 이방인과 러시아의 현자 첼리스트들
20세기 초의 미국 악파는 전쟁과 정치적 불안을 피해 이주해 온러시아와 유럽 출신의 첼리스트들에 의해 기틀을 잡게 되었다. 그 중가장 큰 획을 그은 연주가는 피아티고르스키일 것이다. 그는모스크바에서 다비도프의 제자인 그렌과 당대의 가장 기교적 연주를하던 브란듀코프에게 교육받았다. 유럽에 건너와 클랭겔과 벡커에게 몇번 레슨을 받았으나 큰 도움은 못되었다고 그 스스로 회고하고 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자유자재의 테크닉과 아름다운 소리로 주목을받았고, 18세부터 유럽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특히 푸르트벵글러는그의 연주를 듣고 즉석에서 베를린 필 첼로 수석으로 채용해 5년간그와 함께 일했다. 그는 라벨이나 레거 같은 대가들과 그들의 작품을연주했다. 또한힌데미트·스트라빈스키·미요·프로코피예프·마르티누 같은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작곡했다. 1929년 미국에 첫발을 디디면서 독주자로, 또한 호로비츠와밀슈타인과 함께, 또 이후에는 하이페츠와 루빈슈타인과 함께 피아노트리오로도 전세계에 그 명성을 떨쳤다. 그의 연주는 특히 감성이풍부한 낭만음악에서 뛰어났으며, 독특한 비브라토에 의한 무궁무진한음색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그는 엄격하고도 자상한 스승으로 커티스음악원, 보스턴 대학, 그리고 말년에는 남가주 대학에서 가르쳤고,그의 제자로는 파르나스 등이 있다. 로즈(Leonard Rose, 1918∼ )는 미국 태생의 첼리스트로는 최초로세계적 명성을 날렸다. 그는 마이애미 음악원에서 그로스만을, 그리고커티스 음악원에서 살몬을 사사했다. 토스카니니의 NBC 필하모닉에서첼로 차석으로 연주생활을 시작한 그는 1944년의 카네기홀 데뷔로솔리스트로 전향했다. 51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의 독주로 국제적명성을 얻게되었다. 또한 스턴과 이스토민과의 트리오 역시 그의입지를 더욱 높게 했다.
그는 깊이있는 음향과 대가적 기교로 청중을 편안히 만들었다고 한다. 로즈는 1947년부터 줄리어드와 커티스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현재미국에서 활약하는 젊은 연주가의 대부분이 그의 제자로해럴·요요마·데스킨·도이취·하이모비츠 같은 낯익은 이름이포함되어 있다. 로즈와 함께 20세기 중엽을, 그리고 오늘날까지 미국을 대표하는첼리스트로 헝가리 출신의 슈타커가 있다. 헝가리 리스트 음악원에서시퍼를 사사한 슈타커는 이미 그의 조국과 빈에서 잘 알려진첼리스트였으나 더 자유로운 연주 생활을 위해 1948년 미국으로이주했다. 처음에는 교향악단에서 활동했지만 점차 그의 연주는 청중을사로잡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 매력을 한마디로 ‘불과 얼음이 환상적으로 조화되어있다’고들 한다. 냉정하게 작품을 분석하고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해그 속에 내재하는 감성을 정확히 잡아내어 순수미로 접근하는 그의음악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1958년에는 인디애나 대학에첼로 교수로 임명되어 코페·헨켈을 비롯해 수많은 제자를 길렀고,현재는 전세계를 통해 슈타커 사단을 구축하고 있다.
끝으로 러시아 악파를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는 혁명 전에다비도프에 이어 브란듀코프·비에츠비로비치·코졸루포프·스트라이머등이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으나 20세기 전반에는 스탈린의 폐쇄정치로인해 매우 위축된 상황이었다. 냉전이 완화되면서 50년대 말부터는서양과 교류가 재기되었는데, 이때 러시아 악파의 제2세대를 대표하는로스트로포비치와 샤프란(Daniil Shafran, 1923∼1997) 등이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중 로스트로포비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솔제니친을 옹호하면서소비에트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이를 계기로 카잘스 다음으로 금세기의가장 존경받는 첼리스트로 현재까지 임하고 있다. 그는 모스코바음악원에서 코졸루포프를 사사했고, 그 자신도 1956년에 모교의 교수로임명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연주를 초인적이라고 하는데, 첼로의 곡을총망라한 레퍼토리와 가히 신기에 가까울 정도의 테크닉에는 경탄을금할 수 없다. 많은 작곡가들도 그의 연주에 영감을 얻어 첼로곡을 작곡해 헌정했다. 그의 제자로는 마이스키가 활약하고 있다. 러시아를 떠난 후 그는특정학교에 적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콩쿠르를개최하고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후진을 발굴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않는다. 한편 지난 1996년 내한해 우리 청중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간샤프란은 러시아에 머물면서 연주에만 전념한 첼리스트이다. 바로이듬해 타계해 더욱 아쉬움을 주었던 그는 깊은 음악성과 예민한서정성, 우아하고 화려한 기법 등을 투영한 소품 연주로 청중과의긴밀한 대화를 즐긴다. 그는 이를 위해 다른 악기를 위해 씌어진곡들을 편곡·개작해 첼로의 레퍼토리를 늘려놓았다. 그 역시 학교에재직하지는 않았지만 공개 강좌를 통해 음악적 프레이징에 따른 독특한운지법 등 그만의 비법을 후학들에게 전했다.
글·박정준 기자 / 김경순 첼리스트
월간 <객석> 98년 7월호 특집 기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