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데뷔작 ‘GI조’로 호평을 받은 이병헌(39)이 두 번째 글로벌 프로젝트 영화를 선보인다. 다음달 8일 개막하는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다. ‘그린파파야 향기’‘씨클로’ 로 칸과 베니스를 석권한 베트남 출신 트란 안 홍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할리우드 꽃미남 조쉬 하트넷, 기무라 다쿠야 등 한·미·일의 대표 배우가 손잡은 영화다. 인터넷 예매 38초 만에 매진돼 부산영화제 최고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홍콩 대부호의 아들인 의문의 실종자(기무라 다쿠야)와 그를 뒤쫓는 두 남자(조쉬 하트넷·이병헌)를 축으로 하는 범죄 액션 스릴러물이다. 감독 특유의 강한 예술성과 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 이병헌은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하지만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마피아 보스 수동포 역을 맡았다. ‘GI조’에서 할리우드 톱스타에 밀리지 않는 카리스마와 자연스런 영어대사를 선보인 그다. 지난 16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달콤한 인생’에 반한 감독의 구애=출연 제의는 트란 안 홍 감독이 직접 한국을 찾아와 이루어졌다. 이병헌의 미국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은 전격제의였다. 기획서만 들고 온 감독은 심지어 마음에 드는 배역을 고르라고 했다. “‘달콤한 인생’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디테일한 표정과 감정을 표현하는 몇 안 되는 배우”라는 것이 감독의 평가였다.
이문열의 팬이며 이 영화의 첫 모티브를 그의 소설 『사람의 아들』에서 얻었다는 감독의 말에, 이병헌의 마음이 움직였다. 베트남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유학, 활동 중인 감독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다독가일 것”이라고 이병헌은 소개했다. “생소한 감독에게 비춰지는 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내게서는 어떤 또 다른 모습이 나올 수 있을까, 호기심이 생겼죠.”
출연제의는 먼저였지만 촬영은 ‘놈놈놈’‘GI조’ 다음이었다. ‘트리플 악역’ 연기도 시작됐다. “1년 넘게 악인에 빠져 살면서 서로 다른 악인을 표현해야 했어요. ‘놈놈놈’의 창이는 만화적이고, 내면의 악보다 보여지는 느낌이 중요했죠. 이 영화에서는, 인물은 무표정하고 별 동작을 안 해도 관객들은 절로 무섭게 느껴지는 악마성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수동포가 유일하게 약해지는 연인 릴리는 실제 감독의 부인 트란 누 엔 케가 맡았다. ‘시클로’‘그린파파야 향기’에 출연하면서 감독과 결혼했고, 이후에도 남편 작품에만 출연하고 있다.
◆12개국에서 모인 다국적 프로젝트=기무라 다쿠야와는 2005년 ‘히어로’에 이어 두 번째 만남이다. “기획사의 관리가 철저한 아이돌 출신이서인지 기무라 다쿠야는 조용하고 말이 없는 편입니다. 이번 현장에서도 ‘샤이 가이(shy guy)’로 불렸죠. 나하고도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서로가 유일하게 아는 사이니 친하게 지냈어요. 서로 마음의 의지가 됐다고나 할까요.”
이번 영화는 ‘프랑스산’으로 분류되지만 참여한 배우·스태프의 국적은 무려 12개국. “촬영 전 ‘마음껏 놀아보자’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죠. 아무래도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있으니까 자꾸 위축되려 해서요. 다행히 감독은, 배우에게 자기 신(scene)에서 만큼은 모든 걸 맡기는 스타일이예요. 연기 디렉션 없이 마음대로 하라 하고 카메라가 그걸 좇죠. 배우가 그 공간 안에서는 감독인 셈인 거예요. 무한한 자유가 두려우면서도 아주 흥미로웠어요.”
“보통 배우들의 궁극적 목적이 할리우드 가는 거라고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지구의 반쯤은 나를 몰랐으면, 그래서 편히 쉴 공간이 있었으면 했어요. 그래야 배우로서도, 자연인으로서도 풍요한 삶이 가능하니까.”
“세계 시장에서 우리 배우들의 경쟁력은 상당해요. 보통 국내에서는 단점으로 지적되던 것이 강점이 되죠. 뜨거운 열정, 쉽게 흥분하는 냄비근성, 기분이다 싶으면 며칠 날 새는 강행군도 마다 않는 것 등등. (웃음) 언어문제가 해외 진출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얘기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오픈 마인드, 타인에 대한 이해,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 같아요.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배우의 자질이, 세계 무대에서도 가장 중요한 배우의 자질 아닐까 싶네요.”
부산영화제에는 트란 안 홍 감독 부부, 조쉬 하트넷, 기무라 다쿠야가 모두 참가해, 관객들을 만난다.
양성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