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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권위개발
이 중 표 목사 (한신 목회개발원 원장)
오늘밤은 먼저 예수님의 설교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권위있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설교개발의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설교자도 많고 설교의 양도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사회 각 층의 모든 기관에서 공식적인 모든 행사에 설교가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이토록 많은 설교가 선포되고 있는데 과연 그 설교가 어느 정도의 권위가 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권위를 회복하고 예수님처럼 권위있는 설교자의 면모를 개발하는 데 힘써야 되겠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설교를 시작한 이래 항상 자신의 부족을 반성하면서 유명한 설교자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는 설교학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설교자가 되고 싶은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반성의 결실로 「교회성장을 위한 케리그마 설교」라는 박사 논문을 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드린 책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이 책은 모든 설교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려는 학문적 연구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설교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예수님보다 훌륭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위대한 설교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설교한 모세도 있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설교한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신명기서는 모세의 설교집입니다.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아모스 등과 같은 예언자들의 설교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친히 자신이 외친 메시지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외침대로 아브라함, 모세도 소리였습니다. 예레미야 아모스 모든 선지자도 모두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까지는 냉정하게 말하면 설교가 없었습니다. 모두 소리치는 자였습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시작되었고,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설교는 아무리 유창한 언어일지라도 결코 설교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율법학자나 서기관 같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서 왔습니까? 신분으로 말하자면 갈릴리 사람입니다. 목수의 아들입니다. 학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외적인 환경에서 권위가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권위를 두었습니다.
첫째,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에 권위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는 말씀 자체에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의 설교는 구전이나 전설, 선배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학자의 설교라고 했는데 예수의 설교는 이 같은 구전이나 전설이나 학설에 의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는 데서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 학자들은 구약의 율법이나 예언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탈무드나 미슈나나 학자들의 설에 의하지 않고 직접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서가 자신의 증거임을 주장했고(요 5:39), 그것이 구속의 증명임을 성서 전체를 가지고 증명하셨습니다(눅 4:16~22). 부활하신 예수님은 황혼길에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 및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내가 바로 십자가에 죽었다 살아난 예수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지의 중심으로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모든 설교의 진정한 출발이요 근거이며 내용이며 또한 대상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손수 하늘의 복음을 가지고 오셨고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 자신이 복음이며 계시 그 자체였습니다. 그 자신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교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설교자의 권위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에 권위를 두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설교자의 권위도 인정받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는 사람은 최고의 권위있는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죽은 어느 신학자나 이순신 장군만도 못한 권위를 두었기에 강단의 권위가 하락되어 생명력을 잃고 있는 교회가 많습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는 민중이 예수님보다 높아졌습니다. 어느 보수주의 교단은 칼빈이 예수보다 높습니다.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칼빈이 말하기를'하면서 칼빈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참으로 위험한 신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의 권위를 본받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정확하게 구속적 말씀으로 조명하였습니다. 거기에 권위가 있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모세의 능력, 다윗의 용기, 다니엘의 순교적 신앙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말씀은 권위가 없습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말한 것이 나에 대한 증거라고 말할 때 군중은 그의 가르침에 놀라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에 전문적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가 크게 부흥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물질을 가져다가 사도들 발 앞에 두었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가지고 구제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분배상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 보다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불평이 생겼습니다. 그 원망이 사도들에게 돌아가서 그때부터 사도들의 말씀의 권위가 서지않고 성도들의 입방아에 맞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식량배급)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평신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요, 이런 일로 더욱 중요한 말씀을 전하는 사도의 권위가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집사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사소한 일로 말씀을 전하는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목회자의 시급한 문제는 설교자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목회자가 강단의 권위만 바로 세워놓으면 목회는 쉽게 되어집니다. 강단의 권위를 잃으면 그 어떤 권위로도 교회질서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목사님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지 않고 정치와 행정, 사회행사에 시간을 낭비하게 되니 강단이 권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더 전문가가 되어 그곳으로 교인들이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반성할 일입니다. 목사님들은 말씀의 전문가가 되어야합니다. 지금 자신을 반성하여 봅시다. 어느 정도 전문가가 되었습니까? 오늘날 목사님들이 권위를 못찾으니까 가짜 박사학위에 현혹되어 거룩한 성직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설교는 박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목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교회에서 설교자가 목사와 박사 어느 면을 선호합니까? 박사는 강의실에서 권위를 인정할지 모르나 강단에서는 목사만이 그 권위가 인정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신 못차린 목사들이 박사가 목사보다 더 권위있는 줄 알고 명예 박사를 돈주고 삽니다. 그런 박사를 받아서 무엇합니까? 저도 이번에 목회학 박사 학위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것은 다만 설교에 대한 연구 결과일 뿐입니다.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영생과 진리를 자신있게 증거할 때 권위있는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설교자는 사명감에서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언자로서 권위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처럼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분명한 자기 신분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무명의 사람들일지라도 한가지만은 분명한 것이 있어야합니다. 성직에 대한 존엄한 인식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사람들에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 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권위로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자신의 권위를 자기가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는 주신 자의 권위로 부여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위는 자기가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9) 똑같은 일을 하여도 소명의식은 권위를 다르게 만듭니다. 그 일을 시킨 자에 따라 권위가 세워지게 됩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요 6:39)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요 7:16)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요 7:28~29)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이라"(요 8:42) 하였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세가지 권위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전통적 권위입니다. 예를 들면 노인을 존경하고 스승을 존경합니다. 아버지의 권위도 여기 속합니다. 성경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했지만 그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고 여기에 복종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도덕관습이요 전통입니다. 둘째는 법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사회법으로 권위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국가의 대통령이 되면 거기에 상당한 권위가 세워집니다. 교단에서도 노회장, 총회장에 선출되어 법적으로 그 위치를 인정하면 권위가 세워집니다. 운동경기의 코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카리스마의 권위(Charismatic Authority)입니다. 이는 전통이나 사회의 하나의 관습이 아닌 신으로부터 특별히 받은 권위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보통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지도자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카리스마적 권위입니다. 사실 설교자의 권위는 세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천년 교회사의 전통에서 성직의 권위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11제자들도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라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총회가 인정하는 목사고시를 거쳐, 교회 청빙을 거쳐 법적으로 헌법에 의해 작격을 인정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카리스마적 권위가 우리에게 설교자로서 최고의 권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권위를 스스로 인정하게 될 때 무서운 하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가진 것은 카리스마적 권위 하나 뿐이었습니다. 힘없는 노인이 권력이 막강한 바로 앞에 서서 외치는 권위는 상상만 해도 스릴이 있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당시 산천도 떨고 나는 새도 무서워 숨는 정도의 권세를 가진 아합왕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왕상 18:18) 하는 엘리야의 카리스마적 권위가 설교자에게는 있어야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저들은 사회적으로 평범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모스는 뽕나무 치는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데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자신의 권위를 세속적인 입장에서 세우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외적인 것도 갖추는 것이 좋습니다. 가능하면 보수측 교단의 목사님들처럼 언어가 좀 느리고 경건하게 하는 모양도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명함에도 유치원 원장, 민방위 자문위원 심지어 박사학위까지 적어가지고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권위는 하늘이 준 목사의 권위를 가리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그리스도가 세운 사자(使者)임을 바로 알면 스스로의 권위를 알게됩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을 보면 그 권위를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당시에 외적인 권위를 세우려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5~8) 왜 그렇습니까? 사실 사회적으로 말하면 권위를 세울 것이 많이 있지만 나는 거기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예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권위인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목사님들이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옛 사도들의 숭고한 자세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사명감이 퇴색하여질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감을 보여주는 사도행전 20장 22~24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저의 기도실 벽에서 이 종을 이끌어 주는 말씀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목사가 이런 정신으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참 부럽기만 합니다. 요즈음 교계 지도자라는 어른들이 조찬기도회를 한다는데 저는 그런 것이 못마땅합니다. 청와대에 가서 명찰달고 높은 분과 악수한 것을 자랑하고 그분 설교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 아멘"하고 돌아와서 큰 영광으로 자랑합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마땅히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 설교를 못할 바에는 안가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의 손이 저 가난하고 불쌍한 철거민과 노동자와 죄수와 악수하고 오늘 나는 예수의 손을 만졌노라"(마 25:40)하지 못할 바에는 어찌 권세있는 자의 손을 잡고 자랑하는 타락한 목자를 우리는 부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언제부터 타락하고 부패한 정권을 공인하는 조찬기도회에 너도나도 교계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이 야단을 떨어야 합니까? 앞서간 선배들의 피 흘린 순교의 정신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목사님들이 김대중 선생지지 조찬기도회와 김영삼 장로 지지 조찬기도회에 서로 목사 장로 동원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침 비후스테이크 하나 먹으려고 야단이었습니다. 두 분 다 훌륭한 크리스챤 지도자요, 존경할 만한 분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권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인 들러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역사에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여 감동을 주지 못한 것이 우리가 회개할 일이요, 저들을 초라한 지도자로 만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왜 내가 양보하지 못했을까?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말씀을 전해야 할 권위를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는 목사 외에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목사와 친구가 된 장로나 집사가 바르게 된 사람이 있습니까? 정치가가 바로 되었습니까? 노회나 총회에서 목사님과 함께 어울려 정치하는 장로님들 가운데 교회 봉사를 잘 하는 분 있습니까?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는 분을 보았습니까? 이것은 목사님들이 스스로 권위를 하락시킨 책임을 져야합니다. 목사는 누구에게나 하나님 말씀을 전하도록 세우신 주의 사자입니다. 이것은 어찌할 수 없도록 세우신 하나님의 절대예정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늘 이 역사 속에서 정치가가 우리를 만날 때에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구나'하고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심방을 가도 교인들이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축복하셔서 보내신 분이구나'하고 인정받아야 서로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우리 집에 놀러왔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 역사에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민족을 사랑하셔서 실제 주시려는 그 말씀을 전하도록 세우셨다는 이 한가지를 항상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셋째, 설교자는 그 인격에서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권위는 그의 인격에 근거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삶이 곧 설교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는 그의 생활이 말씀과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신 그 설교를 십자가 상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실천하셨습니다. '기도하라'하신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기도하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긴 하지만 하나님 자신에 의해 선포되지 않고 인간을 통해 선포된다는 사실 때문에 설교자의 인격문제가 놓여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육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통해 재 성육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진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룩스(P. Brooks)는 "설교는 인간에 의해 인간에게로 전해지는 진리의 통로이다. 설교는 곧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전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풀턴(J. Poulton)은 "설교자 자신이 곧 그들의 메시지이다. 설교자들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그 모습대로 나타나야 할 필요가 있다…. 의사소통이란 기본적으로 인격적 진실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인격의 권위에 따라 말씀의 권위가 달라집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설교한 내용을 먼저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야 합니다. 분명히 설교자는 말장이가 아닙니다.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아레오바고에 모인 사람들이 바울을 경멸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행17:18) 여기서 말장이는 스팰몰로고스(spemologos)란 말로서 뿌린 씨를 쪼아대는 새를 의미합니다. '쪼아대는 새', '말장이', 이는 행위로 증거되지 못하는 말많은 기독교인들을 향한 이방인의 경멸에 찬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유쾌하지 못한 별명은 오늘도 설교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만일 설교자가 설교만 하고 구체적으로 그 설교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별 수 없이 '말장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박스터(R. Baxter)의 다음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와 일상생활 사이에 불균형을 초래하는 목사들에게 뚜렷이 나타나는 실수는 그들이 설교하기 위해서는 빈틈없이 준비하고 연구하지만, 그 설교대로 빈틈없이 살기 위해서는 조금도 노력하거나 연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를 잘하기 위하여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하지만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 것인가에 관하여도 열심히 연구해야만 합니다. 틸리케(H. Thielicke)는 그의 책 '현대 교회의 고민과 설교'에서 행위로 증거되지 못하는 설교자들의 삶을 설교의 곤경과 비애로 인식하면서 다음과 같은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현재 광고되고 있는 레몬쥬스가 있다고 합시다. 그것이 텔레비전에서 선전하는 사람의 말처럼 정말로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알고싶어할 것입니다. 설교자여! 그대는 자신이 강단 위에서 번쩍 쳐들고 있는 이 한 잔의 레몬쥬스를 몸소 마시고 있는가?" 바로 이것이 선전과 광고 속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던지는 질문인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질문은 설교자가 자기의 설교처럼 살고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자가 자신이 설교한 바대로 '실존(existence)'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틸리케는 계속하여 설교와 생활에 괴리가 있는 설교자를 타작하는 사람의 비유로 말합니다. 한 농부가 타작하는 일을 오랫동안 배워왔습니다. 그 농부는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손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타작을 조건반사적으로 합니다. 이것은 마치 오랜 기독교 전통으로 설교에 익숙해 온 설교자가 조건반사적으로 속이 비어있는 껍질의 볏단을 쉴새 없이 두드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행위로 증거되지 않는 설교는 다만 조건반사적으로 휘두르는 농부의 타작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 메시지 안에 살아야합니다. 확실히 청중들은 설교자가 말한 것이 설교자 자신의 생활 중에서 분명하게 실천되고 있다는 단순한 확신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이 설교자의 말 뿐 아니라 그의 행위와 전 생애를 통해 증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설교자의 최대 권위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설교자로 부름받고 한 생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예수의 인격을 닮는 일입니다. 설교는 결코 명예로운 야망을 위한 방편도, 거룩한 성공을 위한 도구도, 성화된 실용주의를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설교는 위대한 목회자가 되는 보증도, 세계적인 교회가 되기 위한 성공요인도 아닙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생생한 전달입니다. 설교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설교자 자신의 '축적된 신앙과 그 인격, 생활의 총체적인 조명'입니다. 물은 결코 그 자체의 수원(水源)보다 높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설교란 결국 설교자의 평소 인격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설교의 테크닉이 아니라, 설교할 수 있는 인격입니다. 설교자의 평생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꾸준히 함께 있는 일입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요15:27)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요15:5) 설교자는 끊임없이 예수 안에 있으면서 예수의 인격을 닮아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는 말씀에 입각하여 설교자가 닮아가야 할 예수의 마음을 알아봅시다. 설교자는 먼저 예수의 사랑의 인격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숫자가 강조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를 양의 등록된 숫자로, 책에 기록된 성도의 명단으로, 주보에 기재된 통계숫자로 취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있어서 양은 통계가 아닙니다. 그에게 양은 전체가 하나인, 하나가 전체인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양 한 마리의 비유가 말합니다. 그는 한 마리 양의 실종을 1/100의 실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한 마리의 실종은 전체의 실종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 결과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요10:11)의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모든 양들을 대하시지만, "하나를 전체로 알고 끝까지 사랑"(요13:1)하십니다. 설교자가 닮아야 할 예수의 인격이 바로 이 예수의 사랑의 인격입니다. 설교자는 또 예수의 진실한 인격을 닮아야 합니다. 청중들에게 회고되는 설교는 먼저 유창한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좋은 설교는 능력있는 설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감동을 주는 설교는 설교자의 진실한 인격으로부터 호소되는 설교입니다. 사무엘 맥콤(Samuel Macomb)의 말처럼 어떤 유창한 웅변이나 우아한 태도, 그리고 설교학의 기술로도 영적인 실존의 생동적이고 내적인 경험의 결핍이나 손실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설교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는 것은 그 설교의 문화적, 수사학적 표현의 다양성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사람을 향한 사랑과 진실한 인격 때문입니다. E. M. 바운즈는 설교 한 편을 만드는 데 20년이 걸린다고 했지만, 예수는 3년을 위해 30년을 준비했고, 마지막 하루를 위해 33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의 설교는 전인격적으로부터 나온 설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빌라도 앞에서 자신의 그리스도됨을 과시도 부정도 안 하셨습니다(요 18:21). 거짓말을 하기만 하면 인기를 얻고 살아갈 수 있는 순간에도 그분은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는 일이 있어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셨습니다(요 6:66). 그는 진리 자체(요14:6) 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진실한 인격의 결정은 그의 거짓없는 눈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습니다. "가라사대 그를 어디다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4~35) 나사로 사건에 나타난 가장 큰 감동은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이 아니라 그를 향한 예수의 진실한 눈물입니다. 설교자가 예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그의 기적적 능력이 아니라 이 진실한 눈물입니다. 설교자는 또한 예수의 겸손한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성공주의적 가치관이 팽배한 오늘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설교자는 자신을 가끔 치밀한 두뇌의 행정가로, 혹은 사업가로 더 나아가 조직사회의 통제자나 사령관 정도로 생각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기본적인 인격은 겸손에 있습니다. 예수는 참으로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설교자에게 오는 유혹 중에 가장 큰 것은 청중들에 대한 자기 우월의식, 성공과 인기에로의 유혹입니다. 스펄죤은 설교자의 설교가 성공과 인기를 의식하게 될 때 자칫 교만에 이를 수 있음을 경계하였습니다. "설교자의 성공은 자신의 끊임없는 팽창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만일 설교자의 이 성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취라는 것을 잊는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를 낮추시고 말것입니다." 횟필드(G. Whitefield)는 설교자가 누리는 인기의 사악함에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어떤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겸손하게 자신을 고백하였습니다. "당신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의 영혼을 당신이 지켜보아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답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적수들이 나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이 겸손입니다. 설교자는 예수의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계속 복종시킴으로써'(고전 9:27) 스스로 자고하여 교만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빌 2:7~8)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위대한 인격을 형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는 산상 설교나 제자들을 향한 교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인격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자는 지금 전하고 있는 말이 자기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다만 받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설교자로서 지금 서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청지기일 뿐, 결코 신분상 우월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설교할 수 있는 능력도 주께로부터 왔으며,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요, 저들 마음 속에 감동과 능력을 일으키는 것도 나의 호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그 역사에 있다는 이 사실을 안다면 설교자는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예수님은 보내심을 받은 자요,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명자의 겸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1)라고 했습니다. 오직 설교자의 겸손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최대의 과제는 예수의 겸손한 인격을 닮는 일입니다.
끝으로, 설교자의 권위는 희생적 삶에서 그 권위가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땅에 그토록 수많은 설교자들이 지금까지 존재하여 왔지만 지금도 살아서 우리 심령을 움직이는 설교는 그 인격과 일치한 설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최대의 과제는 자기가 외친 설교를 어떻게 재성육(再成肉)시키느냐가 설교보다 더욱 힘써야 할 일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설교자의 권위회복이며 이것이 우리 설교자들에게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의 권위가 어느 정도이며 지금 나의 권위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반성해보아야겠습니다. 본회퍼는 복종하는 하나님의 행동이 백 개의 설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강단의 소리가 메아리로 그치지 않고 역사 현장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자신의 삶을 제물로 삼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재성육되어지는 사건이 설교자에게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높은 권위는 특수한 전문직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권위는 희생적 권위입니다. 어머니의 권위는 섬김의 권위요, 희생의 권위입니다. 어머니의 희생적 권위 앞에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자식일지라도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그토록 존경하는 것은 희생의 권위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알고서야 그 앞에서 절대 순종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의 그 인격 때문에 우리는 그의 권위 앞에 절대복종하게 되고 순종하게 됩니다. 여기에 믿음이 근거하며 우리의 전 존재를 바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는 말에서 세워지기 전에 그의 인격에서 세워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의 권위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문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었습니까? 그에게는 세리와 창녀같은 죄인들, 가난하고 무식한 천민들이 따르는 서민의 친구였습니다. 학벌이 있습니까? 배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용모가 고운 모양도 아니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해서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었고 집 한 칸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외적으로 세울 수 있는 권위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로 벌거벗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예수님의 그 희생이 인류 역사에 최고의 권위를 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할 인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처럼 스데반, 베드로, 바울을 이어가는 생명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권위를 가진 분들을 생각하여 봅시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의 권위를 따라갈 수 있는 분이 누가 있습니까? 오늘날 학력으로나 권능을 행하는 능력으로나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교권을 잡은 교계의 기라성 같은 거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한 시대가 지나면 바람소리처럼 사라지고 그 이름이 잠시나마 기록될 뿐입니다. 그런데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은 한국교회사에 그토록 자랑스럽게 남아 우리에게 살아 있습니다. 권위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어가는 희생적인 권위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인격은 말로 선포되는 설교에 나타나지 않고 행위로 증거되는 설교에 나타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