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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항목은 실제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 및 설명이 존재합니다. 개개인에 따라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인 만큼, 열람할 때 주의해 주십시오. 또한, 본 항목은 실제 사건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으므로 수정 및 주석 작성 시 충분히 고려 후 사실에 따라 추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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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수경 그녀는 누구인가? ¶
"철없는 계집아이" 혹은 "통일의 꽃"
서울특별시에서 11월 6일에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서울지하철공사 간부로, 집에 컴퓨터가 있었을 정도니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제법 부유한 편이었다. 이런 것 때문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1986년 입학하기까지 운동권과 접점을 찾을 길은 없었다. 대학생 때도 운동권과는 관련이 없었고 미스 코리아에 나가기 위해서 사진을 찍기도 하거나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서 김형곤과 짧은 콩트를 하였다. 이런 활동을 보면 부자집 딸내미였고, 잘 나가는 아가씨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시대가 시대였고 대학생치고 사회운동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없다고 할 때였기 때문에 점점 사회운동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래도 이때까지 활동은 풍물반, 학생자치회, 공정선거감시단 같은 내부적인 민주화 운동이었고 통일이나 민족운동 쪽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시대 사항을 보면 완전히 분리가 안되지만 가정형편을 봐도 그렇고 자진해서 입북할 기미는 없었다. 그런 것이 총학생회에서 일하면서 바뀌었다.
3 입북 배경 및 과정 ¶
북한은 1989년 7월 1일로 예정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면서 조선학생위원회 명의로 전국대학총학생회협의회(이하 '전대협')에 초청장을 보냈다. 이 초청장은 조선학생위원회 -> 조선(북한)적십자사 -> 대한적십자사 -> 통일원(현 통일부) -> 전대협의 경로로 전달된다. 전대협은 축전 참가를 준비한다.[1] 총학생회에서 일하던 임수경은 당연히 '용인/성남 지역 총학생회연합 축전준비위원회'와 연결되어 일하게 된다.
북한에 대해 온건적이었던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기에도 어려운 일이 노태우 정권 시절에 가능했던건 당시 전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남북간에도 화해 분위기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공산권과의 대대적인 교류와 조건없는 남북대화를 주장한 7.7 선언으로 고조되었다. 더구나 한정적이지만 민주화의 성공과 맞물린 자유로운 분위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능했다.[2] 즉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자체는 당시의 정부 방침에 어긋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별 제재거리도 아니었다.
5.1 북한 ¶
임수경의 방북은 남북 양쪽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사실 남한에서는 당시 온갖 밀입북 사건이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헐 이제는 꼬꼬마 대학생도 북한에 들어가네', '젖 비린내나는 기집애도 막 나대네' 정도의 반응을 보인 반면, 북한에는 선전이란 측면에서 거의 핵폭탄을 터뜨렸다. 실제로 후폭풍까지 있었다는 점에서 진짜 핵폭탄이었다. 현실에 구현된 문명 위인 문화 폭탄
당시에 온갖 남한 인사의 방문으로 정신없으면서도 즐거워 하던 북한 입장에서도 임수경의 방북은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충격이었다. 당시에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남자들로 남한에서도 제법 명망을 지녀서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이들이 많았지만, 임수경은 중산층 자제에 아직 앳된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거기다 임수경의 모습은 노동운동이나 민족운동에 투신한 투사의 모습이 아닌 발랄한 남쪽 대학생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당장에 북한의 관심은 임수경에게 집중된다. 오죽하면 북한 언론이 김일성보다 더 많이 취재하려고 했던 유일한 인물이란 평가까지 있었을까. 살벌한 사회통제가 당연시 되는 이북에서 임수경이 나타나면 동원하지도 않은 지역 주민들까지 자발적으로 몰려들면서 인근 공장이 모조리 마비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인만큼 북한에서는 선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상투적인 선전 방문을 준비한다. 그런데 임수경은 북한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임수경의 돌출행동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처음에 와서 한 말이 "나는 북한 체제를 동경해서 온게 아니라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왔다." 였고 사람들만 모이면 원고없이 즉석 연설을 하는 등 통제되지 않았으니 선전 담당자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거기다 북한에서는 가보급인 김정일 하사품을 그냥 두고 나오고, 북한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선전용 컴퓨터를 보고는 "어,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똑같은 거네?"(…) 같은 걸로 당시 북한의 자존심에 사정없이 상처를 내었다. 거기에 세습정치도 비판해서 북측을 무안하게 했다고 한다.
특히 북측이 미리 준비해둔 조선은 하나다라는 선전문구를 끝끝내 거부하고 조국은 하나다로 고치게 만들었다.[3] 북의 학생들이 선물해준 스카프도 버리고, 집단체조 관람중에 퇴장하고,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방문도 '다른 행사도 있는데 거긴 왜 가요-_-??'라고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뜻을 보인걸 북측 실무자들이 울며불며 사정해서 겨우겨우 방문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신은 북의 일방적인 체제선전의 도구는 절대 아니란걸 각인시켜 준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이거나 도발적인 발언보다는 젊은 여대생의 존재 자체에 북한 사람들은 엄청나게 열광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임수경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 임수경은 인기 정상의 아이돌이었다고 했다. 당시 임수경은 전형적인 새내기 운동권 여대생의 복장(하얀 티셔츠에 긴 청바지, Gee복장 맞네 운동화)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미지부터가 북한에서는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던 것. 당시 북한에서 대학생의 이미지라고 하면 그저 시커먼 옷을 입고 당의 규율이나 주체사상만 외워야만 했던, 수동적이고 암울한 이미지였는데 작고 당돌한 여성이 캐주얼한 복장으로 통일 통일을 외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북한 대학생들은 몰래 모여서 "남조선의 대학생이 저렇게 당당하게 다니는데 우리는 뭐냐.'라고 한탄 비슷하게 말하기도 했었다고.
임수경이 가는 곳마다 북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보려고 난리치고 환호하고, 기자들이 플래쉬를 터뜨리고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종종 노래해보라고 기자들이 요구하기도 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전대협진군가> 같은걸 불렀다고 한다. 이후에 이 두 노래는 북한에서 유행한다. 오죽했으며 이런 예상하지 못한 임수경의 선전전(?) 덕분에 이익을 본 남한 정부에서 뜻하지 않게 공을 세웠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할까.
5.2 남한 ¶
방북 자체야 임수경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했지만, 문익환 목사 같은 명망있는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대학생 운동권의 핵심인사도 아닌 평범한 여대생의 입북은 남쪽에서도 큰 관심사였다. TV 대담토론에서도 거론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치기어린 여자애의 행동으로 취급되었고, 임수경의 방북으로 인해 남한이 뜻하지 않게 선전 효과를 얻었다는 점 때문에라도 썩 나쁘게 평가되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이 발표된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임수경이 직접 기초했다는 이 선언문은 당시 화해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군사적 긴장 완하, 평화협정 체결, 남북불가침 선언처럼 상식적이고 누구나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중에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라는 문구가 들어있었다. 꼭 북한의 주장을 따라서만은 아니었고, 당시 전대협 역시 주한미군이 자주통일의 방애물이라는 이유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임수경은 단계적이란 용어를 빼자는 북한의 주장을 물리쳐냈다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주한미군 철수는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었다.[4] 탈냉전 분위기가 강해지는 중이었다곤 해도, 당시 남한에서 주한미군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우리나라를 구해준 군대'였다. 거기다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강하게 부르짖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도 거는 일이었다.
덕분에 남측에서 임수경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군 복무시에 총기사고로 죽은 오빠는 군내 의문사로 거론되었고, 10촌 이내 친척 가운데 월북자가 8명이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를 근거없는 기사가 나왔다. 임수경의 어머니는 막내딸인 임수경을 학생운동에서 떼어놓기 위해서 억지로 신청해서 1988 서울 올림픽 우정의 사절로 뽑혔다.
7.1 북한 일명 임수경 쇼크 ¶
위에서도 설명했듯 당시 북한 사회가 이 사건으로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다. 임수경이란 인물 자체가 당시의 북한의 젊은층에게 굉장한 충격이었기 때문. 바로 이 때문에 북한에서 임수경은 '자유'를 상징하게 되었다. 방북 후 북한 대학생 사이에서는 원래는 금지된 미국의 상징인, 임수경과 같은 면티에 청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이 일명 림수경 복장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전대협 진군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북한 전역에서 유행했다. 또한 북한은 중산층 자제인 임수경을 통해서 남한이 어느 사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었다. 즉 임수경의 여유롭고 자유분방한 행동과 경제적 여유를 통해 남한의 경제적 수준과 남한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 덕분에 북한에서 사상투쟁(사실상의 사상통제)를 하느라고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임수경의 가족들도 뜻하지 않게 북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1990년대 초반 남북총리급 회담이 열렸을 때 임수경과 가족들이 무사하다는걸 믿지 못한 북한 기자방문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통일열사의 가족이 고초를 당하는지 확인하고, 만약 사실이면 비판을 하겠다'는 의도에서였다. 헌데 임수경의 집에 들이닥쳐보니 임수경의 가족들은 정말로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임수경 가족의 생활상까지 북한 TV로 방영(사실상 생중계)되었다.
남한기준에서 보면 임수경 가족들의 처지는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 임수경의 언니는 직장에서 짤렸고, 임수경의 부친은 짤릴 위기에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는 조건으로 정권과 타협했다가 결국 시간이 흐른뒤에 자의반 타의반 결국 그만둔다. 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 모두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누군가가 밀입남했다가 돌아올 경우 본인은 사형, 가족과 일가친척들은 수용소로 들어가는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판이었으니 임수경의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범죄자의 집안에 그 귀한 컬러 TV, 소파, 냉장고 등 온갖 가전제품이 있고 (임수경은 당시 남한 기준으로도 꽤 잘사는 집안임을 감안하자.) 냉장고를 열었을 때 통조림이나 우유 등이 쏟아 나오는 모습에 북한 주민들은 그만 눈이 돌아갔다고 한다.[5] 체제경쟁에서 졌다는 걸 TV생중계를 통해 보여주며 망했어요.
이건 임수경의 재판에서도 이어졌다. 북한은 로동신문을 통해 임수경이 15년 구형에 5년 징역을 받았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한국 정부를 비판했지만, 제대로 된 재판을 열고 사형이 아니라 15년형을 구형받고, 겨우 5년형만 받았다는 사실이 북한에서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6] 게다가 그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3년반 만에 출소했다는 사실까지 북한 언론에 보도되어 충격을 안겨주었다. 반역자를 사면하는 남한 정권이라니... 사실 북한 사람들은 임수경이 휴전선을 넘어 돌아갈 때 죽으려고 돌아가는 줄 알고 슬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다 감옥에서 편지와 일기를 쓰고 책도 읽는다는 등 하나하나가 충격이었다.
7.2 남한 ¶
남한에선 임수경 방북 사건을 북한에 비해 비교적 가볍게 받아들였다.(물론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지만) 북한에서 임수경이 했다는 남한 정부 비판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지는 않았다. 거기에 당시 남한의 넉넉한 경제력과 (북한보다 상대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상 그리고 자유로움을 선전하는 뜻하지 않는 기회를 가지는 등 이익이 더 컸기 때문에 이적행위(?)보다는 북한에 변화의 바람을 약간이라도 불고온 통일의 기수라는 면이 더 강조되었다.(하지만 당시 노태우 정부가 임수경에게 압박을 가한건 사실이고, 보수측에서 엄청 욕하긴 했다.) 더욱이 임수경 방북 이후에 80년대부터 90년대말까지 쉴새없이 온갖 사건이 몰아쳤기 때문에 재판 이후에는 금새 잊혀졌다.
8 사건 이후의 임수경 ¶
출소 이후에는 시사월간지 객원기자로 일했고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 부대변인,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서강대 언론대학원을 다니다가 만난 한국일보 생활과학부 최진환 기자와 1995년 혼인하여 아들을 두었다. 2001년 여름 정부의 허가아래 재차 방북하여 북측 인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2003년 8월 15일 광복절 특집으로 문성근이 진행하는 KBS '인물현대사' 8회에서 임수경 방북사건을 다루었다. 전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준 엄청난 사건의 주인공이라 선거때마다 정계진출설이 흘러나왔고, 이미 2000년 당시에도 386인사들과 관련하여 "새천년 NHK 사건"으로 여론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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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들이 전달해준 초청장을 임수경 방북 이후 '북의 사주와 지령'으로 발표해서 비웃음을 자초한다.[2] 당시는 김종필같은 보수인사들도 국가보안법 대폭 개정를 주장할 정도였다. 국가보안법에 손대는 것은 북한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최근의 보수우익을 생각해보면 ㅎㄷㄷ
[3] '조선'이란 공식국호를 쓰고 있는 북의 입장에서 '조선은 하나다'는 한마디로 우리가 정통이고 남한은 사이비짝퉁정권이란 주장이다. 임수경은 이걸 거부하고 민족 모두가 공감할 수 잇는 '조국'을 사용한 것이다. 출발 직후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도 내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4] 70년대부터 지미 카터 대통령은 박동선 로비사건과 인권외교 등의 명목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꾸 씨끄럽게 굴면 주한미군 철수하겠다능'이라며 위협을 가했고, 박정희는 '그러면 내가 먼저 철수시키겠다'며 세게 나가는 등
[5] 북한은 당시 '5장 6기'라며 이불장, 옷장, 책장, 식장(찬장), 신발장의 5장, TV 수상기, 냉동기=냉장고, 세탁기,재봉기=재봉틀, 선풍기, 녹음기의 6기를 갖춘 집은 평양의 상류층 등 전체인구의 10%에 불과했고,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고난의 행군 당시 경제가 쇠퇴했다는 걸을 고려하고 그 이후에도 80년대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한걸 보면 더 악화되었을수도 있다.
[6] 조사과정에서 안기부는 법률에 엄연히 보장된 변호인과 가족의 면회도 일체 거부하고 각종 증거조작에 공갈협박 등 온갖 종류의 인권침해를 저질럿고, 국제적으로 많은 문제가 되었다.
[7] 김대중은 야당 총재 시절 '최고의 반공은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면서 임수경 사건을 하나의 예로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