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쿠 남부의 도시 고치..
근대 일본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가
이곳 도사 출신..
이곳에서 아이치의 "이스지츠"산 등산을 위하여 이동하려고 숙박했는데..ㅠㅠ
적설로 차량 통행 금지..
다시 북부의 고속도로로 올라와야하네..ㅠㅠ
왕복 200km이상을 알바했다..
그래도 고치 구경은 good..
일본 여행은 참신함은 있으나 가격 대비 가성비가 현격하게 떨어진다..
아침 일찍 고치 시내를 달렸습니다..
이곳 고치를 대표하는 인물은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료마는 일본인들에게 풍운아로 알려져 만화와 소설을 소재가 되고, 그가 방문한 곳은 모두 유명한 관광지..
그러나 천황제를 부인하고 자유국가의 건설을 희망한 현대 일본의 이상과는 부합되지 않는 인물..
일본인들에게 인기있는 인물이지만 이런 이유로 돈이나 여러가지 자료에 많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한번 옮겨 보아야죠!!
"일본 에도시대의 무사로, 대정봉환을 주도해 실질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 서로 대립 관계에 있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 및 막부와 번의 통일을 성사시킴으로써,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35년에 태어나 67년에 생을 마감..
불과 32년을 삶을 살았습니다만 굵고 짧게 불꽃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
1835년 11월 15일 지금의 시코쿠[四國] 남부 고치현[高知縣]에 해당하는 도사번[土佐藩]에서 향사(鄕士)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3년 에도[江戶]로 가서 지바(千葉) 데이키치(貞吉)의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 도장에서 검술을 익히면서 왕권 복구와 서양 척결을 주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의자들과 교유하였다.
1861년 고향에서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에 가담한 뒤, 이듬해 친(親)서양파인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죽이기 위해 다시 에도로 갔다. 그러나 오히려 가이슈의 설득에 감명을 받고, 이때부터 가이슈의 제자가 되었다. 이어 통상과 해운에 눈을 뜬 뒤, 1863년 고베[神戶]에 해운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뒤에 해군지원대로 바뀌었다.
1866년에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을 성사시켜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에도막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듬해에는 막부와 번을 통일시켜 에도막부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역사적인 사건 대정봉환(大政奉還)의 구상을 성사시켰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이래 675년 동안 계속되던 봉건시대가 끝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867년 11월 15일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함께 막부순찰대의 습격을 받아 교토에서 33살의 나이로 암살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함께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힌다."
자유국가를 신봉하여 천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에 의하여 암살당했다고 보아야 하겠죠!!
료마의 신념에 의한 근대일본이 탄생하였다고 일본의 싸가지가 조금 있어졌을까요??
근대 일본 사상의 초석을 만든 넘은 만엔권에 등장하는 후쿠자와 류키치..
천황제를 신봉하며 아시아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다는 "탈아입구"이론을 만들어 일본을 어정쩡하게 만든 장본인..
일본 근대를 대표하는 무사이자 사상가인 료마와 배치되는 인물..
그 넘도 한번 옮겨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규슈의 나가쓰번에 있는 하급무사의 집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한학을 공부 하였다. 그 후 독학으로 영어를 배웠으며1858년 네덜란드어 학교를 개설하고 3차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순방, 귀국 후1868년에 신젠자에 게이오 대학을 세운다. 메이지 정부는 후쿠자와를 등용하려 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전적으로 교육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873년 계몽지식인의 모임인 ‘명육사’를 창립하고 동인으로 활약, 『서양사정』, 『학문을 권함』, 『문명론의 개략』등을 저술하고 ‘명육(明六)잡지’, ‘민간(民間)잡지’ 등에 기고했다.
1882년에는 ‘시사신보’를 창간하면서 군비확충, 조세증수, 관민협조로 부국강병 하여 서구열강의 대열에 들것을 주장하고 한국의 유길준 · 김옥균 등의 개화운동을 지원하고 ‘한성순보’ 발간을 도왔다. 봉건적 무단질서로 부터 근대적 언론질서로 전환기를 살았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봉건제도에 대한 가장 과감한 투쟁가인 동시에 일본에 자본주의 문명을 추진한 대표적 교육사상가였다."..
그래도 부국강병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 희생한 이런 사상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일본이 있다고 보아야 하겠죠!!
이런 사람들은 존경하고 또 추종하려는 정신~~
살짝 부럽고 타인에 대한 존경심과 이해심이 부족한 우리의 자세가 많이 아쉽습니다..ㅠㅠ
고치역의 모습..
고치를 유명하게 하는 또 하나의 캐릭터..
호빵맨입니다!!
작가가 이곳 고치 출신이라고 하네요..
잡다한 관광지가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고치의 유명한 관광지는 3곳..
일요일에만 열리는 일요시장!!
일요 시장 인근에 위치한 고치성 공원..
그리고 스님과 용접공 아가씨의 사랑으로 유명한 조그만 강을 연결하는 다리 "하리마야바시(はりまや橋)"..
하리마야 바시는 살짝 싱겁기도 하고, 일요시장은 뻔하고~~
그냥 한두시간이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외에도 인근의 오오츠카 미술관과 우다츠 마을도 소개를 하지만 별 매력이 느껴지지 않네요..ㅎㅎ
일요시장은 오픈 준비가 한참입니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어설픈 다리 하리마야바시..
시내 중심에 위치하여 돌아다니다보면 저절로 마주치는 다리입니다!!
이런 작은 다리도 관광지로 만드는 일본애들 상술이 놀랍습니다..
이곳 다리를 중심으로 중심상가가 밀집되어 있습니다!!
시장 구경..
물건도 그다지 저렴하지 않고 특색있는 물건이 아닌 뻔한 생필품 위주~~
왜 유명한지??
이 복장이 시코쿠 헨로미치를 하는 정통 복장입니다..
아무래도 헨로미치를 가장한 걸인같은 코스프레입니다!!
그래도 추운 날씨에 시주를 기다리는 것이 애처러워서 100엔 시주했습니다!!
고치성입니다..
덴슈가쿠(天修閣)도 실 지겹네요..ㅎㅎ
그래도 조금 설명..
"고치성이 구축된 오타카사산(山)은 남북조시대에 오타카사마츠오마루의 저택이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가케가와 지방에서 임명된 야마우치 가츠토요가 오타카사산에 새롭게 근세 성곽인 고치성을 쌓으며 4층 6단의 천수각을 세웠다. 산꼭대기에 혼마루(주성)와 니노마루(둘째 성곽), 동쪽 하단 아래에 산노마루(셋째 성곽)를 배치하고 니노마루에는 번주의 거주 공간인 궁전을 세웠다. 천수각은 1727년 화재로 소실된 뒤 1747년에 현존하는 망루형 천수각으로 재건되었다. 낡은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가케가와 5만석에서 일약 토사 24만석의 태수가 된 야마우치 가츠토요 번주의 생각이라고 한다. 또한 천수각과 맞닿아 있는 혼마루 궁전(가이토쿠칸)은 몇 안되는 현존하는 궁전 유물이다. "
설명에 등장하는 "세키가하라" 전투..
일본의 근대 역사를 완성한 전투입니다..
알고 넘어 가자는 생각에 또 한번 옮깁니다..
"
전국(戦国) 시대를 완전히 마감하는 전투인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싸움이었다.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이에야스에게 자신과 요도도노(淀殿)사이에 생겨난 6살 난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부탁한다고 유언으로 남겼고 배신을 하지 않겠다는 혈서까지 쓰게 했다. 이에야스는 울먹이면서 유언을 지키겠다는 맹세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지만 결국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자신보다 위인 히데요시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기꺼이 그의 수하에 들어갔지만 그의 아들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다음 세대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아직 전국 시대가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미츠나리는 일본의 전국통일은 이미 히데요시가 이루어 낸 완료형이고 자신은 히데요리를 보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 차이에서 전쟁은 일어난 것이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를 물리쳐 히데요리를 벌거벗은 주군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상당히 고지식한 성격으로 어느 날 모오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제철이 아닌 복숭아를 히데요시에게 헌상하자, 주군께서 배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라고 반려했다고 한다. 그는 자로 잰 듯한 성격에 융통성이 전혀 없어 많은 적을 만들었다.
싸움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토쿠가와 이에야스,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이 지휘하는 7만명]과 서군[이시다 미츠나리, 모오리 테루모토(毛利輝元),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지휘하는 8만명]의 싸움이었다.
딱 한 나절 만에 결판이 나고만 이 전투는 처음에는 동군이 포진이나 군세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사전교섭의 명수, 밀약의 프로였던 이에야스는 필승을 확신하고 뛰어든 전투였다. 그는 이미 싸움 시작 전 적군장수 80여명에게 180통 이상의 편지를 보내서 자기편으로 투항할 것을 권했다. 싸움 초기에는 호각지세였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배반으로 전세가 결정적으로 역전된 것이다. 처음에는 히데아키가 밀약대로 행하지 않고 관망하며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그는 히데아키의 진지에 포를 쏴대며 약속대로 빨리 돌아서라고 종용한다. 히데아키가 어쩔 수 없이 배신에 가담하자 전쟁은 쉽게 결판이 났다. 이것은 동일본의 쌀 중심의 경제와 서일본의 은(銀)중심의 경제가 부딪힌 전쟁으로도 유명하다. 결국은 농업중심의 경제가 패권을 쥐고 일본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 3년 후에 이에야스는 쇼오궁(将軍)이 되어 막부를 개설한다. 그리고는 단 2년만에 그 지위를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준다. 이 때 히데타다의 나이가 겨우 27세였다. 이는 〈토쿠가와 정권은 한시적인 것으로 히데요리가 성장하면 정권은 토요토미 가문으로 온다〉고 믿고 있는 오오사카성 토요토미 측의 소박한 믿음을 단번에 불식시키고 토쿠가와 정권은 토쿠가와가 세습한다는 새로운 룰을 세상에 보여 준 것이다. 토요토미 측으로서는 상당한 쇼크였다.
1611년 쿄오토의 니죠오성(二条城)에서 히데요리를 접견한 이에야스는 그의 훌륭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고 질린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히데요시의 은공을 잊지 않고 있는 다이묘오들이 언제 히데요리를 추대할지 모른다며 자신이 살아생전에 토요토미 정권을 궤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을 굳힌다. 당시 그의 나이 70세였다. 3년 뒤인 1614년 오오사카성(大阪城) 겨울전쟁에서는 히데요리가 재건한 호오코오지(方広寺)의 종에 새겨진 글자인 〈国家安康〉이라는 말속에 이에야스를 저주하는 문자가 있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호오코오지 종명 사건(方広寺鐘銘事件)이 일어난다. 결국은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에야스는 또한 관리 임면권이 조정에서 자신에게만 주어졌는데 히데요리가 마음대로 자신의 가신을 관리로 고용했다고 주장했다.
결국은 오오사카를 포위한 이에야스가 성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 해자[소토보리(外堀)]만을 메우기로 합의했지만 이에야스는 안쪽 해자[우치보리(内堀)]까지 메워 성을 벌거벗겨 놓았다. 다음해 여름의 오오사카성 여름전쟁은 이에야스가 재차 성을 포로 공격하여 난공불락의 성이 함락되고 화염에 쌓인 성에서 요도도노와 히데요리가 자살함으로써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도요토미가의 건곤일척의 전투..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메이지 유신전까지 260년간 에도 막부를 유지..
도요토미가의 편에 가담했던 무장들은 개털이 됩니다!!
고치성의 성주는 줄을 잘 서는 바람에 오랜 세월동안 명성을 유지했군요!!
고치성의 풍경입니다..
시가지도 조망하여 보고..
이제 이스지츠산을 거쳐서 마지막 고치 관광지이며 숙박지인 마쓰야마(松山)으로 이동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