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사업을 추진" 나용균 보사장관, 당면문제에 언급(정읍)
“福祉事業을 推進” 羅容均保社長官, 當面問題에 言及(井邑)
동아일보 1960년 10월 6일자 기사중에서
[원문] 나용균 보건사회부 장관은 3일 태극호 편으로 첫귀향하여 보사부의 당면문제와 사회복지시설 확충문제에 대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보사부의 당면문제= 과거의 보사부는 유명무실했으나 외국의 예로보면 가장 중요한 부처이다. 현재 예산관계로 제대로 일을 못하고 있지만 작년에 비하여 근 백억환의 증액을 보았으므로 앞으로 일을 좀 해볼 생각이다.
우선 상이군경연금을 지급하는데 있어서 허위대상자 약 7만명을 정리한 후 1위 18만환, 2위 12만환, 3위 6만환 정도를 지급하는 동시에 국립요양소에서 치료중인 환자의 급식비 20환을 150환으로 약대 30환을 300환으로 올리도록 애쓰겠다. 또한 국민주택을 활용하여 주택난을 해결하도록 하겠다.
복지사업에 대하여 = 국공유지를 일부 매수하여 고층아파트를 건축하여 부지에서 생기는 재원으로 판잣집을 없애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예산이 세워지는대로 호남지방에 종합병원을 세울 계획이다.
[해설] 신문기사가 쓰여진 1960년 10월은 불과 5개월 전에 이승만정권의 장기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에 의해 수립된 제2공화국(윤보선대통령, 장면 총리 : 의원내각제)이 들어선 시절이다. 당시 나용균 보건사회부 장관은 정읍군 영원면 출신으로서 모처럼 기차를 타고 고향을 찾았을 때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인터뷰한 내용이 기사화된 것이다.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복지업무를 담당한 부서의 장으로서 국민들의 삶을 위해 매우 중요한 부서임을 강조하면서 거기에 수반되는 예산이 부족함에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표현되어 있다. 당시 화폐의 단위는 지금의 '원' 대신 '환'이라는 단위를 사용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상이용사들에 대한 지원사업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시절이라 허위로 신고하여 그 혜택을 받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많음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주택난이 심하여 도시빈민들은 이른바 판잣집이라는 무허가 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파트를 건설한다는 부분도 주목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도시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도시미관이 향상되는 긍정적 측면이 있겠으나 아파트에 입주하여 관리비를 지불하고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갈 능력을 가진 자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대부분 빈민들은 또다시 도시 변두리를 향하여 이동하여 또다른 판자촌을 형성하는 악순환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고향을 방문한 중앙에서 성공한 인사답게 고향사람들을 위한 공약도 제시한다. 호남 지역민들을 위한 종합병원 시설인데, 어느 지역에 어떠한 규모의 병원시설을 만들겠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빠져있다. 실무자선에서 구체화된 계획은 아닐테고 일종의 정치적 발언이라 보면 될 것 같다.
* 나용균 : 1895(고종 32)∼1984. 독립운동가·정치가.
전라북도 정읍출신. 일본의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유학하고 있던 중,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 발표와 제1차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식민지국가의 독립분위기에 따라 동경에서 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 등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 일대의 한국인 유학생을 동원하여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뒤 자금조달을 위하여 일시 귀국하여,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 등을 방문하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동경으로 돌아와 준비를 계속한 끝에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학우회 명목의 집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 데 참여하였다.
2·8 독립선언 후 주모자가 붙잡히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같은해 4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7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으며, 임시의정원 법제위원과 정무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11월에는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상해를 출발, 다음해 1월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1922년 5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발전적 해체를 논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국민대표회주비회에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곳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제헌의원·보사부장관·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 국회의원 역임기간 : 1대 정읍군 갑(1948년 5월 31일~ 1950년 5월 30일), 4대 정읍군 갑(1958년 5월 31일~1960년 7월 28일),
5대 정읍군 갑(1960년 7월 29일~1961년 5월 16일), 6대 정읍군 (1963년 12월 17일~1967년 6월 30일)
# 보건사회부 장관 역임기간 : 1960년 9월 12일 ~ 1961년 1월 29일(의원내각제하에서 국회의원과 장관의 겸직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