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헤르만 헤세 지음
- 출판사
- 민음사 | 2002-07-30 출간
- 카테고리
- 소설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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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끊임없는 자기성찰의 결과물인 크눌프,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시스와 골드문트에 이어
'황야의 이리'를 접하면서 느낀 점은 이 책이 기존의 책들보다 읽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책에 사용된 정신분석학적인 접근방법과 환상적인 기법이 현실과 환상을 모호하게 만들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구분하기가 싶지 않았고, 더불어 헤세의 수많은 분신들이 등장하여 누가 실존
인물인지 분신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황야의 이리'는 고도의 개성화 때문에 시민이 될 수 없는 하리 할러라는 특이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개성화가 고도로 진행되면, 개성은 자아에 반역하고 나아가 자아를 파괴하려는 경향을 띠기 때문에
성자 쪽으로도 탕아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강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나, 어딘가 허약한 구석이 있어서
혹은 게으르기 때문에 자유롭고 거친 세계로 도약할 수 없고 시민사회라는 무겁고, 버거우면서도 포근한 별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세상 속에 있는 그의 상태이고, 그가 세상과 얽혀 있는 모습이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이 중에서 가장 강인한 자들만이 시민의 땅의 대기를 뚫고 우주에 닿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체념하거나 타협하고, 시민 사회를 경멸하면서도 거기에 귀속되어서, 결국은 살아남기 위하여 그 사회를 긍정함으로써 시민사회를 강화하고 찬미하고 만다. 이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비극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불운이요, 불행인 셈인데. 그 불행의 지옥 속에서 이들의 재능은 단련되고 풍성해지기도
한다. 세상과 연을 끊어버린 사람들만이 절대의 경지에 나아가고 놀랍도록 황홀하게 몰락한다. 이들은 비극적인 인물이고 그 수는 얼마되지 않는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 그러니까 시민사회에 얽매여 있으나
그래도 시민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는 사람들에게는 제3의 세계가 열려있다. 그것은 가상적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세계, 즉 유머의 세계이다."
하리는 일반 시민들의 "만족과 건강, 쾌적함, 시민들의 잘 길들여진 낙관주의, 평범하고 정상적이고 평균적인 것이
돼지처럼 살을 찌우며 번식하는 것"을 너무나 혐오하며 그럴 때마다 무엇인가 내부의 '황야의 이리'가 미친듯이
날뛰며 날을 세우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길을 잘못 들어선 짐승인 것 처럼 느껴지고 자신의 구원은 삶에서가 아니라 죽음에서 구원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늘 죽음에 이르는 길이 열려있음에 안도하며 이를 위안과 버팀목으로 삼아 하루하루
견뎌낸다. 그리고 자신의 쉰살 생일날을 자신에게 자살을 허용해도 되는 날로 미리 예정해 놓고 기다리는 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두려움에 떨며 삶의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삶을 살아가기에도 그렇다고 죽기에도 용기가
없는 하리는 자신이 '일반적인 시민'으로 살기에도 '황야의 이리'로 살기에도 힘든 존재임을 깨달은 인물이다.
시민들사이에 있다가도 어느순간 '황야의 이리'가 불쑥 튀어나와 자신이 시민들과 어울리는 것을 방해하고,
'황야의 이리'로 고독을 씹다가도 시민적 삶이 그리워지는 그는 늘 고통과 좌절속에서 죽음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그가 절망의 정점에서 헤르미네라는 창녀를 만나고, 그녀를 통해 향락적인 삶과 일반적인 삶의 행복이 무엇
인지 접하고나서 여태껏 누려보지 못한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어느듯 '황야의 이리'는 사라지고 시민적인 삶에
적응해간다고 느꼈지만 문득 문득 '황야의 이리'가 다시 자신을 고독으로 내세우면 이와같은 삶이 다시 권태롭고 무의미해짐을 느끼며 갈등한다. 가벼운 삶, 가벼운 사랑이 자신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음을 다시 인식하게 된 그는 마지막 작별을 앞두고 헤르미네의 초청으로 '가면무도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곳에서 환각제를 먹은 하리는 자신속에 내재되어 있던 수많은 자아를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만, 어느방에서 파블로와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헤르미네를 보는 순간 그녀를 칼로 찌르고야 만다.
그런 하리에게 파블로와 모짜르트, 괴테가 나타나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리는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
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리 할러라는 인물은 일반인들이 만족하는 삶을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일반인들과는 어울릴 수 없어 '황야의
이리'처럼 고독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그는 오로지 죽음
만을 구원으로 삼는다.
자신과 같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중에는 더 도약하여 성자나 해탈의 경지에 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도 나약한 하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하루를 보낼 뿐이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헤르미네는
자신에게서 일반적인 삶을 이끌어내주고 일반인과 함께 살아갈 가능성을 던져주었지만
다시 예전의 '황야의 이리'가 그리워진 하리는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고통과 갈등을 끝내는 마지막 구원의 방법인 죽음만을 생각하는 그는 '가면무도회'
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헤르미너의 죽음을 통해 즉, 자신의 내면속에 또다른 자아를 인정하고 자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깨달음,,그것은 바로 "유머"였다.
해탈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시민처럼 살 수도 없는 운명을 가진 그가 현실세계와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진지함>을 벗어나 <유머>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유머>는 거짓인간 즉 시민이 될수 없고, 그렇다고 성자들처럼 절대의 경지에도 나아갈 수 없는 하리와 같은 인간에게 남은 제 3의 길,,
즉 자신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서, 자신속에 수많은 또다른 자아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또한 세상의 거짓을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가벼움을 배우는 것 그것만이 바로 '황야의 이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며,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정신분열을 극복해나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