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세손 정조는 데리고 태화정을 방문하였다.
영조는 부용당 앞의 연못을 잠용지(潛龍池)라 하고 친필 현판을 걸게 하였다.
이때 이 집은 인현왕후의 봉사손 구윤경이 살고 있었다.
구윤경의 아들이 정조 때 사관이 되었다. 그 아들이 정조와 단둘이 보낼때였다.
정조는 그 사관이 눈에 아주 익었다. 정조가 먼저 사관에게 말을 건냈다.
"너는 누구냐?" "너의 집은 어디냐?"
그 사관은 태화정을 자세히 왕에게 말하였다.
"내가 할아버지(영조)와 함께 너의 집에 갔었다"
정조는 영조와 함께 방문하였던 그 집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관은 집에 돌아와 아버지 구윤경에게 자세히 알렸다.
구윤경은 이 집에 영조가 세손(정조)와 함께 방문해 잠용지(潛龍池)라고
현판까지 써준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집에 걸어두었다.
이 기록은 왕실에 알려졌고 마침내 장서각에서 이 집의 자세한 기록을 보관하였다.
이 집의 기록은 <구윤옥가도형(具允鈺家圖形)으로 오늘날까지 궁가의 전형으로 전해내려온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의 잠저가 있던 곳으로 인조의 외가였다.
조선말에는 이 집은 당시 세도가 안동 김씨이며,
영의정을 지낸 유관 김홍근(金興根)(1976 ~1870)의 소유로 넘어갔다.
경상도관찰사·영의정 등을 역임한 김흥근이 극심한 안동김씨의 폐단 속에서도
고고한 인망을 받았던 것은 정수동의 도움이 컸다.
정수동이 김흥근의 문객으로 자주 그의 집을 드나들 무렵
남의 돈 2만 냥을 가로챈 사실로 김흥근이 원망을 듣고 있었다.
어느날 김흥근의 집을 찾은 정수동에게 사색이 된 계집종이 달려와
“세살 된 어린 자식이 돈을 삼켜 목에 걸렸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당황하며 물었다.
정수동은 점잖게 아이가 삼킨 돈이 남의 것인지 아니면 자기 것인지를 물었다.
계집종이 자기 것이라 하자 이번에는 몇푼을 삼켰느냐고 물었다.
한푼이라고 하자 정수동은 “아무 걱정 말아라.
남의 돈 2만 냥을 먹고도 아무 탈이 없는데 자기 돈 한푼 먹었다고 죽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말을 방 안에서 들은 김흥근은 그 길로 2만 냥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정수동에게 자신의 청렴을 구해주었다며 고마워한 뒤 두고두고 그 말을 교훈으로 삼았다.
그 후 이집은 헌종의 후궁 경빈 이씨의 사당인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
이 집은 '이문안 대감집' '순화궁'으로 불리었다.
그 사당 순화궁은 1908년 서부 반송방(盤松坊) 미동(渼洞)으로 옮겼다가
1911년에 동부 인창면(仁昌面)의 이씨 묘소로 옮겼다.
순화궁을 이전하고 난 후 빈집으로 남는다.
이 집은 친일파 매국노로 지탄받는 이윤용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윤용(李允用, 1854년~1939년)은 조선 말기의 정치인이며 한일 병합 과정에서 일본에 협력했다.
유명한 정치인 이완용의 형이기도 하다. 본관은 우봉, 본명은 이경중(李景中)이다.
평양 출신이다.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결혼하였으나 사별 후 김기태(金箕台)의 딸과 재혼하였다.
1884년 병조참판, 1894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갑오경장 이후 경무사로 근무하다가
이완용, 이범진의 아관파천에 가담, 친러파 내각의 군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이완용이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전환하는 동안 지방의 관찰사와 평리원 재판관 등을 역임하다가
1907년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어 영친왕이 인질로 일본에 유학갈 때 그를 수행했다.
이 집을 이들 형제가 넘겨받게 되는데는 흥선대원군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어느날 하늘이 컴컴해 지면서 소나기와 함께 정원에 있는 고목에 벼락이 내려쳐 둘로 갈라졌다.
때마침 이완용의 집을 찾아와 당구를 즐기고 있던 그의 아들 이항구(李恒九)와
조카 한상룡(韓相龍)은 놀라 갈팡질팡하다가 안방 깊숙이 숨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으면서 숨는 아들을 향해
‘벼락이 떨어진 후 도망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 이라고 충고하였다.
낙뇌(落雷) 로 이완용은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으며 장안의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하늘이 대신 천벌을 주었다”며 쑤군거렸다.
소문과 함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완용은 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때마침 1918년 화재로 소실된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安淳煥)이 인수하여 명월관의 분점격으로 운영했다.
옥호를 태화정(太華亭)이 있는 곳이라 하여 태화관(太華館)이라 하다가 후일 태화관(泰華館)으로 고쳤다.
외진 위치에 있던 태화관은 2층으로 크고 작은 방이 많아 장안의 부호와 총독부 관리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의 장소로 선택하였다.
고종임금의 인산일을 앞둔 독립선언의 거사는 당초에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장소는 파고다공원 즉 탑골공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민족대표 33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할 경우에 유혈충돌이 빚어질 수 있으므로 군중이 모인 탑골공원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2층 동쪽 끝방에 모여 고종황제의 빈소가 있는 남쪽 문을 열었다.
한용운의 사회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통고,
참석한 29인이 먼저 스스로 체포되었으며 지방운동의 주최 및 연락관계로
늦게 도착한 길선주(吉善宙) 등 3사람은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투옥되었다.
바로 태화빌딩으로, 오른쪽 옆에는 커다란 바위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문을 열고 빌딩 안으로 들어가면 1층 로비에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민족대표들의 그림이 있고
그 옆에는 ’독립만세‘라고 쓰여진 백범 김구 선생님의 친필이 걸려 있다.
이 건물 바로 옆 하나로 빌딩에 '서울중심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대한제국때 전국의 번지(지명) 중심지점」이라 하여 1896년에 정해진 곳이다.
그 인사동 궁가터에는 궁정 양악대 출신들이 만든 우미관 양악대와 단성사 양악대가
자주 출연하던 태화관을 헐고 기독교 감리교 여자교육기관인 태화회관이 설립되었다.
그후 공평지구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현재 12층 높이의 태화빌딩 하나로빌딩 등
현대식 빌딩군(群)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