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공부하면서 "삼국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비극의 주인공들에게는 어딘가 '비극적 결함'(tragic flaw)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햄릿"의 주인공 햄릿의 우유부단한 태도라든가 "닥터 포우스터스"(Dr. Faustus)의 주인공 포우스투스 박사의 지칠 줄 모르는 지식욕 같은 것들이다.
주인공들이 갖는 '비극적 결함'이 비극을 초래한다는 이야기는 "삼국지"에도 통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삼국지" 자체가 비극은 아니다. 당연히 "삼국지"는 비극이 아니라 소설일 뿐이다. 그러나, '비극적'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삼국지"를 해석하는 여러 관점이 있지만, 내가 그것을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삼국지"를 촉(蜀) 중심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게 된다. "불교, 소설과 영화를 말하다"(정우서적, 2008)에서, 나는 "삼국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촉을 정통으로 보는 '촉한정통설'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정통이라고 인식하는, 아니 독서의 과정에서 지지하고 지원하는 이 촉한이 다시금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가게 될 때,
마침내 그것은 비극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어릴 적에 "삼국지"를 읽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삼국지" 독서를 포기한 경험이 여러번 있었다. 그것은 촉의 패망을 바라보기 힘겨웠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본다면, 촉을 지지하는 독자로서는 "삼국지"가 정히 '비극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지"를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하면, 촉의 패망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비극 공부에서 배우게 된 '비극적 결함'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촉의 주요한 리더들이 갖는 '비극적 결함'이 촉의 패망으로 이끌게 하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유비 삼형제는 한결같이 강한 '비극적 결함'을 갖고 있다. 우선, 막내인 장비가 갖는 비극적 결함은 술만 마시면 부하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며, 관우는 곧으면서도 곧은 자만이 품기 쉬운 자만심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아우만이 아니라 형님인 유비 역시 동생들 못지 않은 '비극적 결함'을 갖고 있다. 관우가 죽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국가의 최고지도자로서의 냉정함을 갖추지 못하고, 오(吳)와의 동맹을 유지해 가면서 위(魏)에 상대한다는 제갈량이 세운 전략을 허물어 버리고서,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를 치러 나가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보다는 도원결의를 한 우정(=형제애)를 더 앞세우는 마음 그 자체가 그의 비극적 결함이다. 이러한 그들 삼형제의 결함은 하나같이 실제로 그들의 죽음을 초래하게 되면서, 촉을 무너뜨리게 된다.
뿐만 아니다. 제갈 량 역시 '비극적 결함'을 갖고 있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는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오를 치러 나갈 때 그를 떠났어야 했다. 충언을 다 했지만, 그래도 유비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국가의 전략을 헝크리게 될 때 사표를 던졌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초야로 돌아가서 은둔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는 마인드는 "여자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머리를 빗고, 남자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임협(任俠)의 정신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래서 몸만 괴롭히고, 되는 일 없이 죽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초야로 돌아갔더라면, 그 스스로의 본성을 지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장적 은둔의 삶을 살기에는 그의 정신은 너무나도 '속'에 물들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고 보면 촉의 주요한 리더 중에서 이러한 '비극적 결함'이 보이지 않는 인물은 역시 조자룡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는 오래 장수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삼국지" 인물 중에서 유비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교, 소설과 영화를 말하다"(229-230.)에서였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 특별하게 치우치면서, 중용을 취하지 못하고 비극적 결함을 드러내고 말았던 지도자들 보다는 조자룡의 매력에 끌리는 바가 적지 않다.
하긴, 우리네 삶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비극적 결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가 세운 원력을 위하여 스스로를 불태우는 실존적 결단이 여전히 필요로 하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그러한 뜨거움 하나는 또 숨기고 살아야 사람이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
이래저래 우리네 삶이 간단하지는 않은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