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아이를 유산한 17세 소녀 혜나, 후두암에 걸린 뮤지컬 배우 유진, 삶의 무게에 짓눌린 주부 옥남이 각자의 슬픔을 치유하려 꽃섬으로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들과 같고도 또 다른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디지털로 만드는 송일곤 감독의 장편 데뷔작 <꽃섬>은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는 희망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어제 우리 술 취한 상태였잖아. 계속 마셔줘야지. 어제랑 튀지 않게 해주세요.” 사실 송일곤 감독의 이런 지시가 있기 전에도 배우들은 이미 흰 새벽부터 빈 속에 알콜을 마구 붓고 있었다. 스탭들은 술꾼 배우들 덕에 맥주병 나르기에 분주하다. 여기가 바로 ‘감자탕 집에서 평소 친한 이들이 술 먹다가 만들기로 한’ 영화 <꽃섬>의 촬영 현장이다.
<꽃섬>은 송일곤 감독이 기존에 작업했던 1분짜리 클립 <플러쉬>에서 시작됐다. 작년 미디어 시티 서울의 제의로 만든 <플러쉬>는 십대 여자아이가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는 충격적인 영상을 담았다. 당시 여자 아이들이 아이를 낳고 버리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이 일종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들이 ‘태어남이란 개념’에 대해 아무 생각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감독 자신에게 일종의 충격으로 작용했다는 것. 하지만 그 가감 없는 영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미디어 시티 서울에게서 ‘당신 작품은 공보처에서 잘랐다’는 일방적인 이야기만 들어야 했다. 그 이후 <플러쉬>와 세 여자가 여행을 한다는 평소의 아이디어가 합쳐져 <꽃섬>의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플러쉬>가 단순히 <꽃섬>과 스토리의 연계성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플러쉬> 당시 아이가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불과 몇 쇼트일 뿐이었지만 배우가 역할에 몰입하는 점입가경을 잡아낼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 카메라의 덕분이었다. 그때의 경험이 <꽃섬>으로 이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또한 <플러쉬>를 찍을 때 느꼈던 디지털의 경이로움 때문에 송 감독에게 <꽃섬>은 저예산(제작비 6억)의 실험성을 한껏 활용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여기에 감독 자신이 8년 전 실제 꽃섬에서 2년을 보낸 경험도 녹아 있다. 화장실에서 아이를 유산한 17세 소녀 혜나, 암에 걸린 뮤지컬 배우 유진, 삶의 무게에 짓눌린 주부 옥남이 각자의 슬픔을 치유하려 꽃섬으로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들과 같고도 또 다른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즉 ‘꽃섬’은 슬픔을 치유하려 찾아가는,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는 희망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강원도 영월읍내에 자리한 작은 나이트 클럽. 새벽부터 분주한 이곳은 꽃섬에 대한 동경을 나타내는 듯 그 이름부터 ‘가고파’ 나이트 클럽이다. 아까부터 보니 멤버 구성이 남자 넷, 여자 셋이다. 여자 셋은 주인공 혜나, 유진, 옥남으로 신인 김혜나, 실제 뮤지컬 배우인 임유진, 연극계에서 알려진 배우 서주희가 연기한다. 그녀들은 10대, 20대, 30대를 대표하며 각각 그 세대의 여성들의 고민을 안고 가는 대리인들이다. **그럼 네 남자는 누구? 바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인 볼빨간, 어어부밴드의 백현진과 장영규, 그리고 송일곤 감독의 단편 <소풍>에서 아버지 역을 맡았던 손병호다. 손병호와 어어부밴드의 백현진은 게이 커플 밴드다. 백현진을 따라 덩달아 촬영장에 행차한 장영규, 볼빨간이 자청해 밴드 세션으로 출연하면서 멤버가 구성된 것. 이 바람에 송감독은 원래의 대사를 취소하고 출연자들의 애드립에 장면을 맡겨버렸다.** 새벽 1시부터 리허설을 거듭한 탓에 술기운이 적당히 오른 배우들은 조용히 취해 대사를 웅얼거리는 역할을 연기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손병호와 백현진 커플의 ‘입을 맞추려다 마는’ 스킨 쉽 장면도 무난하게 지나갔다. 사용하는 디지털 카메라는 PD100과 PD150. 촬영 후반부에는 DSR500WS 한 대가 더 추가된다.
<꽃섬>의 촬영 현장에서 만난 배우들이나 스탭들 대부분이 입을 모은다. 모든 것이 감자탕 집에서 출발했다고. 무슨 소리냐고? 그만큼 이 영화는 송일곤 감독과 늘상 얼굴을 맞대던 사람들이 모인 아지트 같은 성격의 영화란 얘기다. 출연자나 스탭 중 이 영화를 하자고 감독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냥 ‘하고 싶은가 안 하고 싶은가’의 의사 타진이 전부였다. 특히 <미인>에 이어 <꽃섬>에서 두 번째 영화음악을 맡게 된 노영심은 현장에서의 모습이 꼭 남동생의 놀이터에 놀러온 듯한 폼새다. 송감독과는 2년 전쯤 미로비전에서 한국단편영화걸작선을 개봉할 때 안면을 익힌 사이. <꽃섬>의 시작부터 송감독이 ‘이 영화의 영화음악은 당연히 노영심’이라고 생각한 듯 어느새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꽃섬>의 영화음악은 전반적으로 클래시컬한 분위기다. 테마를 만들어 연작 소설 같은 느낌으로 풀어갈 계획이다. 또한 바람소리, 바다 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가공 없이 그대로 음악에 사용할 작정이다.
폴란드 유학 중에 만든 <소풍>이 국내 영화계에선 처음으로 99년 칸느영화제 단편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후 송일곤 감독의 장편데뷔에 국내외 관심이 모아졌었다. 그런 그에게 작년 부산프로모션플랜(PPP)에서 지원을 받은 장편 <칼>의 제작이 무산되었던 것은 아쉬움이 컸지만 오히려 3년 뒤쯤에나 하게 될 줄 알았던 이야기 <꽃섬>을 먼저 세상에 내놓는 계기가 된 셈이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칼>이었다면 <꽃섬>도 칼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송일곤 감독은 “‘꽃섬’은 실재하는지 안 하는지 모를 모호한 공간으로 기능한다. 어렸을 때 믿지만 성인이 되면서 잊어버리게 되는 영적인 힘들이 분명 있다. 그것을 잃음으로써 슬픔이 점점 커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슬픔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가 영화 <꽃섬>이 가지는 가장 큰 화두인 셈이다.
그렇게 <꽃섬>은 오만한 세상에게 보여주는 송감독의 작은 동화다. 그래서 아름답고 환상적인 풍경일 것이라고 여기는 많은 이들의 기대를 크게 벗어나고자 한다. 꽃섬은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섬이며, 그것을 마지막 희망으로 설득시키기 위해 더욱 사실적인 방식으로 찍겠다는 것이 감독의 의지다.
씨앤필름이 제작하는 첫 영화인 <꽃섬>은 현재 강원도 영월에서 60퍼센트의 촬영을 마쳤다. 서울에서 남해의 꽃섬으로 들어가기까지 여행의 시간 순으로 촬영이 이루어진다. 3월부터 프랑스에서 키네코 작업을 진행한 후 5월 즈음 극장에서 관객과 조우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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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곤감독이 '디지털 장편데뷔'를 마다않는 이유는 영화에 중독된 왕성한 창작욕 때문이지만 그 자신도 앞으로의 활발한 작품활동을 위해서는 <꽃섬>의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후두암에 걸린 뮤지컬 배우(임유진)가 짐을 싸다말고 상심에 잠겨 자신의 목을 만진다. 소니 PD-150과 PD-200 두대의 디지털 카메라가 여주인공을 포착한다. 정적. 여주인공이 고개를 돌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본다. 지난 19일 새벽 서울 역삼동 한 모델하우스에서 진행된 영화 <꽃섬> 촬영현장. 간단한 장면이지만 송일곤감독은 몇번이나 재촬영을 강행했다. 촬영장 밖에서는 스탭들이 초조하게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사 씨앤필름의 제작부 한 사람이 볼멘소리를 낸다. "저 장면 하나에 이렇게 시간을 오래끄나". 효율성을 생명으로 하는 상업영화 제작과정에 익숙한 스탭으로서는 세밀한 부분까지 끈질기게 따라가는 송일곤감독의 연출스타일이 버거울수도 있다.
촬영장 한쪽 구석에서는 송일곤감독에 대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스탭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읽고 있다. <꽃섬>의 시나리오는 아니다. 손바닥만한 크기에 약간 두툼했고 조금은 낡아보인다. 영화에 관해 빼곡이 써놓은 글과 간간이 들어있는 그림들. 송일곤감독이 폴란드 유학시절을 기록한 일기장이다. 일기장은 촬영소품으로 쓰기 위해 송일곤감독이 집에서 들고나온 많은 소지품들속에 섞여있었다. 잠깐동안 일기장으로 쏠린 호기심. 휴식시간이 끝나고 스탭들이 모두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도 일기장을 놓지 않는 스탭이 하나 있었다. 연출부 막내인지 앳돼보이는 그 스탭은 무슨 보물이라도 숨기듯 일기장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저예산 디지털영화 <꽃섬>의 촬영현장에서 펼쳐진 상반된 두 풍경은 단편영화계까지 포함하는 한국영화판에서 송일곤감독의 위상을 대변해준다. 누가 뭐래도 송일곤감독은 단편영화계의 '오랜' 스타다. 그는 민규동, 김태용, 봉준호, 정지우 등 최근들어 한국영화에 새롭게 등장한 젊은 감독들과 비슷한 시기에 주목받았다. 송일곤감독은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존재였다. 송일곤감독은 폴란드 우쯔 영화학교 유학시절 출품했던 <광대들의 꿈>이 제3회 서울단편영화제를 비롯 샌프란시스코, 폴란드, 독일, 일본 등지의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98년 <간과 감자>로 폴란드 토룬영화제 대상을, 99년 <소풍>으로 칸 단편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송일곤감독은 누가 보아도 충무로 장편데뷔 1순위였다.
그러나 송일곤감독은 충무로와는 쉽게 운이 닿지 않나 보다. '재능있는' 감독들 중에서 상업성과 가장 거리가 멀기 때문일까? 서울예전 동기인 김정권감독도 오랜 연출부 생활 끝에 <동감>으로 데뷔했지만 충무로 제작자들에게 송일곤감독은 '무겁고 난해한 영화를 만들면서' 더군다나 '고집까지 센' 젊은 감독이었다. 그의 단편에 유럽권 영화제는 그토록 열광했지만 국내에서는 <소풍>이나 <간과 감자>보다는 봉준호감독의 <지리멸렬>처럼 재기발랄한 작품에 더 관심을 가졌다.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 PPP에 출품한 영화 <칼>(가제)이 이스트 필름의 주도로 초기 투자를 확보했지만 '진지하고 무거운' 시나리오를 우려한 투자자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아 올해안에 제작이 불투명해졌다. 영화를 찍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성격인지라 1분짜리 옥외전광판용 미니 단편 <플러쉬>를 디지털로 제작했지만 검열때문에 공개하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화장실에 아기를 유기하는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 그 <플러쉬>를 모태로 한 작품이 바로 <꽃섬>이다.
감독자신도 카메라의 무게만큼이나 '가볍게' 찍고 있다지만 <꽃섬>의 이야기는 역시 가볍지 않다. 세 명의 여자가 자아를 찾아가는 로드무비. 이제 겨우 17살인 한 여자(김혜나)는 아기를 화장실에 유기한다. 뮤지컬 가수로서 전성기를 보내던 20대 여자(임유진)는 후두암 진단을 받는다. 30대 여자(서주희)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을 시작한다. 지쳐가던 이들은 어느날 갑자기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세 여자는 강원도 산골로, 다시 전라도 땅끝의 '꽃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순제작비 6억정도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배우를 기용한 소품이지만 <꽃섬>의 크랭크인도 간단하지 않았다. <칼> 제작이 미뤄지면서 송일곤감독은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충무로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유럽으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유럽에서는 칸 영화제에서 제공하는 6개월 장편데뷔 프로모션 코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그때 씨앤필름에서 그를 잡았다. 스탭과 제작비를 지원한다, 디지털로 찍고 싶은만큼 찍어라. 씨앤필름은 새롬엔터테인먼트를 파트너로 <텔미썸딩>이후 가벼운 차기작을 구상하고 있던 참이었다. 송일곤감독도 새로운 영상매체로 장편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예전 <플러쉬>에서 느꼈던 디지털작업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디지털로 입봉하기로 마음 먹은 송일곤은 단촐한 스탭을 이끌고 12월 31일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대신 몽고 답사까지 다녀오면서 그토록 공들였던 <칼>의 시나리오는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씨앤필름 관계자는 이 작품이 5월 극장개봉을 위해 제작된다고 말한다. 4월에 열리는 칸 영화제 출품도 기대하고 있다. 디지털 영화지만 씨앤필름이 제작을 맡았다면 근거없는 소리는 아니다. 임상수감독의 디지털영화 <눈물>이 부산영화제를 통해 개봉 기회를 잡았다면 <꽃섬>은 칸을 통해 탄력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작품의 완성도에 따라서는 시네마서비스가 배급을 맡아 본격적인 극장 개봉이 추진될 가능성도 열려있다. 송일곤감독이 '디지털 장편데뷔'를 마다않는 이유는 영화에 중독된 왕성한 창작욕 때문이지만 그 자신도 앞으로의 활발한 작품활동을 위해서는 <꽃섬>의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쑥스러운 듯 부담인듯 털어놓는다.
"가볍게 찍는건데 결국 디지털로 장편데뷔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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