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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길에서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역을 다녀와서!
옛 이름이 열수(洌水)인 한강(漢江) 두물머리
지금은 폐역사(閉驛舍)가 된 능내역에서 시작된 오늘의 길동무길에는
스무명의 길벗들이 모여 한강의 옛 이름인 열수(洌水)의 수변에
다산길을 걷는 길동무들의 미소 가득한 밝은 면면에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생업의 전선에서 격무(激務)에 시달리다 가족들은 잠들어
있는 밤 늦게까지 기다리다 돌아오는 주인을 무한정 반기는 개띠해라고
하는 2018 무술년(戊戌年)에 대한 희망을 가득안고 꽃망울이 만개(滿開)할
봄을 기다리는 모습들이었고. 오늘의 다산길과 두물머리 동네의 양수역(兩水驛)
까지 가는 길은 길벗들 서로에게 감동적(感動的)인 희망(希望)의 멧세지를
가슴에 안겨주는 길이었습니다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시작돼 휴전선을 넘어온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시
금대봉의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길이 합쳐지는
가장자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한자로는 양수두(兩水頭
라고 했답니다. 지금 행정지명은 양수리(兩水里)며 경기도 양평군에
속하고. 여기서부터 한강이 열리고 바다로 향합니다.
두물머리나루는 예전에 강원도 정선, 충북 단양 등의 상류지역과 서울
마포나루를 잇는 물길의 중간 지점이어서 번창했으며 조선시대에는
한강 4대 나루 중 하나였으나 1973년 팔당댐 완공으로 나루 기능을 잃었습니다.
두물머리는 새벽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영화
관계자나 사진작가가 즐겨찾는 곳이고 운길산 쪽 산길에 오르면 두물머리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으며 수많은 시인 묵객(墨客)들이 두물머리를 찬미했습니다.
어느 수필가는 ‘두물머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물머리를 내려다보며
이곳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만남이 있었던가를 짐작해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지닌 인품의 향기처럼, 두물머리에서부터
물은 유연한 흐름을 지닙니다." … 보기에 아름다운 것보다 깊이 지니고
있는 뜻이 아름답습니다.” 한데 모여서 산 그림자를 휘감고 흐르는 넉넉한
강물이 인간사의 반목이나 갈등을 치유해줄 것이라는 소망이 느껴집니다.
소설가 김훈이 산문집 ‘자전거 여행’에서 “강물이 만날 때, 강물은 합치되
부딪히지 않는다. 강물은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구획도
없이, 합쳐서 하나를 이룬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두물머리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고
세상에 나아가 영광과 좌절을 맛보고 오랜 유배 생활 끝에 귀향해
말년을 보내다가 이곳에 묻혔습니다. 그는 한강의 별칭인 열수(洌水)를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으며. ‘목민심서’ 등 주요 저서에 이 호를 썼습니다.
젊은 시절에 새로운 시대를 열려던 꿈을 강 이름으로
담아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경기도는 두물머리나루를 복원할 계획입니다. 나루와 함께 생태하천,
한강물길기념관 등을 조성해 문화체험 관광자원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두물머리에 새겨진 깊은 뜻도 되살렸으면 합니다. 작가가 하는 이야기
전개를 말하다. 즉 음성, 행위를 통해 역사나 학문을 청자(聽者)들에게
이야기로 전해주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관광자원이지 아닐런지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로 20 (진중리 229-1)
중앙선 복선 전철화에 따른 선로 이설 관계로 폐역된 능내역을 대신하여 신설된 역이다
. 역명은 인근 운길산의 이름을 따 제정되었다. 이 역은 용문 방면으로 양수철교 앞에
건설된 역으로, 기존의 능내역과는 약 3.5km 떨어져 있다. 팔당 방면으로는 약 4.5km의
터널로 가로지르게 되어 있어 기존과는 판이하게 다른 위치로 이설되었다. 공사 당시에는
가칭 진중역, 조안역 등으로 불리었으며, 중앙선 개통에 맞춰
역명을 운길산역(雲吉山驛)으로 변경하였다.
출처: (철도역 정보, 철도산업정보센터)
중앙선 간이역이었던 능내역(陵內驛)
가 끝난 뒤 폐역이 됐다. 하지만 오래된 역사를 철거하지 않고
사진전시관으로 꾸며서 보존한 점이 다행스럽다. 실내에 들어
서면 벽면에 주렁주렁 매달린 빛바랜 사진들이 눈에 들어온다.
능내역의 옛 모습, 교복을 입은 중년 남녀, 앳된 커플의 밝은
미소를 담은 사진도 있다. 방문객들이 빌려 입고 사진을 남길
수 있도록 교복도 갖춰놓았다. 개찰구였던 문을 밀고 나서면
승객들이 열차를 기다리던 플랫폼과 철로가 보인다. 플랫폼
에는 나무걸상이 마련돼 있다. 거기에 아주머니 몇이 앉아서
오래전 여고 시절로 돌아간 듯 깔깔대며 수다가 한창이다.
『여유당전서』에 담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선생의 격변기의 삶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이 태어나서 살다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의 조선 사회는 농경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농경 사회에서
그 나름의 보편성과 합리성을 가진 철학 체계로 사상적 지주
가 되었던 성리학은 시대 사상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감당
할 수 없었다. 상공업 사회에 부응하는 기술 문명과 부국강병
의 관심을 제고하는 북학 사상이 새로운 시대 사상으로
18세기 중반에 태동한 배경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사상적 기반인 성호학파(성호 이익이 중심이
된 중농학파)의 경학(經學)적 기초 위에 그 학파의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학문 풍토를 계승하였다. 그는 한 걸음 더 전진하여
노론 북학파의 북학 사상도 적극 수용함으로써 선배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전진적인 지식인상을 수립했다. 토지의 공유와 균등
분배를 통한 경제적 평등의 실현을 기저로 하는 그의 경제 사상
이나,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를 통한 민본주의적 왕도 정치를
중핵으로 삼는 그의 정치 사상은 기본적으로 선배
실학자들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의 정치ㆍ경제 사상은 세부적인 면에서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그의 균전론(均田論)은 사ㆍ농ㆍ공ㆍ상의 직업 차이나 개인
능력을 무시한 인구 비례의 토지 균등 분배 사상이 아니다. 직업 분화
를 철저히 인식하고, 토지는 오직 농민에게만 점유되어야 하며 농민
의 경작 능력에 따라 토지 점유와 소득 분배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정치 사상에서도 사(士)를 정치 담당 세력으로 인정하고,
학자인 독서 계급이 민본주의적 왕도 정치 내지 현인 정치(賢人政治)
를 해야 한다고 한 점에서는 종래 사림의 주장과 다를 것이 없지만,
통치권의 근거를 백성에서 찾음으로써 민권 사상을
이론화한 점에 그 독창성이 있다.
유교 경전의 해석이나 철학 사상의 근거가 되는 정약용의 경학 사상은
독자적 경지를 채척했다. 성리학 체계에서는 천리(天理)와 인륜(人倫)
을 하나의 체계 속에 일원적으로 파악하여 ‘천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
잡는다(明天理 正人心)’고 했는데, 정약용은 천리와 인륜 도덕을 완전
히 분리하였다. 인간 문제는 어디까지나 인간 사회의 문제로 파악하고
천리와 분리함으로써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역사 인식 역시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신라 중심의 연구 경향에서 탈피하여 최초
로 백제사 연구에 주목하고, 백제 최초의 도읍지인 위례성의 위치는
직산(稷山)이 아니라 현재의 서울이라고 밝혔는데, 당시로서는 획기
적인 연구였다. 발해의 중심지는 요동이 아니라 백두산 동북쪽 연변
지방이라고 고증해 낸 것도 그의 실증주의적 학풍의 결실이었다.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현암사)
정약용 선생의 가르침이 있는 곳
다산 유적지(茶山遺積地)
1762년, 정약용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균관 유생일 때, 과거급제 후 벼슬살이를 할 때에도 수시로
마재마을에 내려올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렇게
그리운 고향을 떠나 긴 유배생활을 지냈고 마침내 찾아온 고향에서
삶을 정리할 수 있었던 정약용. 그가 태어난 지 250년이 지난 지금,
다산 유적지로 꾸며진 마재마을을 찾아갔다.
때마침 '다산 문화제'가 진행돼 다산 유적지가 들뜬 분위기다. 수도권
외곽이라는 강점 덕분에 경기도에는 축제가 많다. 다산 문화제는 경기도
의 대표적인 축제로, 정약용의 가르침을 알리고 다양한 전시, 공연, 작품,
대회 등으로 다산 유적지 일대를 축제의 장으로 꾸며 시민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 올해로 28회째를 맞았다.
다산 유적지로 처음 방문했다면 실학박물관을 거쳐 다산 문화관·다산
전시관(이하 문화관, 전시관) 순으로 가는 동선을 추천한다. 실학박물관
은 조선 후기 실학에 관한 이야기와 정약용의 일대기가 알기 쉽게 전시돼
, 시대와 정약용을 서로 매치시켜가며 자연스럽게
당시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조선 후기는 학파의 분열·대립으로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사회 질서가 붕괴되는 상황 속에서 백성은 더욱 힘
들었다. 하지만 조정은 탁상공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백성의 고충과
상관없이 권력 유지에만 힘쓰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학풍이 일어
났으니, 실학이다. 이후 실학이 발전하면서 농업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대외개방 지향 등 여러 개혁이 이뤄지고 시도됐다. 이 같은
실학을 집대성한 사람이 정약용이다.
문화관과 전시관에서는 정약용의 실학에 초점을 맞췄다.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은 정약용은 정치기구 개혁,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을
위한 공평한 대가와 분배, 노비제 폐기 등을 주장했으며 정치, 경제
, 문학, 의학, 군사학 등 학분 전반에 걸친 책을 저술했다. 이와 관련
한 전시를 엿볼 수 있다. 게다가 정약용은 조선시대 과학 발전을 이끈
기여도 크다. 문화관에서 정조가 수원의 사도세자의 묘소로 참배
하러 가는 모습의 능행도를 볼 수 있는데, 한강을 건너는 그림 속
배다리를 설계한 사람이 정약용이다. 이외에도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거중기를 고안해 건축에 많은 도움을 줬다.
다산 문화제와 다산 유적지
다산 유적지에서 정약용의 이야기를 접하는 동시에 축제가 더해
지니 즐겁기까지 하다. 본격적으로 '다산 문화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가보자. 정약용 생가 '여유당'으로 이어진 입구,
포졸과 수문장이 서 있다. 외삼문를 지나면 다양한 행사프로그램
에 참여할 수 있는 접수처가 있다. 문예대회는 나이별로 구분돼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참여할 수 있어 글솜씨를 뽐내도 좋겠다.
이렇게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이미 근방의 잔디밭이 만원
이다. 체험, 참여, 학습 등으로 축제의 한 구성원이 되는
다산 문화제, 좋은 평가를
다산 유적지에 왔다면 꼭 들려봐야 할 곳이 여유당 뒷산에 있는
정약용 묘소이다. 약 5분이면 다 오르는 높이지만, 올라가는
동안 정약용 선생의 일대기를 상기해본다.
문턱이 높기로 유명했던 성균관에 정약용은 23세의 나이로
입성한다. 이후 28세에 문과 급제하면서 벼슬살이를 시작.
이후 배다리, 거중기 등을 설계하면서 나랏일에 큰 도움을
줬다. 이후 10여 년 동안 조정에 몸을 담았으나 모함과
역모가 많았기에 10일짜리 유배를 가기도 했다. 또한 암행
어사로 경기도를 돌며 군수의 폭정을 처벌, 백성의 고통을
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정조의 서거 이후부터 큰
시련이 시작된다. 조정 내 당쟁, 천주교 탄압 등이 빈번
해지면서 정약용은 유배형을 받게 되고 끝내 전남 강진에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억울했을 것이고 정조
의 서거로 슬픔이 가라앉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유배
기간이 끝난 후에도 실학을 통한 나라발전을 위해 학문 닦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약용의 실학을 '다산학'이라고도 하는데
, 이 학문에 관한 500여 권의 저서가 대부분 유배지에서 만들
어졌다고 한다. 유배가 끝난 57세의 정약용은 고향으로 내려와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목민심서를 완성. 그 외에도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 묘소 앞, '유배생활 동안 얼마나 이곳이 그리우셨겠습니까'
지금은 평안하신지 한번 여쭤본다. 뒤를 돌아 멀리 두물머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져 한강으로 흐르는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본다. 묘소에서 내려와 행사장 주변을 돌아보는데
볼거리가 끊이질 않고 발견된다. 수원성의 모형으로 보이는
작은 성 주위로 아이들이 스티로폼 벽돌을 쌓고 있다. 거중기
를 설계해 수원성 건축에 큰 도움을 준 정약용과 관련 있는
체험인 것을 아이들은 알까. 당시 거중기의 효과는 4만냥
(1냥을 7만원으로 환산 시, 약 28억원에 해당)을 절약하고
많은 백성이 부역에 동원되지 않아도 되는 효과를 가져다
줬다. 물론 다산 유적지에서 거중기를 볼 수 있으며 축제
기간에는 거중기 체험시설도 마련돼 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도르래와 그 효과를 직접 알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과학적 체험거리다. 이렇게 쌓인 추억은 훗날 아이들이
역사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된다.
한강과 실학생태공원
마재마을을 두르며 한강과 이어지는 다산길도 걷기 좋다.
약 3.4km의 코스로 수련이 오밀조밀 자라는 개천, 한강변
공원 등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풍기는 산책로다. 특히 작은
개천은 예로부터 소내, 소천, 초천이라고도 전해지며 이
이름은 정약용의 별호로도 사용됐다. 개천을 따라 한강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자. 근방에 한강 가까이 조성된 공원,
'실학생태공원'이다. 한편에 마련된 축제무대에서는 줄타,기전통음악공연, 연극 등이 시간대별로 공연하면서 사람들을
모은다. 특히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남사당
놀이 공연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다음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호젓한 분위기가 다시 마재마을에 내려앉았다. 두물머리와 정약용
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다산 유적지, 언제 찾아가도 정약용
선생은 따뜻한 환영으로 반길 것이다.
유의사항
※ 위 정보는 2013년 9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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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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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한국관광공사)
남양주 다산길
철길을 따라, 한강을 따라
다산길은 경기도 남양주시가 최근 개장한 트레일이다. 이를테면 ‘남양주의 올레’인
셈이다. 남양주는 총면적의 70%가 산림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산만 높은 게 아니다.
물길이 있다. 북한강이 남양주를 따라 흘러와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마침내 한강이
된다. 이처럼 남양주는 서울 도심에서 지척이지만 산과 강이
어울려 특별한 걷기 여행코스를 제공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조선말의 위대한 학자 다산 정약용의 실학정신이 깃들어 있어 역사의
향기도 높다. 다산길의 가장 대표적인 코스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와 묘가 있는 능내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이곳은 한강이 넘실거리는 강변이라 다산길이 열리기 전에도 주말
이면 나들이객으로 붐볐다. 최근에는 실학박물관이 개장하고 생가 주변을 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하면서 남양주의 문화 아이콘으로 거듭나고 있다. 다산길이란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다산길은 13개 코스에 총 연장길이는 179.8km다. 이 가운데 1~7코스가
개장했고, 나머지는 2011년 말 완공 예정이다. 개장된 코스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은
곳은 중앙선 복선화로 폐선이 된 팔당역~능내역~운길산역
구간의 철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다산길 가운데 백미는 다산유적지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한강나루길(1코스)과 다산길
(2코스), 새소리명당길(3코스) 등 3개의 트레일이 이곳을 걸쳐간다. 다산유적지 주변
에는 연꽃군락지와 한강, 토끼섬, 능내역, 마재성지 등 볼거리도 몰려 있다. 짧게 보려면
다산유적지~연꽃군락지~능내역~마재성지~다산유적지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1시간
내외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눅신하게 철길을 걸어보고 싶다면 여기에 새소리명당길
과 한강나루길 일부를 포함하면 좋다. 마재성지에서 새소리명당길을 따라가서 운길산역
에서 철길을 따라 능내역으로 돌아오는 한강나루길로 코스를 잡으면 철길 여행과 호젓한
시골길 여행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다산유적지 주차장에서 마재성지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여름철에는 한강의 강변을 더듬어 가는 다산산책로가 좋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능내리 연꽃마을에서 조성한 연밭을 볼 수 있다. 가을에는 마재고개를 넘어가는 게 좋다.
발에 치이는 낙엽과 분위기 좋은 카페를 끼고 간다. 마재고개는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온
길을 거슬러 간다. 데크로 조성한 인도를 따라 300m쯤 가면 야트막한 고개에 이른다.
이곳에 ‘새소리명당길 6.7km’라는 이정표가 있다. 이후로는 ‘새소리명당길’
이정표만 따르면 되는데, 갈림길마다 설치되어 있어 길 찾기가 쉽다.
마재성지는 정약용 형제가 천주교를 접했던 곳이다. 또한, 모진 박해와 탄압 속에서도
정약종이 가솔을 데리고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성지로 지정된 이곳은 여느
성지보다 규모가 작다. 하지만 십자가를 비롯한 성물은 조각품을
보는 것처럼 창의적으로 디자인되어 눈길을 끈다.
마재성지에서 마을길을 따라 내려오면 개구리밥이 잔뜩 떠 있는 저수지다. 저수지
에는 돛단배가 서 있다. 여름철에는 수면이 연잎과 개구리밥으로 온통 초록으로
물든다. 밤낮의 일교차가 큰 가을에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나 신비감을 준다.
이곳에서 다산산책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갈 수 있다.저수지를 지나면 철길과
만난다. 이곳부터 팔당역으로 이어진 구간의 철길이 폐선 구간에서도 백미다.
도로와 마을과 멀찍이 떨어져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가수 윤도현이 부른 ‘여행
길’의 노랫말처럼 ‘끝없이 이어진 저 철길 따라 기차를 메고 떠나는 여행길’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길이다. 그 길 중간에 봉주르라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 있다.
연인과 나들이 객으로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북적거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짧게 철로를 거닐어보는 이들도 많다.
300m쯤 더 가면 쉼터가 있다. 데크 위에 벤치를 설치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이
아름답다. 이곳을 지나면 새소리명당길은 오른쪽으로 빠진다. 철길을 계속 따라가면
팔당역까지 갈 수 있다. 새소리명당길을 따라 가면 능내2리 마을회관을 경유해 도로를
건넌다. 이 도로 위로는 서울~양평을 잇는 경안로의 고가도로가 지난다. 고가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소음이 거슬리지만 이곳만 지나면 아늑한 농로길이 펼쳐진다.
차량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농로길은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를 넘어
가면서부터는 소박한 시골풍경이 펼쳐진다. 마을도 집도 없는 시골길이 숲과 밭
사이로 나 있다. 이 길은 성황당고개를 넘어간다. 고개라고 해서 거창하게 높거나
힘들지 않다. 숨이 조금 거칠어질만 하면 고갯마루에 서게 된다. 성황당고개를
넘어서면 조안리의 아늑한 농촌풍경이 펼쳐진다. 성황당고개에서 조안리 입구
철길까지 2km는 마을 진입로를 따라 타박타박 걸어가는 길이다.
조안리 입구에서 다시 철길과 만난다. 새소리명당길을 완주하려면 왼쪽으로 운길산
역 방향으로 걷는다. 다산유적지로 되돌아오려면 오른쪽을 택한다. 철길과 함께
양수리~대성리를 잇는 북한강로가 나란히 뻗어 있다. 질주하는 차량의 소음이 조금
거슬리는 곳이다. 그러나 조안면소재지를 지나면서 차량도 뜸하고, 큰길과 작별하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다산유적지에서 한껏 도로와 가까워졌던 철길은
능내역에 닿는다. 이제는 더 이상 기차가 오지 않는 쓸쓸한 간이역 풍경이 아릿하게
다가온다. 능내역에서 철길과 작별한다. 능내역 철길에서 왼쪽의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면 마재성지와 만난다. 이곳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다산유적지로 가게 된다.
출처: (길숲섬) 철길을 따라, 한강을 따라
두물머리(兩水里)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兩水里)에 있는 관광명소.
두물머리[兩水里]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
이며 한자로는 '兩水里'를 쓰는데, 이곳은 양수리에서도 나루터를 중심
으로 한 장소를 가리킨다.
예전에는 이곳의 나루터가 남한강 최상류의 물길이 있는 강원도 정선군과
충청북도 단양군, 그리고 물길의 종착지인 서울 뚝섬과 마포나루를 이어
주던 마지막 정착지인 탓에 매우 번창하였다. 그러다가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육로가 신설되자 쇠퇴하기 시작하여,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고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자 어로행위 및 선박건조가
금지되면서 나루터 기능이 정지되었다.
사유지이지만,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 옛 영화가 얽힌 나루터,
강으로 늘어진 많은 수양버들 등 강가마을 특유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웨딩·영화·광고·드라마 촬영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또 사진동호인
들의 최고 인기 촬영장이기도 한데, 특히 겨울 설경과 일몰이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커다란 느티나무는 수령이
400년 이상이나 되었다.
인근에는 한음이덕형선생묘 및 신도비(경기기념물 89), 이준경선생묘
(경기기념물 96), 정창손묘역 석물(경기문화재자료 85), 익원공 김사형묘역
(경기문화재자료 107) 등 여러 문화재가 있다. 문호리에는 카페촌이 형성
되어 데이트족이나 가족들이 많이 찾고, 금남리 국도변에는 서울종합촬영
소가 있다. 서울종합촬영소와 양주골프장 사이에는 복합문화 공간인 두물
워크샵이 자리잡고 있는데, 음악회·건축전·미술전·
퍼포먼스 등 문화행사가 연중 내내 열린다.
출처: (두산백과)
어제 밤 이슬비에 목메여 우는구나
떠나간 그 옛님은 언제나 오나
기나긴 한강 줄기 끊임 없이 흐른다
목 메인 물소리는 오늘도 우는구나
가슴에 쌓인 한을 그 누구가 아나,
구백리 변두리를 쉬임 없이 흐른다
노래 한강! 6.25 한국전쟁으로 태어난
최병호 작사, 작곡, 한강! 대한민국 사람들이면
이 노래가 모두 귀에 익었습니다. 이 노래의 작사, 작곡자
최병호님은 문학인도 음악가도 아닌 뜻밖에도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방송 기술자로 6.25때 해상 이동방송에도 참여하고,
대구방송국 10Kw출력증강에도 앞장섰습니다. 한강을 건너 남으로,
남으로 밀리면서 시상과 음률이 머리에 스쳐갔고 그것을
입으로 흥얼거리며 오선지에 옮긴 것이 한강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습니다.
노래 한강과 최병호 그리고 심연옥
최병호! 그분이 필자의 방송국선배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주 가까이 계시는 그분이라는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원로방송인들의 모임 방우회에서도 만나지만
그분이 그분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방우회 선배님들도
그분이 그 유명한 한강 노래를 써서 작곡한 주인공임을
잘 모르시는가. 봅니다. 평소에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특유한 성격 때문일 것입니다.
필자는 KBS사우회 일을 하면서
어린시절 대구방송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KBS사우회 서병주 회장으로부터 최병호 선배가
6.25전쟁 중 대구방송국에서 한강이라는 시를 쓰고
곡을 부쳐 대구에서 노래를 불러 화재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최병호선배가 바로 곁에 계시는
그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3년 넘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이용실선배로부터 한강을 작사, 작곡한
최병호선배를 만난다는 얘기를 들었고. 박경환
선배로부터 그분이 방우회 회원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최병호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말씀 하시기를 꺼려하는 듯했으나 얘기가
나오니 친절히 얘기 해 주셨습니다.
2018-01-20 작성자 청해명파
첫댓글 조안면 능내리 다산길 다시금 길동무들과 함께하고 싶은 곳 자연경관과 다산 정약용
정치가 묻어나는 곳 다산공원 둘러보는 행보도 가벼울 것 같습니다.
두물머리에 유래와 연꽃들이 향연 가득한 요즈음 언제나 우리를 반겨주는 명소
지기님의 수고 덕분에 편안한 안식의 두물머리 연꽃에 피어가는 것 우리네 인생에 견주고 싶습니다.
마음을 갈고 닦아 밝음을 스스로 밝히듯 연꽃같은 인생 닮고 싶습니다.
좋은 자연홍보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늘도 축복의 하루 펼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