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집 제2권 / 묘지(墓誌)
고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 오공(吳公)의 묘지
명종(明宗) 시대에 지금의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 오군 억령(吳君億齡)이 신동으로 한 세상에 이름을 떨치어, 사대부들이 이따금 그의 문장을 전송(傳誦)하였거니와, 귀가(貴家)의 병장(屛障)에 그의 글씨를 얻어서 영광으로 삼은 이들은 다 이구동성으로 일컫기를, “오씨 가문에 훌륭한 아이가 있으니, 이는 반드시 부모를 드러나게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지금 사간(司諫)으로 있는 그의 아우 백령(百齡)이 또 이어서 문학으로 일컬어졌다. 그러자 세상의 아버지 된 사람들이 모두 오씨 가문을 흔모하여‘기운(機雲)이 육씨(陸氏) 가문에서 함께 나오고, 식철(軾轍)이 소씨(蘇氏) 가문에서 나란히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 후 백령 또한 고과(高科)에 급제함에 미쳐서는 형의 뒤를 따라 춘방(春坊)을 거쳐 옥당(玉堂)에 오르고 미원(薇垣)ㆍ백부(栢府)의 사이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게다가 이미 또 참판의 아들인 익(翊). 정(靖). 전(竱) 3인 및 사간의 아들인 욱(昱). 입(岦) 2인이 모두 문장으로 연달아 아름다운 자취를 잇고 있으니, 오씨의 가문은 더욱 창대하여 빛나고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대야(大爺) 오공(吳公)은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바, 70여 세의 나이에 아직도 건강하였다. 그리고 참판 형제가 나가서는 조정에서 상서로운 세상에 쌍벽(雙璧)을 이루고, 들어가서는 효성을 극진히 하여 삼생(三牲)의 봉양에 뜻을 즐겁게 받들었으니, 이는 자식 노릇을 잘한다고 이를 만하다.
게다가 또 익. 정 등 여러 손자들이 여러 표종 형제(表從兄弟)들과 함께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드나들어서 옥수(玉樹)가 뜰에 그득하였으니, 이것이 선세(先世)에 훌륭한 덕을 축적해 놓음으로써 근원이 장원하고 뿌리가 깊어서 후세에 발복하는 그런 이치가 없었다면 이렇게 성대할 수가 있겠는가.
대체로 상세(上世)에 휘 대승(大陞)이 고려에서 벼슬하여 중윤(中允)이 되었고, 그의 아들 광찰(光札)은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이며, 또 그의 아들 선(璿)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이고, 증조 식(軾)은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이었으니, 오씨의 창성함은 명백하게 역사에 전할 만하다.
원몽(元蒙)에 내려와서는 참봉(參奉) 벼슬로 마치었고, 그의 아들 극권(克權)에 이르러서는 또한 직장(直長)에 그쳤으니, 이세(二世)를 연하여 떨치지 못한 것이 어찌 기다림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직장이 당진 장씨(唐津張氏)에게 장가들어 가정 갑신년(1524, 중종 19) 정월 26일에 오공을 낳았다.
오공이 자람에 미쳐서는 진솔하고 평이하여 외모를 꾸미지 않았고, 사람을 만나면 친소(親疎)를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성의로 접대하여 깊은 속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리고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술을 대할 적마다 즐겁게 마셔 밤낮으로 쉬는 때가 없었는데, 오공은 비록 술꾼[酒人]들과 종유했으나, 남들과 다정하게 사귀는 데는 신실한 장자(長者)였다. 그 천성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오공을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두가 오공을 만나면 본래부터 아는 사이와 같았었다.
부인(夫人) 성씨(成氏)는 참봉 근(近)의 딸인데, 근은 또한 고사(高士)였고, 그의 아우 운(運)은 세상에서 대곡 선생(大谷先生)이라 호칭한 분이다. 대곡은 제자(諸子)들에게 인정을 해 주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 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깍듯이 공경하며 말하기를, “행실을 바르게 가다듬는 훌륭함이 나로서는 미치지 못할 바이다.”고 하였다.
대체로 타고난 자질이 훌륭한데다 낳아 기르는 데에 가르침이 있었으므로, 수없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들이 절로 의범(儀範)을 이루었기에, 종당(宗黨)이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일컬었었다. 대체로 오공의 후한 덕에다 부인의 근실한 훈회(訓晦)로 이루었으니, 앞에서 이른바 ‘후세에 발복한다’는 것이 의당 크고 또 드러나서 옥수(玉樹) 같은 여러 손자들이 더욱 빛날 것이고 보면, 나는 오씨 가문의 복이 아직도 무궁하리라고 여기는 바이다.
오공은 신축년 12월 26일에 향년 78세로 작고하였고, 성 부인은 이미 공보다 32년 앞서 작고하였다. 오공의 휘는 세현(世賢)이고 자는 국언(國彦)인데, 세계(世系)는 동복(同福)에서 나왔다. 오공이 작고하자 조정에서 아들의 관직이 아경(亞卿)인 까닭에 추은(推恩)하여 아들의 관직을 추증하였고, 왕세자(王世子)는 아들의 지위가 빈객(賓客)인 까닭에 특명으로 부의(賻儀)를 내렸으니, 생사(生死) 간에 존영(尊榮)을 누린 그 아름다움을 누가 짝할 수 있겠는가. 아, 오공은 자식을 잘 두었도다.
오공은 모두 2남을 두었으니, 참판과 사간이 바로 그들이다. 여(女) 1인은 박귀년(朴龜年)에게 시집갔고, 1인은 이갱(李賡)에게 시집갔으며, 1인은 박안생(朴安生)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1인은 참봉(參奉) 원탁(元鐸)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은 구령(九齡)이다.
이갱의 아들은 시민(時敏)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박안생의 아들은 민행(敏行)이다. 원탁은 4남을 두었는데, 극하(克河). 극희(克㵙)이고 그 밑은 어리다. 장지(葬地)는 배천(白川) 반월강(半月岡) 아래에 있는데, 성 부인의 묘는 그 왼쪽에 있다. <끝>
[주01] 기운(機雲)이 …… 태어났다 : 기운은 진(晉)나라 때 문장가로 쌍벽을 이루었던 육기(陸機). 육운(陸雲) 형제를 합칭한 말이고, 식철은 역시 송(宋)나라 때 문장가로 똑같이 명성이 높았던 소식(蘇軾). 소철(蘇轍) 형제를 합칭한 말이다. <끝>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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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故司饔院直長吳公墓誌
在明宗世。今嘉善大夫吏曹參判吳君億齡。以神童名一世。士大夫往往傳誦其文章。而貴家屛障。得其書以爲榮者。咸一口齊稱曰。吳門有兒。是必有以顯父母矣。後十餘歲。有其弟。今司諫百齡者。繼以文學稱。於是世之爲人父者。皆欣慕吳門。以爲機,雲同出陸家。軾,轍幷生蘇門。及百齡亦擢高科。躡兄蹤歷春坊。登玉堂。振迅於薇垣,栢府之間。而旣又參判之子三人翊,靖,竱䀈司諫之子二人昱,岦。俱以文行聯翩趾美。吳之門益大而光顯矣。而時太爺吳公。以司饔院直長。棄官家居。年七十餘。尙無恙。參判兄弟出而在朝。雙璧瑞世。入而盡孝。三牲養志。斯可謂能子矣。卽又有翊,靖等諸孫。倂與表從兄弟。出入後先。玉樹充庭。是不有先世畜德擁休。源遠根深。則發之于後者能若是盛哉。盖上世有諱大陞。仕高麗爲中允。子光札爲神虎衛大將軍。子璿爲僉議贊成事。曾祖軾。爲修文殿大提學。吳氏之盛。班班史可傳。降及元蒙。卒官參奉。至子克權。亦止直長。連二世躓而不振。豈非有待歟。直長娶唐津張氏。以嘉靖甲申正月二十六日生吳公。及長。眞率垣夷。不修邊幅。見人無親踈。一以誠意諄諄。展盡底蘊。性喜酒。遇輒歡飮。窮日夜無休時。吳公雖遊於酒人乎。而至與人欵洽。恂恂然長者。其得於天者如是。故人識與不識。見吳公無不如舊識也。夫人成氏。參奉近之女。近亦高士。其弟運。世號大谷先生者也。大谷於諸子。少許可。至夫人。未嘗不加敬曰。制行之美。吾所不及。盖其天質之美。生養有敎。目濡耳習。自成儀範。宗黨稱爲女中君子。夫以吳公之德之厚。成之以夫人訓誨之勤。向所謂發之于後者。宜大且顯。而玉樹諸孫。益彬彬焉。則余謂吳門之福。猶未艾也。吳公以辛丑十二月二十六日。壽七十八而終。成夫人。已先公三十二年而卒矣。吳公諱世賢。字國彦。系出同福。吳公卒。朝廷以子秩亞卿。推恩贈子職。王世子以子位賓客。特命賜賻儀。生死尊榮。孰與齊美。噫。吳公其有子乎。吳公凡二男。參判,司諫是已。女一人。適朴龜年。一人適李賡。一人適朴安生。皆士人。一人適參奉元鐸。廁室子曰九齡。賡有子曰時敏。女一人幼。安生有男。曰敏行。元鐸有四男。曰克河,克㵙。其季幼。葬在白川半月崗下。成夫人墓。在其左。<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