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 5. 15. 20:57
처사 권공의 묘갈명(處士權公墓碣銘) 서문 병기
처사 권공 휘 율(葎)은 효성이 지극하고 행동이 순수하였으나, 불행하게도 31세에 죽었다. 사막(沙幕)의 남향(南向) 언덕에 있는 높이 4자의 봉분이 공의 묘소이다. 1백 80년 뒤 공의 7대손 상형(相衡)이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는데, 내가 늦게 태어나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상형이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그가 했던 부탁을 생각하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였을 것 같아 차마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자는 만중(蔓仲)이고 성은 권씨이다. 고려 태사(太師 18) 행(幸)이 비조(鼻祖)이며,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벌(橃)이 찬성(贊成)을 지냈으니 시호가 충정공(忠定公)으로 바로 충재 선생(冲齋先生)이다.
동보(東輔)를 낳았으니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호는 청암(靑巖)이다. 내(來)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였는데 군자시 정(軍資寺正)을 지냈으며 호는 석천(石泉)이다.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상충(尙忠)은 집의(執義)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목(霂)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두응(斗應)은 문필(文筆)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니 호는 대졸(大拙)이다. 배위는 풍산김씨(豐山金氏) 시성(時聖)의 딸로, 청백리 양진(楊震)의 후손이다. 계배위(繼配位)는 창원황씨(昌原黃氏) 노(璐)의 딸로, 대사헌 섬(暹)의 현손인데,
공은 김씨소생이다.
숙종 임술년(1682)에 태어났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고 성품과 행동은 단아하고 삼갔으며, 젖니를 갈 어린 나이에도 의연하여 마치 노숙한 어른 같았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백부인 하당 선생(荷塘) 선생과 부인 성씨(成氏)의 손에 자랐는데, 두 분을 낳아주신 부모처럼 섬기면서 덕의(德儀)에 흠뻑 젖었고 언행에 신칙하고 삼갔다.
몸이 허약하여 옷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세운 뜻은 견실하고 확고하였다. 글에 힘쓰고 학업에 강마하여 굳이 이끌어 독려하길 기다리지 않았다. 자라면서 더욱 노력해 마지않아 식견은 밝고 뛰어났으며, 문장은 넉넉하고 막힘이 없었다.
마음가짐이나 일을 행할 때에는 한결같이 고인(古人)을 규범으로 삼아 힘써 따랐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것을 종신토록 아픔으로 여겼기에, 황씨부인을 섬기면서 지극 정성으로 뜻을 잘 받들어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황씨 부인도 공을 보기를 자신이 낳은 자식과 다름없이 하였다.
경인년(1710) 겨울에 황씨부인이 병들어 눕자 공이 본디 몸이 허약해서 힘든 일을 감내할 수 없음에도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다. 옷은 띠를 푼적이 없고 눈은 잠시도 붙인 적이 없으며, 죽을 끓이고 약을 맛보며 눈보라를 맞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상을 당하자 상복을 벗지 않았고 슬피 곡하기를 예제(禮制)보다 더하였는데, 이것이 쌓여 병이 되어 목숨이 차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스스로 병석에서 일어날 수 없음을 알았지만, 부친의 뜻을 상할까 근심하여 조금도 근심스러운 빛을 띠지 않았다. 병세가 이미 위독하였어도 정신은 흐리지 아니하여 초목자(草木滋19)를 허락하지 않고, 여종의 시중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일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임진년(1712) 6월 6일이다. 공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질로 일찍이 재현(才賢)의 가르침을 받았고, 덕기(德器)가 갖추어져 뭇사람들과 크게 달랐다. 침착하고 단정하며 간결하고 신중하여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몸에는 속된 기운이 없고 입에는 저속한 말을 담지 않았다.
안색은 편안하고 마음은 온화하였으며,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직하였다. 기쁘거나 노여워도 드러내지 않고, 신실하여 큰 어른의 풍모가 있었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형제들과 처함에 화락함을 지극히 하였으며, 일가들과 화목하고 친구들과 믿음이 있어, 그 도리를 곡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제부諸父들의 중망과 의지함을 크게 입었으니, 하당(荷塘)과 창설재(蒼雪齋20) 등 여러 선생의 애도의 만사에서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아! 위대함이여. 행실은 귀신에게 질정하기에도 충분하고, 재주는 큰일을 맡기에 충하며, 식견과 사려는 시무(時務)를 진달하기에 충분하고, 학문은 선열들을 진작시키기에 충분한데도, 하늘은 장수(長壽)를 내리지 않아 뜻만 품은 채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슬프도다!
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사인(士人) 상호(相鎬)의 딸로, 충현공(忠顯公) 돈서(惇敍)의 증손이다. 문자를 능숙히 이해하고 정숙한 덕이 있었으며, 집안 살림에도 노고를 나누어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다.
병든 부모를 모시거나 장례를 치르는 데도 공이 했던 것처럼 한결같이 하였다. 아들을 하나 두었으니 정례(正禮)이고, 딸도 하나인데 이진유(李鎭維)에게 시집갔다. 정례는 후사가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나, 종제(從弟)인 정인(正仁)의 아들 사온(思溫)을 후사로 삼았다. 이진유의 아들은 여우(汝愚)이고, 딸은 김홍원(金弘源)에게 시집갔다.
사온(思溫)의 아들은 상도(象度)․ 기도(璣度)이며 순도(舜度)는 출계하였다. 서자는 주도(胄度)․ 시도(時度)이다. 상도(象度)의 아들 재성(載成)이 또 후사가 없어 종제 재우(載祐)의 아들 행하(行夏)로 후사를 삼았다. 행하의 아들은 중연(重淵)이고, 중연의 아들이 곧 상형(相衡)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효성과 우애로움 명석함과 순수함은 / 孝友明粹。
하늘로부터 받은 본연의 자질이네 / 本之天資。
훌륭히 훈육되고 인재로 길러졌으니/ 薰擩培養。
가정에 어진 스승이 있어서라네 / 家有賢師。
어이하여 아름다운 덕 갖추었건만 / 何德之懿。
때를 만나지 못하였나 / 而閼其逢。
썩지 않을 덕을 남겼으니 / 不朽者存。
무궁토록 밝게 빛나리라 / 尙昭無窮。
18) 태사(太師) : 안동 지역이 후삼국 시대에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을 때, 이곳의 호족으로 왕건(王建)에게 협조했던 세 사람인 권행(權幸)․김선평(金宣平)․장길(張吉)을 말한다.
19) 초목자(草木滋) : 채소와 양념으로 입맛을 돋우어 준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증자(曾子)가 ‘상중에 병이 있으면 주육(酒肉)을 먹고 초목의 자미[草木之滋]도 있어야 한다.’ 하였다.” 했는데, 그 주에 “초목은 생강․계피 등을 말한다.” 하였다.
20) 하당(荷塘)과 창설재(蒼雪齋) : 권두인(權斗寅, 1643∼1719)과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을 말한다. 권두인의 자는 춘경(春卿), 호는 하당(荷塘)․설창(雪窓), 본관은 안동이다. 홍준형(洪浚亨)의 문인이다. 166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했다. 저서로는 하당집이 있다. 권두경의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본관은 안동이다. 충정공 권벌의 5대손으로 이현일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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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處士權公墓碣銘 幷序
處士權公諱葎。有至孝純行。不幸年三十一而卒。沙幕之原。負壬而崇四尺者。其墓也。後百八十餘年。七代孫相衡。責興洛以墓石之文。興洛辭以晩生無文。旣而相衡甫不幸。念不瞑之托。不忍終孤。謹按公字蔓仲姓權氏。麗太師幸。其鼻祖也。入國朝。有諱橃官贊成謚忠定。卽冲齋先生。生諱東輔郡守號靑巖。嗣子諱來。軍資正號石泉。是爲公高祖。曾祖諱尙忠贈執義。祖諱霂英陵參奉贈左承旨。考諱斗應。以筆鳴於世。號大拙。妣豐山金氏時聖女。淸白吏楊震後。繼妣昌原黃氏璐女。大司憲暹玄孫。公金氏出也。肅廟壬戊生。天資粹美。性行端愨。在齔。嶷然若老成。早失恃。鞠於伯父荷塘先生。夫人成氏。事之如所生。薰炙德儀。飭勵言行。體若不勝衣。而立心堅確。劬書講業。不待提督。長益刻勵不已。見識明透。文詞贍暢。秉心行事。一以古人爲的而勉循焉。自以早失慈庇。爲歿身痛。事黃夫人。至誠承順。慰悅無方。黃夫人視之。亦無異己出也。庚寅冬。黃夫人寢疾。公素羸瘁。不堪勤苦。而晝宵侍側。衣不解帶。目不交睫。煮粥嘗藥。風雪露處。終始不懈。及喪。衰絰不去身。哀毁踰制。積而成疾。漸至危殆。自知不能起。恐傷大人公意。略無幾微戚戚容。疾旣篤。神精不爽。不聽草木滋。不許女僕抑搔。居數日而終。實壬辰六月六日也。公以純懿之資。早被才賢之養。德器成就。大異衆人。沈凝簡重。表裏如一。體無粗俗之氣。口絶鄙俚之談。色夷而心和。外柔而內剛。喜怒不形。恂恂有長者風度。事父母盡其孝。處兄弟。極其怡愉。睦於宗族。信於交友。無不曲盡道理。大爲諸父所倚重。觀於荷蒼諸先生哀悼之言。可知也。於乎偉哉。衍足以質鬼神。才足以任大事。識慮足以達時務。問學足以振先烈。而天不假年。抱志而歿。悲夫。配延安李氏。士人相鎬女。忠顯公惇敍曾孫。通解文字。有靜淑之德。執爨分勞。竭誠盡禮。侍疾居憂。一如公所爲。生一男正禮。一女適李鎭維。正禮又早世無嗣。以從弟正仁子思溫后。李男汝愚。女金弘源。思溫男象度,璣度。舜度出。餘男胄度,時度。象度男載成又無嗣。以從弟載祐子行夏后。行夏男重淵。重淵男卽相衡。銘曰。
孝友明粹。本之天資。薰擩培養。家有賢師。何德之懿。而閼其逢。不朽者存。尙昭無竆。<끝>
출처 : 서산집(西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