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 05. 15. 20:43
쌍림초등학교 제33회(해방후 제16회) 졸업50주년 기념 경주여행
◇여행기간 2011. 05. 13(금) ~ 2011. 05. 14(토)
◇졸업년도 : 1961년 3월 16일
◇총 졸업생 : 76명(남48명. 여28명)
◇고 인 : 12명
◇참석인원 총23명(남14명. 여9명)
--------------------------------------------------------------------------------------------------------------------------------------------------------
동창회서 주관하는 초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 1박 2일 경주(慶州) 여행을 다녀왔다.
50년은 긴 시간이었지만, 엑스포공원→불국사→감포 문무대왕릉→석굴암→안압지→경주 최 부자 집 고택→경주박물관→천마총의 순서로 여행을 마쳤다.
매년 동창회를 갖지만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 3시까지 얘기 꽃을 피우며, 친구들과 지낸 그 시간은 너무 짧게 느껴진다.
그리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블로그 친구 경주 지킴이 김정자 선생께서 숙소에 맡기고 간 경주 황남빵과 경주 법주 선물은 너무 고마웠다. 바쁜 여행 일정으로 만나고 오지 못한 아쉬움이 내내 남는다.
ⓒ경주 불국사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 ⓒ 이재훈
ⓒ 다산북스 ㅣ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석굴암 본존불
신라인의 이상형이었던 이 부처는 당나라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도 기록돼 있는 인도 보드가야 대각사 부처와 크기가 똑같다.
불국사는 석가모니와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사찰로 불교의 나라를 지향하는 신라인의 이상향을 지상에 세워 놓은 곳이다.
동해안의 문무왕 수중릉을 향해 세워진 석불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 사찰로 신라인의 염원을 담고 있다.
건립연대 774년
신라의 재상 김대성이 경덕왕의 명에 따라 불국사를 다시 짓고 석불사(훗날 석굴암으로 이름이 바뀜)를 새로 지었다(774년 완공).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대성은 전생에 경주 모량리의 가난한 여자 경조의 아들로 태어나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의 이익을 얻으리라”라는 스님의 말을 듣고 품팔이로 마련한 밭을 시주한 뒤 죽었다.
그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서 다시 태어난 김대성은 전생의 어머니 경조도 모셔와 함께 살았다.
김대성은 어느 날 곰을 사냥했는데, 꿈에 그 곰의 귀신이 나타나 환생하여 김대성을 잡아먹겠다고 했다.
김대성이 용서를 빌자 곰은 자신을 위하여 절을 지어 달라고 했다. 꿈에서 깨어난 김대성은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그리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지었다고 한다.
▲물질세계에서 붓다의 나라로 건너가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아름다운 다리에서.........
불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사는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물을 건너고 구름 위로 가야 하는데, 청운교와 백운교의 이 두 다리(계단)는 물질
세계에 이를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하여 물을 건너려면 다리가 있어야 하고, 또 구름위로 가야 하니 청운교와 백운교라는 이름의 다
리가 생긴 것이라 하네요. 하여 이 다리를 올라가면 자하문이 나오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붓다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경주 안압지 경내에 있는 월정교(月精橋) 복원공사 모형.
경주 최부자집과 요석궁 근처의 남천에는 터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사적 제457호인 월정교(月精橋)
의 흔적이 남아 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월정교(月精橋)는 통일신라 최 전성기인 경덕왕 19년(760년)에 조성된 대규모 다리로,
왕궁인 월성에서 남단으로 연결하는 통로로 이용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라 왕궁의 후원(後園)으로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674년(문무왕 14)에 완성되었다.
1975~86년의 발굴조사에 의해 유구가 밝혀졌는데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호안(石築護岸)과 서쪽 호안 변에서 5개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부정형(不整形)의 석축호안은 서쪽 호안선만 직선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호안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다.
입수구(入水溝)는 동쪽과 서쪽의 호안이 만나는 곳에 설치되어 있고, 출수구(出水溝)는 북쪽 호안에 있으며, 연못 안에는 3개의 섬
이 있다.
연못의 바닥에서 신라 왕족과 귀족이 썼던 일상생활 유물인 목선(木船)· 목상(木像)· 장신구· 주사위 등과 불교미술품인 불상, 광배,
'조로 2년'(調露二年:680)이라는 명문이 씌어 있는 보상 화문전 등 다수가 발굴되어 번성했던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를 보다 총체
적으로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안압지(雁鴨池)는 한국 조경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원지(園池)의 원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 틀림없다.
▲좌측으로부터 백문선((白文先) 여사, 설옥순(薛玉順) 여사, 유명숙(兪明淑) 여사.
▲좌로부터 이병주. 구옥자. 설필선
▲서울에 사는 薛玉順 여사.
▲경주 교동의 경주최씨 고택
▲경주 교동의 경주최씨 고택
입력시간 : 2010. 01.13(수). 00:00
■ 경주최씨 司成公派 崔浚 집안(상)
300년을 지킨 만석꾼의 비밀
경주 최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경주 '최 부자 집'을 빼놓을 수 없다. '권불 10년(權不十年) 부불 3대(富不三代)'란 말이 있는데, 이 집안은 9대에 걸쳐 진사를 했으며, 12대에 걸쳐 만석꾼을 했다. 이 기적적인 기록의 의미도 크지만, 그 부의 관리와 베풂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이 집안의 고택과 필자는 인연이 깊다. 1960년, 경주시에 있던 제18육군병원에서 이등병으로 군 복무를 했었다. 중대본부 인사계의 업무를 맡았던 관계로 시내 외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때 자주 외출해서 시간을 보낸 곳이 첨성대에서 가까운 최 부자 집이었다.
그 집 사람들, 그리고 집 뒤쪽의 향교 사람들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때 들었던 구전이 이번 취재 과정에 많은 도움이 됐다. 이 집안의 내력을 알아보자. 최 부자 집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司成公派)의 지파인 가암파(佳岩派)이며, 파조(派祖)는 최진립(崔震立ㆍ1568-1656)이다.
최진립은 경주최씨 시조 최치원의 17 세손으로 부친 최신보(1531-1577)가 정착했던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가 암촌(佳岩村)에서 태어나 살았다. 최신보는 이웃마을에 살던 참봉 황 임종의 외동딸과 결혼했는데, 황 참봉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잣집 처가 재산을 모두 상속받게 되어 일시에 부자가 됐다.
그 후 부인 황씨가 갑자기 죽게 되고, 그는 재혼하여 강씨를 계실(繼室)로 들였는데, 장인 강씨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두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게 된 최씨 집안은 더 큰 부자가 됐다. 딸에게도 상속권이 있었던 때라 처가 재산을 상속받은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최신보의 아들 최진립은 총명했고 천품이 준수했다. 재산과 덕행을 겸비해 추앙받는 토호가 됐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으로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는 68세의 노쇠한 몸으로 경주에서 군량미와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 전투에 출전했다가 전사했다.
그의 셋째 아들 최동량이 마을에 인접한 형산강 상류를 간척하게 됐다. 그는 간척지를 경작하는데 소출한 곡식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적용하였다. 병작제의 소식을 듣고 소작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최씨네 땅 간척에 적극 협력했다. 이렇게 전답을 크게 확장했고, 그의 아들 최국선은 만석지기 대지주가 됐다.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7대가 만석꾼을 유지해오다가 집안의 불화와 갈등으로 최진립의 8 세손 최기영(1768-1825)이 현 교동으로 이주했다. 그 이전에 최언경(1743-1804)이 지금의 터에서 미리 살고 있었다는 구전도 있다. 지금의 교동에서는 기영, 세린, 만희, 현석이 차례로 토반으로서 만석지기의 집안을 탄탄하게 지켜오다가 최준 대에 이르러 가세가 쇠퇴했다.
문파(汶坡) 최준(崔浚ㆍ1884-1970)은 시조 최치원의 28 세손이고 파조 최진립의 12 세손이다. 영남의 대지주인 그는 일제강점기에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았고,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고 항일투쟁을 했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백산상회도 부도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 됐고,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과 경상 합동 은행에 의해 대부분의 재산이 압류되었다.
이후 남은재산을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의 설립에 내놓았다. 이렇듯, 그는 '최부자집'의 품위를 끝내 잃지 않고 마지막 만석꾼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집안은 '부불 3대(富不三代)'란 말을 비웃듯이 12대 동안 만석꾼을 지켜왔고, 또 세상의 인심을 재산만큼 쌓고 살았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은 집안의 가훈에서 찾을 수 있다. 집안사람들이 가훈을 충직하게 궁행(窮行)했기에 '최부자집'의 전설이 후세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가훈이 참으로 훌륭하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기서 과거는 대과가 아닌 소과 중 진사과를 말하며, 진사(進士)는 진사과 급제자에게
주어진 미관말직으로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이 집안은 9대가 진사까지만 했다.
둘째, 재산은 만석이상 모으지 말라했다. 실제 만석 이상의 소출이 나면 소작료를 감면해 주었다.
셋째, 어떤 과객도 후하게 대접하라 하였다. 과객이 많을 때는 하루에 100명이 됐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넷째는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라 했다. 헐값으로 전답을 사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다섯째는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으라 했으며,
여섯째는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었다.
최 부자 집은 매년 쌀 생산량 중 1000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1000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쌀 창고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으며, 이런 쌀 창고가 4채가 있었고, 하인이 100여 명이 됐다고 한다.
경주 최씨 사성공파(司成公派)의 '최 부자 집'은 300년이 넘게 지켜온 만석지기를 잃었지만, 그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 도덕적 책무)를 충직하게 실천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