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의 사자성어(72).>
견리사의(見利思義)
볼 견(見). 이로울 리(利), 견리(見利)라 함은 ‘이익을 본다’라는 뜻이고, 생각 사(思), 옳을 의(義), 사의(思義) 라 함은 ‘올바른 것인 가를 생각한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견리사의(見利思義)라 함은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올바른 것인 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를 의미한다.
견리사의라는 말은 논어의 헌문편(憲問篇)에 나온다.
공자는 논어를 통해 “불의로써 부귀를 누리는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라고 했다.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나쁜 짖을 해서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들 그것이 얼마나 가겠는가? 공자에게 있어서는 모두 정처없이 뜬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이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擊蒙要訣)에 견득사의(見得思義)라는 말이 나온다. 견득사의(見得思義)도 같은 말이다. 재물 앞에서는 반드시 정의로운 것인 가를 분명히 따지고, 정의에 합당한 것만 취하라는 것이다.
견득사의를 몸소 실천한 율곡선생은 일생을 청빈하게 살았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남은 것은 책과 부싯돌 뿐이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제자들이 모금을 하여 장례를 치루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의로울 의(義)는 선비정신의 표상이며, 모든 덕목에서 우선이었다. 이익보다 의리를 중요시하는 경리중의(輕利重義)사상과 대의를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생취의(捨生取義)사상은 선비의 인생관과 가치관의 기본원리였다. 선비는 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는 있어도, 살아서 그 뜻을 굽혀 몸을 욕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의는 그들의 혼이요 행동의 최고 원리이며 의를 떠나서는 선비를 생각할 수 없으므로 대의멸친(大義滅親)이나 선공후사(先公後私)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조헌(趙憲)은 임진왜란 때 700명의 선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싸움에서 모두 함께 죽음을 맞아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塜)에 묻혔다. 이들은 의를 따라 죽은 것이며 이 순국정신은 이후 국가를 지키는 주춧돌이 되고 있다.
조선초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을 한 성삼문은 대쪽같은 절의(節義)의 선비였다. 그가 읊은 절의가(絶義歌)가 이를 말해준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 지언정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세였거들 긔 뉘 땅에 났더니.“
「수양산을 바라보며 백이·숙제 형제를 원망하노라.
굶어 죽을 지언정 고사리를 캐어 먹는다는 말인가.
그것 역시 그대들이 섬길 수 없는 주나라 무왕의 땅에서 난 것이 아닌가.」
성삼문은 세조 찬탈에 맞서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그 의기는 꺽임이 없었다고 한다.
서울의 남산 기슭에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앞의 비교적 넓은 공터에 안중근 의사의 옥중 글씨가 바윗돌에 새겨져있다. 여러 글씨 중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 돋보인다. “이익을 보면 그것이 의로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가 위급하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한반도 침략을 기획하고 실행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이 외쳤던 대동아공영(大同亞共榮)이 허구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는 의거였다.
스스로 목숨을 던져 저항의 횃불을 들었던 안중근(1879~1910)의사는 견리사의와 견위수명을 몸소 실천한 분이다. 이익을 보면 의리도 내팽개치는 견리망의(見利忘義)의 혼탁한 세상에 우리에게 인간의 참모습을 일깨워주고 있다. 사람은 가도 그 정신과 위업은 영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023.5.16)
볼 견(見). 이로울 리(利), 견리(見利)라 함은 ‘이익을 본다’라는 뜻이고, 생각 사(思), 옳을 의(義), 사의(思義) 라 함은 ‘올바른 것인 가를 생각한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견리사의(見利思義)라 함은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올바른 것인 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를 의미한다.
견리사의라는 말은 논어의 헌문편(憲問篇)에 나온다.
공자는 논어를 통해 “불의로써 부귀를 누리는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라고 했다.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나쁜 짖을 해서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들 그것이 얼마나 가겠는가? 공자에게 있어서는 모두 정처없이 뜬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이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擊蒙要訣)에 견득사의(見得思義)라는 말이 나온다. 견득사의(見得思義)도 같은 말이다. 재물 앞에서는 반드시 정의로운 것인 가를 분명히 따지고, 정의에 합당한 것만 취하라는 것이다.
견득사의를 몸소 실천한 율곡선생은 일생을 청빈하게 살았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남은 것은 책과 부싯돌 뿐이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제자들이 모금을 하여 장례를 치루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의로울 의(義)는 선비정신의 표상이며, 모든 덕목에서 우선이었다. 이익보다 의리를 중요시하는 경리중의(輕利重義)사상과 대의를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생취의(捨生取義)사상은 선비의 인생관과 가치관의 기본원리였다. 선비는 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는 있어도, 살아서 그 뜻을 굽혀 몸을 욕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의는 그들의 혼이요 행동의 최고 원리이며 의를 떠나서는 선비를 생각할 수 없으므로 대의멸친(大義滅親)이나 선공후사(先公後私)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조헌(趙憲)은 임진왜란 때 700명의 선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싸움에서 모두 함께 죽음을 맞아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塜)에 묻혔다. 이들은 의를 따라 죽은 것이며 이 순국정신은 이후 국가를 지키는 주춧돌이 되고 있다.
조선초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을 한 성삼문은 대쪽같은 절의(節義)의 선비였다. 그가 읊은 절의가(絶義歌)가 이를 말해준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 지언정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세였거들 긔 뉘 땅에 났더니.“
「수양산을 바라보며 백이·숙제 형제를 원망하노라.
굶어 죽을 지언정 고사리를 캐어 먹는다는 말인가.
그것 역시 그대들이 섬길 수 없는 주나라 무왕의 땅에서 난 것이 아닌가.」
성삼문은 세조 찬탈에 맞서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그 의기는 꺽임이 없었다고 한다.
서울의 남산 기슭에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앞의 비교적 넓은 공터에 안중근 의사의 옥중 글씨가 바윗돌에 새겨져있다. 여러 글씨 중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 돋보인다. “이익을 보면 그것이 의로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가 위급하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한반도 침략을 기획하고 실행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이 외쳤던 대동아공영(大同亞共榮)이 허구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는 의거였다.
스스로 목숨을 던져 저항의 횃불을 들었던 안중근(1879~1910)의사는 견리사의와 견위수명을 몸소 실천한 분이다. 이익을 보면 의리도 내팽개치는 견리망의(見利忘義)의 혼탁한 세상에 우리에게 인간의 참모습을 일깨워주고 있다. 사람은 가도 그 정신과 위업은 영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023.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