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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2022년 1월 30일 주일 설교
제목 :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
본문 : 사무엘상 31장 11~13절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한 일을 전해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용사들이 모두 나서서, 밤새도록 걸어 벳산까지 가서, 사울의 주검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로 돌아와, 그 주검을 모두 거기에서 화장하고, 그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야베스에 있는 에셀 나무 아래에 묻고, 이레 동안 금식하였다. <사무엘상 31장 11~13절, 새번역>
샬롬!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주님의 날 변함없이 인사를 전합니다. 먼저 1월 한 달, 희망을 노래하며 멋지게 달려오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의 감사와 격려와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잘 살아내셨습니다. 여러분이 희망입니다. 계속 희망이 되어 살아주십시오!’
어느덧, 2022년 새해의 문을 열었던 1월도 다 지나고 있습니다. ‘와~이렇게 빨리 한 달이 흐르다니!’ 저와 같이 놀라는 분들이 많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어제부터 시작된 설날 연휴로 인해 시간은 더 빨리 흘러가서 2월은 그냥 흘러가 금방 3월, 드디어 봄이 올 것 같습니다. 부디, 모든 것에 봄이 오기를 벌써부터 설레임과 기대로 기도해 봅니다.
오늘 1월 30일, 1월의 마지막 주일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구약 사무엘상 31장 11~13절을 본문으로 하는,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입니다. 변함없이 은혜의 말씀을 우리를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며 함께 새번역으로 준비된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한 일을 전해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용사들이 모두 나서서, 밤새도록 걸어 벳산까지 가서, 사울의 주검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로 돌아와, 그 주검을 모두 거기에서 화장하고, 그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야베스에 있는 에셀 나무 아래에 묻고, 이레 동안 금식하였다. <사무엘상 31장 11~13절>
구약성경 사무엘상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사무엘이 다시 확인해 준대로, 사울왕의 시대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할례 받지 않은 상대방에게 죽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선택한 사울은 그렇게 찬란했던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은 그런 사울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사울의 목을 자르고 주검을 벳산 성벽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전하며 사무엘상이 마무리가 되고 사무엘하로 발걸음을 옮기는 듯 보입니다.
우리는 이 사무엘상의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사울왕이 죽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지 15년 동안이나 사울 왕의 자리를 뺏지 않고 기다리셨던, 그토록 사울의 회개를 기다리셨던, 하나님의 기다림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오라고, 절대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손을 잡아주시던 하나님을 뿌리치고는 '자신의 세계'로 향하던 사울의 결말이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드디어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왕, ‘다윗’의 시대가 열린다고 만세라도 불러야 할까요? 드디어 악한 사울왕의 시대가 가고, 그토록 기다리던 다윗이 왕이 되었다고 박수를 쳐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우리에게 이 질문에 대해 답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게도 성경은 조용히, 잊어버리고 있던 한 마을의 사람들을 등장시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에 절로 박수가 나오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바로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입니다.
혹시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사울왕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왕에게도 은인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를 거슬러 올라가 사울왕이 처음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 받아 기름부음을 받았을 시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어떠한 인정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성경 기록 그대로 보자면 '어떻게 그런 자가 우리의 왕이 될 수 있냐'는 비아냥을 듣던 사울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왕이 일순간 모두에게 진정한 '왕'으로 추대 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을 암몬에게서 구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조금 긴 이야기이지만 사울과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천천히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의 야베스를 포위하였다. 그러자 야베스 사람들이 모두 나하스에게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우리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하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암몬 사람 나하스는 "내가 너희의 오른쪽 눈을 모조리 빼겠다.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는 조건에서만 너희와 조약을 맺겠다" 하고 대답하였다. 야베스 장로들이 또 그에게 제안하였다. "우리에게 이레 동안만 말미를 주셔서,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역으로 전령들을 보내도록 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구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우리가 항복하겠습니다." 전령들이,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에 가서 백성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백성들이 모두 큰소리로 울었다.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백성이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야베스에서 온 전령들이 한 말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니, 그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다. 사울은 겨릿소 두 마리를 잡아서 여러 토막으로 자른 다음에, 그것을 전령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스라엘 모든 지역으로 말을 전하라고 보냈다.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따라나서지 않으면, 그 집의 소들도 이런 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온 백성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시니, 모두 하나같이 그를 따라나섰다. 사울이 그들을 베섹에 모으고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에서 삼십만 명이 왔고 유다에서 삼만 명이 왔다. 기브아 사람들이 야베스에서 온 전령들에게 말하였다.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들에게 가서, 내일 햇볕이 뜨겁게 내리쬘 때쯤에는 구출될 것이라고 전하여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니, 그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래서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사람들에게 회답하였다. "우리가 내일 당신들에게 나아가 항복하겠습니다. 그 때 가서는 우리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다음날 아침 일찍 사울은 군인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가지고, 새벽녘에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날이 한창 뜨거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쳐서 죽였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다 흩어져서, 두 사람도 함께 있는 일이 없었다. 백성이 사무엘에게 와서 말하였다. "사울이 어떻게 우리의 왕이 될 수 있느냐고 떠들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런 자들을 내주십시오. 우리가 그들을 쳐서 죽이겠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나서서 말하였다. "오늘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신 날이오.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못하오."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길갈로 가서, 사울이 우리의 왕이라는 것을 거기에서 새롭게 선포합시다." 그래서 온 백성이 길갈로 가서 그 곳 길갈에 계시는 주님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 그들은 거기에서 짐승을 잡아서 주님께 화목제물로 바쳤다. 거기에서 사울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크게 기뻐하였다. <사무엘상 11장 1~15절, 새번역>
바로 이 사건입니다. 암몬 사람으로부터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을 구하게 된 일 때문에 온 이스라엘 백성은 길갈에 모여서 사울왕을 제대로 추대하고 왕으로 세우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때가 사울왕의 소위 '리즈'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는 것을 경험한 후 온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모아서 암몬의 손에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한 사울! 그가 왕이 되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크게 기뻐했었습니다.
사울은 아마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때를 회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그 순간, 그 마음, 초심을 잘 유지했더라면...!
그렇게 사무엘상 11장에 등장하고서는 잊혀져 있던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은 사무엘상 31장, 사울왕과 사무엘상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예전에 사울에게 받은 도움에 대한 은혜를 갚습니다. 솔직히 거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울의 죽음을 ‘인과응보’ 당연하듯 인정했을지도 모를 그 때,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만은 다른 행보를 걸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이 용사들을 보내어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 깊숙한 곳으로 가서 사울의 주검을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주검을 화장한 후 에셀 나무 아래에 묻고는 7일 동안 금식하면서 애도의 시간을 갖습니다.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한 일을 전해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용사들이 모두 나서서, 밤새도록 걸어 벳산까지 가서, 사울의 주검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로 돌아와, 그 주검을 모두 거기에서 화장하고, 그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야베스에 있는 에셀 나무 아래에 묻고, 이레 동안 금식하였다. <사무엘상 31장 11~13절>
이 부분이 목에 걸린 듯 탁 걸려서 며칠에 걸쳐 묵상을 하게 되었는데 묵상을 하는 내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터져 나왔는지 모릅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사무엘상이 끝나가고 있는데 사무엘도, 사울도, 다윗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관심은 매번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성경은 의도적으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의 이야기로 사무엘상을 마무리하고 사무엘하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들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진짜 무엇인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 교회란 어떤 것인지, 진짜 희망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본보기'를 보여주는 듯 느껴졌기 때문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저의 시선은 제 생각하는 주인공에게만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토록 성경을 보는 눈이 좁으니 이 좁은 시선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리고 묵상의 끝에 불현듯 신약에 등장하는 인물 '아리마대 요셉'이 떠올랐습니다. 그 역시도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과 같이 본보기가 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를 이어주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다리'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희망의 씨앗을 꺼뜨리지 않기 위하여 죽음까지도 무릅쓰고 빌라도를 찾아간 희망의 사람이었습니다. ‘희망의 다리’가 바로 아리마대 요셉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희망의 다리’, 아리마대 요셉에 앞서 구약에 등장하는 '희망의 다리'같은 이들이 바로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을 줄 알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그 누구도 애도하지 않는 사울왕의 죽음을 7일간이나 금식하면서 함께 눈물 흘려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며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사울과 다윗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희망을 전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작지만 큰 울림을 주고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정말 저는 사무엘과 사울, 다윗에게만 눈이 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린 늘 대단해 보이고, 위대해 보이고, 이슈가 되고, 중요하고, 크고 놀라운 일들에만 눈을 돌립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표현되는 약한 자들을 향한 시선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늘 강자의 편에 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약자의 편에 서계심을 알고서도! 오늘도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조연들을 사랑하는 줄 알면서도! 언제나 지극히 높은 자들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너무도 잘 알면서 말입니다.
성경은 약자를 들어 사용하시면서 진짜 '강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조연'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서 '주인공'이 하나님이 되셔야 함을 밝히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지극히 작은 자로 낮추면서까지 지극히 높은 자들에게 빠져있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라고 요청하는 책입니다. 성경은 밝혀야 할, 요청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구약에서는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을, 신약에서는 아리마대 요셉을 특별히 아주 중요한 시점에 등장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 코로나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며 일상 회복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던 가을에 서울 모처에 있는 한 크고 아름다운 교회 앞에 갔다가 마음이 너무도 답답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 날 동역자들과 함께 '진짜 교회와 이웃 사랑 실천'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면서, 성경을 묵상하고, 말씀을 찾아본 후라서 더욱 답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눈물 흘리기 전에 그 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어마어마한 교회의 크기에 압도되어 버린 것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꽤나 오래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옮겨야 다 볼 수 있을 정도의 큰 교회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우와! 교회 진짜 예쁘고 크구나! 여기는 성도가 몇 명이나 될까?” 라는 말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참 다시 말씀드리려니 민망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이런 교회 나에게도 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답답하게 된 이유는 시선을 더 아래로 옮겼을 때 등장합니다. 시선을 높은 십자가 종탑에서 땅으로 옮겨오자 그 큰 교회 앞 벤치에 박스를 덮고 누워있는 노숙자 한 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을 발견한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부끄러웠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교회와 노숙자 한 분의 모습이 동시에 보이자 무엇인가 마음에 먹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바라보는데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잠시 막막한 마음으로 서 있다가 그 순간 느낀 부끄러움을 오래 오래 기억하고자, 그 감정을 가슴에 새기고자, 그 자리를 조금 벗어나 저도 벤치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에 가사를 붙여 '교회 앞에서, 소감'이라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목마른 인생길 생수를 마시려 교회에 가네
하지만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네
지극히 작은 자 그에게 한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더니
지극히 높은 자 그들만 보고 있네
교회엔 아무 것도 없네 사랑쯤은 남았을 줄 알았는데
교회엔 아무 것도 없네 하나님을 어디다 버린 것일까
교회엔 아무 것도 없네 성경책만 덩그러니 먼지만 가득
교회엔 아무 것도 없네 교회라고 부르려니 마음 아프네
세상을 많이도 걱정한 교회는 변해버렸네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네
교회엔 버릴 것이 많네 미움다툼 시기질투 마음의 병들
교회엔 버릴 것이 많네 니편내편 권력다툼 치열한 전쟁
교회엔 버릴 것이 많네 내가 진리 날 따르라 헛된 목자들
교회엔 버릴 것이 많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버려져있나
그런데 왜 말씀이 버려져있나 그런데 왜 사람이 주인공인가
세상을 많이도 미워한 교회는 닮아버렸네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네
어느덧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간절히 바라고 있네
이제는 교회가 말씀을 따르기를
어느덧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간절히 호소하네
이제는 교회가 교회가 되달라고
우리가 그토록 걱정한 세상이 이제는 도리어 우리를, 교회를, 그리스도인들을 걱정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미워한 세상이 이제는 도리어 우리를, 교회를,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따르고, 교회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데까지 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무엘이 되고 싶어 했고, 사울이 되고 싶어 했고, 다윗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될 생각조차 없습니다. 너무 확정적으로 말씀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누군가에게라기보다 제 자신에게 먼저 하는 말입니다. 먼저 저라는 '교회'에 대해서 쓴 가사였고, 오늘 말씀 역시 먼저 저라는 '교회'에게 생각해보라고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사라져 버린 제 자신의 변화를 먼저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부터 변해야 합니다. 저부터!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무엘도, 사울도, 다윗도 아닌 결국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이 되어야 합니다. 실로 ‘희망의 다리’였던 아리마대 요셉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바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한 영혼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한 주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또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사무엘로, 사울로, 다윗으로 세상을 살 것인지 아니면 길르앗 야베스의 주민들처럼, 아리마대 요셉처럼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기는 '빛과 소금'이 되어 ‘희망의 다리’로 사는 길을 선택해 주셨으면 합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 약한 자들, 도움이 필요한 자들, 함께 울어야 할 사람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이들과 함께 해 주십시오. 받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이가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해야 할 일, "사랑하며 살아주십시오." 오직 사랑만이 다시 ‘교회가 교회가 되는’ 길입니다. 그렇게 2022년 2월에는 교회가 이 땅의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2020년 10월에 출간된 김형석교수님의 책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라는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책의 내용은 직접 보시길 권하면서 저는 책의 뒷면에 있던 글귀를 전하며 이 책을 추천하려고 합니다.
"기독교가 인류에게 영원히 희망이 될 수 있는 길은 사랑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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