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서 서해까지'
정찬열의 최전방 지역 도보횡단
<5> 강원도 양구
입력날짜:2011년 10월 7일(금)
전쟁기념과 독특한 상징물 발길 붙잡아
멸종위기 산양 보호 ‘증식센터’도 눈길
다섯 째날 -(5월 6일) 금요일
횡단 다섯 째 날이다. 아침밥을 파는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마트에서 빵 한 봉지와 김밥 한 줄을 샀다. 새벽공기가 상큼하다. 해안면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산모퉁이 따라 냇물이 휘돌고 물길 따라 길이 굽이친다. 산 첩첩 물 첩첩, 산이 깊어진다. ‘산다는 것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이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적막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귀 기우리니 온갖 소리가 들려온다.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새싹 움트는 소리, 꽃잎 벙글어지는 소리.... 발걸음만 멈춰도 이렇게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자잘한 것들을, 작지만 귀한 많은 것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스쳐 지나왔다.
큰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작은 소리들을 들으면서 인디언의 얘기를 떠올린다.
“이 세상의 부(富)는 빌려온 것이다. / 진실로 좋은 것은 아무도 혼자 소유할 수 없다. // 태양은 황금빛 햇살을 내리고, / 대지는 샘솟는 옥빛 물을 선사한다. // 옥수수의 녹색 이파리를 만지듯, / 우리는 그 생생함을 느낀다. / 하지만 우리는 이 가운데 / 그 어느 것도 하루 이상 가질 수 없다. / 찰나가 지나면 그 아름다움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 이 세상에서 인간이 영원히 / 소유할 수 있는 것은 기억뿐이다. / 올바른 행동에 대한 회상과 사람들에 대한 소중한 기억. / 이것 하나만은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으며, /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군인 2명이 트럭에 올라 경계를 서고 있다. 한 명은 제대 2개월 남고, 다른 한 명은 15개월 남았다고 한다. 복무연한이 21개월이니 두 번째 친구는 입대한지 6개월째라고 대답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하나마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지난 달 입대한 녀석은 제대 20개월 남았다, 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길가 잔디밭에 앉았다. 제비꽃이 피어있다. 들꽃, 흙이 쏘아 올린 축포다. 가까이 보니 참 예쁘다. 오래 바라보니 사랑스럽다. 사람들은 눈길을 먼 곳에만 둔다. 지뢰 표시가 철조망에 걸려있다.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경고다. 철조망 넘어 싸리꽃이 환하게 웃으며 어서 들어오라고 유혹을 한다. 움터 나오는 연초록 봄 싹들이 보드랍다.
“신속배달. 차량운행, 치킨 두 마리 18,500원, 피자 두 판 19,900원 펀치볼 치킨 피자 족발 ” 선전 배너가 붙어있다. 어제 인제에서 보았듯이 들판에서 일하는 농민들이나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다
이제부터 양구군 해안면이다.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양구에 오시면 10년이 젊어집니다” 환영 문구가 보인다. 10년이 젊어진다?
개 짖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린다. 개 농장이다. 닭장처럼 작은 우리 안에 개를 가두어놓았다. 갑갑해서 미치겠다는 듯, 갖혀 있는 나를 구해달라는 듯 지나가는 나그네를 향해 짖는다. 수 십 마리가 함께 짖어댄다. 울부짖는다. 저렇게 기른 개를 식용으로 내다 파는 모양이다. 시끄러운 것쯤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듯 진달래는 예쁜 꽃을 피워낸다.
펀치볼 마을에 도착했다. 인삼밭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길가 바위틈에 벌통이 놓여있다. 한봉이다. 나물 캐러 왔다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포대가 제법 묵직해 보여 무슨 나물을 캤냐고 물었더니, 취나무, 잔대짝, 중영가라, 가얌치, 고사리 등을 캤다고 자루를 열어 보여준다. 건너편에 보이는 삼밭 주인이란다. 이곳 서화면 인구가 1300명 정도인데 외지인이 300명 정도는 될 것이란다. 인삼과 감자, 그리고 무 주산지 이며, 인삼 재배로 유명한 금산에서까지 삼 농사를 지으러 온다고 했다. 감자는 대부분 제과점이나 과자공장과 계약재배를 한다고 했다.
길가에 ‘양구 전쟁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상징물이 독특하다. 입구에 한 병사가 통나무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오른쪽 손을 무릅 위에 괴고 무릎에 뉘어놓은 소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우의를 입고 지친 듯 앉아 있는 저 병사. 무엇을 저렇게 골돌히 생각하고 있을까. 고향의 어머니를 기리고 있을까,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고 있을까. 아니면 싸움터에서 숨져간 전우를 생각하고 있을까. 전쟁이란 무엇인가, 를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각품 하나가 나그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기념관에서 뜻밖에 한 미국인 젊은이를 만났다. 아담 로빈이라고 했다. 순천에서 초등학교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2년간 한국을 잘 구경하고 있으며, 다음 달 고향에 돌아간단다. 반도 남쪽을 거의 둘러보고 오늘 마지막으로 휴전선 가장 가까운 이 지역을 보러왔다고 했다. 텍사스 출신이라기에 캘리포니아에 와 보았냐고 물었더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단다. 허긴 나도 미국 산 지가 30년이 되어 가는데 동부 지역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으니까.
다음 칸으로 발을 옮기니 벽에 전사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춘천고등학교, 춘천사범, 춘천 농업고등학교 학도병 참전명단이 주욱 새겨져 있다. 경기주, 박기병, 오태환.... 피어보지도 못하고 산화한 젊은 영혼들이다. 옆에 설명이 붙어있다. “기록에는 한국전쟁 중 이곳 양구지역전투에서의 전사자가 3,800여명으로 나타나 있으나 실명으로 확인된 전사자는 불과 1,100여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름 석 자마저 후세에 남기지 못한 채 양구의 땅에 묻힌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의 젊은이들. 그 고귀한 뜻을 여기에 담에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전쟁당시의 상황을 만들어 배치해 놓았다. 녹슨 철모, 탄피 등이 진열되어있다. 펀치볼 전투 현장을 묘사해 놓았다. 꽃다운 나이에 숨져간 분들을 생각한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폭풍 불어 닥쳤다 / 눈보라 휘몰아쳤다 / 그 해 여름 갑자기 / 총성은 심장을 향해 소름끼치게 달겨들고 / 포성은 하늘을 가르는 듯 삶의 산하를 할퀴고 지나갔다.....”
전쟁은 끝났다. 아니, 잠시 휴전일 뿐이다. 세상에 착한 전쟁이란 없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모른다. 그래서 전쟁을 함부로 입에 올린다.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밖에 나오니 빗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기념관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더덕을 팔고 있다. 칼로 깨끗하게 다듬어 주는데 한 봉지 5천원이다. 먹어 보라며 하나 깎아주신다. 상큼하다. 한 봉지 샀다. 아까 만났던 로빈이 신기한 듯 곁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에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더니 그러자며 선선히 대답한다.
더덕을 한 봉지 더 샀다. 식당에 가져가서 먹을 거라고 하니, 꼭 김해식당에 가서 먹으란다. 마땅히 아는 곳도 없는 터라 할머니 말씀 따라 그곳으로 갔다. 돼지고기 볶음을 시켰다. 음식이 입에 달라붙는다. 로빈이라는 젊은 친구가 소주도 잘 마신다. 한국에 와서 술이 꽤 늘었단다. 더덕을 고추장에 찍어먹기도 한다. 녀석이 한국 칭찬 일색이다. 점심을 맛있게 자알 먹었다. 켈리포니아에 올 기회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더니, 텍사스에 오면 꼭 연락하시라며 밝게 웃는다. 길에서 만난 인연이 참 좋다.
해안성당이 있어 들어갔는데 문이 잠겨 있다.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 란 말이 돌에 새겨져 입구에 서 있다. 이곳은 잠궈 놓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보다.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해안면 파출소에 들렀다. 순경 두 명이 근무 중이다. 하루 두 명씩 교대로 근무한다고 했다. 2년 전 종단 때, 강원도 창평 부근 어느 파출소에 경찰은 없고 “필요하면 연락하시라”는 쪽지가 문에 붙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사이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길가 도랑물이 소리 내어 흐른다.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는다. 큰 정미소 쌀 저장탱크가 보인다. 후둑후둑 비가 내린다. 길가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비옷을 꺼내 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1키로 쯤 걸어갔는데 아뿔사, 지팡이를 놓고 왔다. 스님이 손수 만들어 주신 지팡이라 싶어 되돌아가서 가져 왔다. 한 걸음이 아쉬운 마당에 2킬로미터 헛걸음질 했다. 그나마 빨리 알아차렸기 다행이다. 허기야 우리 살아오는 길에 헛걸음 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 이었겠는가마는.
“밭두렁 되살리기 운동은 청정 해안면을 되살리는 첫걸음입니다 - 해안면 밭두렁 살리기 협의회-” 배너가 걸려있다. 옛날 농사지을 때 ‘논두렁 콩 심기’ 운동을 벌였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모내기가 끝난 다음, 논두렁에 콩을 심어 먹거리를 더 만들어 내자는 운동이었다. 알이 굵고 포근포근한 돔부콩을 많이 심었다. 가을철 추수무렵 햅쌀에 돔부가 드문드문 섞인 고봉 쌀밥이 앞에 놓이면 먹기도 전에 배가 불렀다. 그 구수한 밥 냄새라니...
퇴비를 만드느라 논두렁 풀을 베면서 콩을 베지 않으려고 애썼던 일이 생각난다. 나이 드신 시골 어르에게 농사 비결을 여쭈어보면, 십중팔구는 거름을 많이 넣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 옛날에 거름 장만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날 농사꾼은 오줌 한 방울도 허투로 누지 않았다. 용변이 마려우면 참았다가 자기집 뒷간에다 풀었다. 피보다 귀한 거름이기에, 그 한 덩이도 아까워했다. 거름이 없으면 나락이 쭉정이가 되어 “메추리도 쪼아댈 게 없어 울고간다”했다. 우리 마을에 개똥쇄라는 별명을 가진 어른이 계셨다. 새벽부터 망태를 매고 개똥이나 소똥을 주으러 다니던 분이였다. 정성을 다해 거름을 만들었다. 농군들은 그렇게 흙을 향해 다짐하며 씨 뿌릴 날을 기다렸다.
농토를 기름지게 하기 위해서 퇴비는 필요했다. 퇴비를 만드느라 모두들 애를 썼다. 나도 여름이면 새벽마다 풀을 한 망태 베어오거나, 길가 잔디를 삽으로 실어서 한 바작 지고 들어왔었다. 논두렁 밭두렁에 풀이 저렇게 수북한데 요즘은 퇴비를 사다 쓴다고 했다. 일손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풀을 베어다 마당 한 귀퉁이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합수를 섞어 퇴비를 만들었다. 숙성된 퇴비는 지게로 져다 논 밭에 뿌렸다. 화장실에 모인 대소변도 장군에 담아 논밭으로 내가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 똥장군을 지고 언덕을 오르다 미끄러지던 날, 그 날의 풍경이 떠오른다. 이제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내 산문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에 실린 이야기다.
" 비가 내렸다. 땅이 촉촉할 때 고추 모종을 옮겨 심고자 원예상에 들려 고추모 대 여섯 개를 사왔다.
집 뒤뜰 자그마한 텃밭에 모종을 옮겨 심으면서 내 어릴 적 고추밭을 일구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중학을 졸업한 후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처음 시작하던 해였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온 다음 날이였다. 고추밭에 씨를 뿌리려면 밭을 갈아엎고 흙을 고른 다음 분뇨를 주고 퇴비를 후북히 뿌려주는 게 일의 순서였다.
그때는 농로가 정비되지 않아 논밭에 거름을 나르고 수확한 작물을 집으로 들여올 때 지게가 중요한 운반 수단이었다. 농사경험이 없던 나는 지게질이 서툴렀다. 지게가 등에 달라붙지 않고 몸과 지게가 따로 놀았다. 퇴비는 바작에 적당한 분량으로 나누어 내 힘에 맞게 져 나를 수 있었지만 분뇨를 퍼 나르는 게 문제였다.
합수통을 이웃 당숙집에서 빌려왔다. 나무로 둥그렇게 만든 똥통을 빌려주면서, 당숙은 상머슴이 하는 일을 네가 할 수 있겠느냐며 가득 퍼 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그렇지 않으면 출렁거려 지게를 지고 걸어갈 수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난생 처음 합수통에 분뇨를 퍼 담아 지게에 실었는데 일어서기가 힘들만큼 무거웠다. 나는 아직 덜 여문 농사꾼이었다. 작대기로 버티며 간신히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똥장군 속의 오물이 출렁거릴 때마다 지게가 앞뒤로 흔들거렸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조심조심 한 발자욱씩 걸어 나가 논두렁을 건너 강두메 밭머리 가까이 왔다. 이제 나지막한 잔등 하나만 오르면 바로 고추밭이다.
쉼바탕에서 지게를 내려 잠깐 숨을 돌렸다. 다시 조심스럽게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황토언덕은 아직 물기를 머금어 미끄러웠다. 잔등을 반쯤 올라왔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중심이 흔들렸다. 합수통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대로 다리를 옮길 수가 없었다. 몇 발자욱을 더 옮기는 순간 쭉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중심을 잃고 지게가 기우뚱 하면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합수통은 굴러 떨어져 박살이 나고 오물은 언덕을 뒤덮고 흘러내렸다. 냄새가 온 벌판에 진동했다.
오물로 범벅이 된 몸을 들 샘에서 씻었다. 몸도 마음도 춥고 떨렸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데워준 물로 냄새나는 몸을 다시 닦아내면서 소리죽여 울었다. 친구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나는 똥통이나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다니. 서러웠다. 그길로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밤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산길을 혼자 걸었다. 보름달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산 아래 보리밭이 질펀하게 펼쳐있었고, 바람이 보리를 흔들며 지나가자 보리밭은 물결이 되어 출렁거렸다. 달빛 아래 일렁이는 보리밭은 초록빛 바다였다.
산을 내려와 밭고랑 따라 보리밭 사이를 거닐며 자세히 보니 '보리 모가지'가 두툼해져 있었다. 지난겨울 추위에 들뜬 흙을 꽁꽁 밟아주었는데 어느 새 여물채비를 하고 있다. 혹한을 이겨내며 묵묵히 세월을 견디더니 저렇게 의연하게 제 몫을 다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참자. 그리고 기다리자. 병중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교육자인 아버지를 따라 농사가 무언지도 모르며 살아온 어머니에게 이렇게도 힘든 농사일을 떠넘기고 혼자 떠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고추모를 옮겨 심는데 언제 왔는지 아들 녀석이 곁에 서 있다. 녀석이 아비의 속마음을 짐작이나 할런지 모르겠다. 아슴한 세월 저편의 일이지만, 그 날 달빛 아래 출렁이던 보리밭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다시 길을 재촉한다. 비가 거세진다. 비를 맞고 감자를 심고 있다. 농기구로 일정한 간격에 구멍을 만들면 감자를 떨구어 주는 작업이다. 처음 보는 농사 방법이다. 남쪽지방에는 집안에서 씨감자 싹을 틔워낸 다음, 그 싹을 잘라내어 호미로 땅을 파서 감자를 심었다. 중년 부부인데 남양주에서 이사와 살고 있다고 한다. 비닐하우스 네 동에 무 배추를 비롯 여러 가지를 고루고루 심어 가꾸고 있다. 그냥 살만하다고 편하게 웃는다.
횡단을 계획하면서 종착지인 강화도를 생각하다가 그곳에 산다는 함민복 시인이 떠올랐다. 강화도에 가면 그를 만나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시는 깊다. ‘가을’ 같은 시는 금방 외울 수 있다. “당신을 켜 놓은 채 /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시다.
아우에게 시인의 연락처를 알아달라고 전화를 했다. 주소와 이메일도 함께 부탁했다. 만나기 전에 인사 겸 내 산문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를 한 권 우송해 드리도록 했다.
“양구토종 흰꽃 민들레는 대한민국 대표 민들레입니다 -해안면 DMZ 토종민들레 작목반 일동” 이라는 배너가 걸려있다. “푸른 산은 생명의 숲, 산불나면 죽음의 숲” 이라는 해안면 의용소방대에서 내건 배너가 나란히 걸려있다.
돌산령 터널 입구에 이르렀다. 2008년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는 돌산령 험한 고갯길을 구불구불 돌아야 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빙 둘러 산이다.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펀치볼이라는 말이 다시 실감난다. 삼밭이 참 많다. 머잖아 이곳이 삼 주산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터널을 지났다. 2997미터다. 3킬로. 10리 가까운 긴 터널이다. 비가 그치질 않는다. 차가 지날 때마다 물장을 튕긴다. 비 맞은 안경을 자꾸 닦으며 걸어간다.
양구군 동면 파출소에 들어갔다. 순경 세 명이 근무 중이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의를 입고 들어온 나그네를 친절하게 맞아준다. 따끈한 커피를 대접해 준다. 몸이 좀 풀린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여관을 물어 보았더니 바로 앞 이층집이란다. 요즘 손님이 없어 영업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확인을 해 본다. 방부터 예약해 놓았다. 바로 길 건너편 빤히 보이는 곳이다. 아래층이 식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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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이 지역에 특별한 얘기꺼리가 없냐고 물었다. ‘산양증식센터’를 소개 해 준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직원이 전화를 받았는데 마침 퇴근 준비 중이었다며 차를 가지고 파출소까지 나오겠단다. 젊은 친구다. 안재용이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함께 올라갔다. “산양의 요람, 양구 산양증식 복원센터” 라는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있다. 꽤 깊은 산중이다. 비는 그치고 안개가 내리고 있다.
원래 이 근처 산이 높고 험해서 산양이 꽤 많이 서식했는데 6.25를 거치고 지역이 개발되면서 산양이 거의 멸종상태에 이르렀단다. 그래서 뜻 있는 분들이 힘을 모아 2002년에 산양을 증식하여 방사할 목적으로 이 산양증식복원센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양구군청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독립된 기관이 되었다.
지금도 민통선 안쪽과 월악산에 상당수의 산양이 서식하는 것으로 짐작되지만 숫자는 알 길이 없다. 현재 증식센터에서 기르고 있는 산양은 12마리다. 이 센터는 총 6만 평방미터 넓이며 다섯 명 직원이 관리하고 있다.
산양들이 멀리 보이는데 눈치만 살피고 있다. 사람을 많이 경계한다고 설명해준다. 사료를 주니 쭈빗쭈빗 모여든다. 사진 몇 장을 어렵게 찍었다.
안 선생이 참고하라며 산양과 관련된 자료와 책을 준다. 여관에 들어오니 벌써 많이 어두워졌다. 받은 책이 제법 묵직하다. 짊어지고 먼 길을 가기에는 부담스러운데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가 파출소를 떠 올렸다. 파출소에 가서 순경을 만나 주소와 송료를 주면서 우송을 부탁하니 선선히 받아준다. 파출소에서 이런 심부름을 맡아주다니, 옛날 같으면 어림없는 얘기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오늘도 긴 하루였다. 발에 물집이 또 잡혀 실을 꿰어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매일 너무 무리하고 있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2011년 10월 7일자 미주한국일보 기사 보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