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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63코스 역방향 제3부
부용교 남단-벌교역-보성여관-금융조합-채동선생가-벌교홍교-소화다리-부용교 북단
20220413
2부에서 이어짐
1.태백산맥길 그리고 채동선의 가곡 '고향'
벌교읍내로 들어간다. 부용교 남단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의 창시자인 홍암 나철을 기리는 홍암로를 따라 벌교역으로 나아갔다. 홍암로 양쪽에는 수산물판매점들이 즐비하였는데, 이 지역의 특산물 꼬막이 중심 상품인 것 같았다. 벌교역 앞에는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재건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데, 글자들이 지워져 있어 정비가 시급해 보였다. '조선수군재건로'는 정유재란 때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 무기, 군량, 병선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조선수군재건로'라 명명하여 역사스토리 테마길로 조성한 길이다. 그 길 안내도와 조선수군재건로 팔경이 소개되어 있는데, 글자가 지워지고 그림이 불분명한 안내도를 새롭게 바꾸어 이 길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분명히 각인시키는 게 좋을 듯하다.
벌교역 앞 역전삼거리에서 채동선로는 왼쪽으로 이어지고 남파랑길은 계성1길로 진행한다. 벌교 계성(鷄盛)1길은 역전삼거리에서 술도가와 보성여관이 있는 태백산맥길로 나아가는 골목길을 이르는데, 왜 계성1길이라 명명했는지 궁금하다. 길동무 송다래님과 함께 계성1길 역전식당으로 들어가 짱뚱어탕에 소주 각 1병을 비웠다. 취기가 적당히 올랐다.
술기운에 마음은 두둥실 떠오르지만 민족의 비극인 해방 후의 여순사건과 6.25전쟁을 다룬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를 걷는 마음은 착잡함이 교차했다. 정하섭의 본가인 술도가, 소설 속 남도여관인 옛 보성여관, 좌익의 인민재판이 열렸던 벌교초등학교, 벌교 금융조합, 염상구의 청년단 아지트가 들어있던 일본식 2층건물이 있었던 터까지 바삐 걸었다. 그 길에는 태백산맥 문학거리와 태백산맥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벌교는 조정래 작가와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벌교, 이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조정래 작가의 약력을 읽어 보면 그는 순천시 조계산 선암사의 대처승 조종현의 아드님으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생과 동행하는 아들의 고통 또한 만만치 않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논산에서 벌교로 전학을 오게 되면서, 그는 이 지역의 구체적 삶의 현장을 체험하는데, 이 체험이 대한민국 해방 이후의 역사를 소설화한 명작 '태백산맥'으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태백산맥'은 우리의 역사 인식과 삶의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 문학 작품이다. 그 문학 작품의 무대인 벌교는 그의 공적을 기려 '태백산맥문학공원'을 조성하고 그의 상반신 부조까지 설치하였다. 한 작가의 영향력이 한 지역 전체를 이렇게 좌우한다. 셰익스피어와 헤밍웨이 등 외국의 유명 작가의 사례만 보아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염상구의 청년단 자리터에서 부용산 체육공원으로 오르며 '태백산맥'에서 벗어나 박기동의 부용산 노래를 떠올린다. 그리고 노래를 웅얼거리며 비감에 젖었다. 세상에 태어나 꽃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요절한 인생에 가슴이 쓰리다. 그녀의 삶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부용산' 悲歌가 왜 빨치산 노래가 되었을까? 아무리 불러보고 들어보아도 빨치산 노래일 이유가 없다. 다만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에 반항하여 새 시대를 열고자 열망한 빨치산 사람들의 패배한 모습이 노래의 행간으로 들릴 수는 있을 것 같다.
벌교를 진정으로 빛낸 음악가는 채동선이다. 그가 1930년대에 정지용 시에 붙인 가곡들은 대한민국 음악사에 우뚝 서 있다. 그의 가곡 '고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지용이 월북하였다고 하여 한 동안 '고향'이 금지곡이 되자, 박화목의 시 '망향'과 이은상의 시 '그리워'에 채동선의 '고향' 곡을 붙여 노래하였지만 채동선의 '고향' 가곡은 정지용의 시 '고향'으로 불러야 최고의 가곡이 된다.
채동선생가를 거쳐 벌교의 문화재 '벌교홍교'를 건넌다. 홍교는 벌교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존하는 아치형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워 1963년에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영조 때 순천 선암사의 승려인 초안(楚安)과 습성(習性) 두 선사가 6년 동안 지금의 홍교를 건립했으며, 이 다리를 이곳 사람들은 '횡갯다리'라 부른다고 한다. 홍교 입구에는 '보물 제304호 벌교 홍교 제7주갑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7주갑이라면 420년, 홍교 건립 420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벌교홍교를 건너 벌교천 북쪽 방죽길을 따라 내려간다. 태백산맥 꼬막거리의 조형물 '벌교 꼬막의 울림'을 지나친다. 이 작품은벌교의 청정한 자연에서 자라난 남도의 대표 음식인 벌교 참꼬막을 모티브로 조형화하였다. 밝은 미래를 향해 뻗어나가는 보성군의 힘찬 기상을 담아 벌교 '태백산맥 꼬막거리'의 풍성한 미래를 기원하는 내용을 표현했다고 한다.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벌교 꼬막 삶는 방법과 미각의 묘사는 탁월하다. 벌교천 길에는 문학의 고장 보성 벌교, 꼬막,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다시금 '태백산맥'의 길을 걷고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벌교천의 미리내다리를 가로지른다. 미리내다리에는 벌교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듯 '나, 벌교 살아요' 문장이 새겨진 글판이 붙어 있다.
태백산맥 대사 조형물이 붉은 색으로 눈길을 끈다. "남의 땅에 왜 맘대로 들어와, 당해 싸지!",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이 대사들이 가슴을 찌른다. 난간에 태백산맥 대사들이 적힌 표지판이 붙어 있는 '태백산맥 모형물'이 벌교천 전망뎈에 설치되어 있다. 이 모형물은 소설 '태백산맥' 책표지의 그림을 모형으로 만들었다. 이 모형 작품은 낮보다는 야간에 빛을 발해야 멋질 것 같다. '태백산맥 모형물' 전망뎈에서 내려와 조금 걸어가면 벌교를 빛낸 인물 5인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 인물들은 '부용산'의 시인 박기동, 브리태니커 사장을 역임했으며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을 창간토록 한 한창기, 소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민족음악가 채동선,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창시자 홍암 나철 등 5인이다. 한창기 선생이 벌교 출신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를 걸으면서 무엇을 느꼈는가? 조정래 작가의 문학관이 벌교 갯벌에 굳게 뿌리 박혀 넓게 퍼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기여해야 한다."는 조정래 작가의 문학관, 가슴에 강렬하게 솟아오르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문학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기여해야 한다.
2.걸은 과정
뒤돌아서서 벌교역 방향으로 홍암로를 따라 진행. 홍암로는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창시자 홍암 나철을 기리는 도로이다.
홍암로 양쪽으로 수산물판매점들이 즐비하다.
부용교 앞에서 걸어온 홍암로 양쪽으로 수산물판매점들이 즐비하다.
앞에 보이는 도로표지판 앞이 역전삼거리이며 왼쪽에 벌교역이 있다.
1930년대 경전선이 개통될 때 건립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 무기, 군량, 병선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조선수군재건로' 명명하여 역사스토리 테마길로 조성한 안내도와 조선수군재건로 팔경이 소개되어 있다.
벌교역은 1597년 8월 9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병참물자 확보를 위해 낙안읍성을 거쳐 보성으로 향하던 공간 거점으로 들렀던 곳이 오늘날 벌교역이다. 벌교 장양리 선소와 부용산성은 이순신이 병참물자 회수를 위해 수색전을 전개하였던 곳이다.
'태백산맥' 작품의 주요 배경지를 탐방하는 안내도가 잘 소개되어 있다.
역전삼거리 계성1길 입구에서 벌교역을 뒤돌아보았다. 앞길은 음악가 채동선을 기리는 채동선로이다.
보성여관 표지판을 따라 계성1길을 따라간다.
계성1길은 역전삼거리에서 보성여관 입구까지의 이 골목길을 이른다. 역전식당에서 짱퉁어탕에 소주 한 병을 마셨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가 방문하여 여사장님과 함께 찍은 사진, 또 여사장님과 조영남 가수의 사진도 보인다.
계성1길 입구 뒤쪽에 벌교역이 보인다.
소설 '태백산맥'의 인물 소화와 하섭이 나눈 밥상이라고 광고하고 있다.
소설 '태백산맥' 속 소화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소화와 하섭의 운명적 사랑의 애틋함이 가슴 아프게 그려져 있다.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의 정하섭의 본가인 막걸리 양조장, 복원공사 중이다.
정현동과 정하섭의 이념 갈등은 부자 세대 갈등의 전형을 보여준다.
복원 공사를 빠르게 끝내겠다는 안내문과 소설 본문 내용이 적혀 있다.
2004년 역사 및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 받아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1935년에 건립된 보성여관은 한옥과 일식이 혼합된 일본식 가옥으로 근대 건축사적 가치와 생활사적 가치가 높다.
구 보성여관은 현재 1층에 카페, 소극장, 자료실, 전시실, 그리고 숙박동이 있다. 카페에는 옛 보성여관 여러 사진들과 벌교와 관련된 작품들이 걸려 있다.
채동선은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인 음악가이다. 정지용이 월북했다고 하여 가곡 '고향'이 금지곡이 되자 박화목이 채동선 곡에 '망향' 가사를 붙여 '망향'으로 불렸다.
채동선의 가곡 '고향'에 이은상이 '그리워' 가사를 붙였다. 박기동은 어린 제자가 요절하자 추모시 '부용산'을 지었다.
여러 사진이 카페에 붙어 있다.
소설 '태백산맥' 속 보성여관 이야기가 적혀 있다.
현재 구 보성여관은 1층 한옥숙박동, 2층 다다미방 숙박동으로 운영 중. 댓돌 위에 흰고무신과 검정고무신이 예쁘다.
일본식 다다미방이라고 한다.
1935년에 지어진 일본식 여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보성여관은 소설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빨치산 토벌대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한동안 숙소로 사용하던 남도여관으로 그려졌다.
1917년에 개교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 인민재판을 열었다고 한다.
옆에 벌교초등학교가 있다.
'태백산맥' 속 인물이야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무당 월녀와 정하섭의 할아버지 정참봉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월녀로부터 대물림굿을 받은 세습 무당 소화와 정하섭과의 아픈 사랑이야기를 통해 삶의 무엇을 새겨야 할까?
작가 조정래와 소설 속 인물 6명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벌교금융조합은 일본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반영된 근대 건축물로, 2005년 12월 9일 등록문화재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1918년 ‘벌교금융조합’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26년 ‘농촌지도소 벌교지소’, 벌교지역 ‘농민상담소’ 등으로 활용되었다. 현재 내부는 벌교금융조합의 역사와 한국 화폐사에 대한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온 이력을 지닌 것을 통해 작가는 친일파가 척결되지 못한 이 땅의 비극이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기득권을 행사했음을 일깨우고 있다.
이 땅을 지켜온 할아버지와 할머니 조각상 모습이 담담하다.
"벌교읍 벌교리 계두(鷄頭)마을은 한일합방이전에는 바다로서 소형 꼬막배가 드나드는 지역이었으나 1930년경에 바다를 매립하고 김해 김(金海金)씨 등 많은 성씨들이 장차 교통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모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존제산(尊帝山)의 주봉이 동남쪽으로 힘차게 뻗어 내려 마을 뒤에서 머무른 형국이 마치 닭머리와 비슷하여 닭머리로 불리어 오다가 현재는 닭머리의 한자음을 빌어 계두(鷄頭)라 했다 한다."(보성군청)
벌교읍 벌교리 계두마을에 태백산맥 문학공원이 2014년 6월에 조성되었다.
소설 탈고 후의 조정래 작가의 모습. 역상조각 기법으로 스테인리스 스틸 주조로 만들어 작가의 고뇌하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느껴지도록 표현했다고 한다.
태백산맥 문학공원 기념조형물은 서울대학교 이용덕 교수의 작품으로 음각에 입체감을 살리는 역상조각기법을 이용해 가로 23m, 높이 3m 크기의 원호 형태로 제작되어 2014년 6월에 제막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왼편에 작가의 소설 탈고 후 모습, 오른편에는 알루미늄 소재를 이용해 소설 '태백산맥'의 줄거리 내용을 적은 설명안내판이 붙어 있다.
추천코스를 따라가면 될 듯. 남파랑길 탐방에서는 문학기행 코스탐방이 어렵고 개별적으로 이곳을 탐방해야 할 것 같다.
오른쪽 산허리에 벌교중학교가 보인다.
이곳에 일본식 2층 건물이 있었는데 1995년 무렵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 건물 2층에 '태백산맥' 소설의 인물 염상구의 청년단 아지트가 있었다고 한다.
벌교를 대표하는 뻘배와 꼬막, 짱뚱어 그리고 놀이 사진이 게시되고 있다.
부용산 정상까지 가보고 싶지만 제한 시간 때문에 다음으로 미룬다.
행정복지센터 뒤의 건물은 채동선 음악당이다.
벌교천 너머 왼쪽 산허리에 벌교중학교가 있다.
오른쪽 아래 계두상회 오른쪽에 태백산맥 문학공원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태백산맥길을 따라왔다.
뎈 계단을 올라오면 벌교읍 체육공원, 공원에 월곡영화골 안내소가 세워져 있다.
조국수호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한 지역 출신 호국영령 및 전몰 군경들의 명복을 비는 탑으로 현재 충혼탑에는 370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태백산맥에서는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이곳에 종합지휘본부를 차리고 이 위쪽의 고지를 M1고지라 부른 곳이 있다. 벌교 주민들은 에망(M1)고지라 부른다고 하는데, 현재 그곳에 부용정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왼쪽 아래에 채동선 음악가 생가, 중앙에 벌교천의 홍교가 보인다.
"벌교읍 벌교리 세망(世望)마을이 형성된 정확한 연대는 기록된 문헌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삼국시대로 추정되며 1700년경에 밀양 박(密陽朴)씨, 평강 채(平康蔡)씨 등이 집단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부용산성은 1391년경에 낙안 출신인 고성 김(固城金)씨 김윤길 장군이 마을의 뒤에 있는 부용산(芙蓉山)에 성(城)을 쌓았다는 설과 1600년경에 낙안군수인 임경업 장군(林慶業將軍)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성(城)이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여자만(汝自灣)을 침입하는 왜적을 경계하며 지키게 하고 임경업 장군께서는 낙안성에 머물면서 수시로 이곳의 산성(山城)에 신호로 화살을 보내곤 하였으나 화살이 당도하지 않았다는 전갈을 여러 차례 들은 장군은 화살 끝에 불꽃을 붙이고 화살을 날린 뒤에 확인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다가 주민에게 불꽃화살이 하늘을 날아간 것을 묻고 주민들은 화살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자 장군께서는 산성으로 친히 와서 화살이 당도하였는지 유무(有無)를 확인하였다 하며 세상이 다 바라보는 화살을 너희들만이 보지 못하고 당도하지 않았다 하니 아랫마을 주민들에게 확인하라고 분부를 내리시고 이곳을 화살이 보인다 하여 시망골(矢望洞) 또는 세망골(世望洞)이라 했다 한다."(보성군청)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볼 수 없다.
"바이올리니스트요, 작곡가요, 음악사상가로서 민족정신을 실천한 음악가 채동선(1901~1953)은 1901년 벌교읍 세망리에서 출생했다. 당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채동선은 제일교보(현 경기고)에 유학하면서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 것이 음악에 빠지게 된 계기이다.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퇴학을 당하고 도일해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려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 하여 독일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하고 1929년 귀국해 바이올린 독주회와 실내악 운동을 펴면서 연희전문에서 바이올린을 교수한다. 그는 강의 외에는 창작과 바이올린에 열중하면서 한복에 두루마기, 고무신을 신고 낮에는 농사꾼으로 밤에는 국악채보에 전념하는 등 민족음악 수립의 기초를 쌓았다. 주위의 친일 권유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한 채 은둔하다가 광복이 되자 고려음악회를 창설해 관현악, 합창, 취주악 활동도 활발히 한 그는 부산 피난 생활 중 얻은 신병으로 1953년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불멸의 노래, 부활의 가곡인 「고향」, 「향수」, 「압천」등은 우리 가슴 속에 아름답게 새겨져 애창된다. 특히 그의 가곡은 6·25때 납북된 천재시인 정지용의 시에 붙여져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뒤늦게나마 정부가 1995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함으로써 우리고장을 빛낸 쾌거가 되었다. 벌교 공원에는 정지용 시에 곡을 붙인 대표작 「고향」이 친필 악보대로 새겨지고 작품목록이 수록된 기념비가 서 있다."(보성군청)
부용산 오리길에 그늘이 지네/ 사람은 가도 노래가 있어/ 좀체 사라지지 않는 땅의 역사를 그대 아는가
벌교천 따라 오르는 밀물이 담아 온/ 좀체 사라지지 않는 바다의 역사를 그대 믿는가
들몰 들녘으로 저녁 먹으러 가는 기러기/ 우리도 바짓가랑이 흙을 털고/ 매운 솔가지 피워 밥 짓는 어머니 만나러 가자
제석산 부엉이 울음에 두렵던 옛 밤이 깊어지고/ 낮은 지붕 밑 작은 등불 아래
검붉은 얼굴 맞대 먼 이야기 피워 내면/ 사윈 밤이 새벽을 걷는 소리 그대 듣는가
"벌교읍 벌교리 홍교(虹橋)마을은 척등(尺登), 서편(西便), 곡동(谷洞)의 3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조 숙종이전까지는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마을의 정확한 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50년경부터 주민이 하나, 둘씩 거주하였다 하며, 지명은 마을앞을 흐르고 있는 벌교천(筏橋川)이 적은 비만 와도 범람하고 여자만(汝自灣)으로부터 조수(潮水)가 밀려 만조시에는 바다로 변하여 건너 다닐 수 없게 되자 숙종44년(1705)에 선암사(仙岩寺)의 초안선사(楚安禪師)에 의해 뗏목다리를 없애고 석교(石橋)로 건립되었다. 다리의 모양이 무지개와 같다 하여 홍교(虹橋)라 하였으며 다리 부근에 있는 마을을 홍교동(虹橋洞)이라 했다고 한다."(보성군청)
왼쪽 산줄기는 부용산 능선이지만, 오른쪽 철탑 있는 산봉은 부용산 줄기가 아니라고 한다.
왼쪽 3칸의 무지개 모양의 다리가 홍교이고, 홍교 오른쪽에 다리를 새로이 덧붙여 이었다.
"보물 제304호. 길이 27.6m, 너비 4.5m. 마을에 있는 교비에 의하면 원래 뗏목을 엮어 다리(벌교)를 놓으면서 마을 이름이 벌교가 되었다고 한다. 벌교가 대홍수로 유실된 후 1729년(영조 5) 선암사의 초안과 습성 두 스님이 돌다리 즉 홍교를 놓았는데, 1737년과 1778년(정조 2) 등 몇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고 한다.
본래 길이 80m, 너비 3m 정도의 규모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부 잘라내어 현재는 3칸의 홍예만 남아 있다. 홍예는 장대석처럼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 쌓았는데 홍예의 종석만이 돌출되어 있으며 3개의 홍예 천장 한복판에 정교하게 조각된 용두석이 돌출되어 수면을 향해 내려다보고 있다. 홍예 위로 판석을 깔아 만든 다리는 강의 중간에서 중단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현재 콘크리트 다리와 연결해 주민들이 통행하고 있다."(다음백과)
홍교는 벌교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존하는 아치형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워 1963년에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영조 때 순천 선암사의 승려인 초안(楚安)과 습성(習性) 두 선사가 6년 동안 지금의 홍교를 건립했다. 이곳 사람들은 '횡갯다리'라 부르며 소설 '태백산백'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명물로 인정받고 있다.
발교천 북쪽 방죽을 따라 내려간다.
'벌교 꼬막의 울림'은 벌교의 청정한 자연에서 자라난 남도의 대표 음식인 벌교 참꼬막을 모티브로 조형화한 작품이다. 정면에서 보이는 부채꼴 모양의 방사륵(조개의 껍데기 겉면에 있는 부챗살처럼 도드라진 줄기)을 통해 미래로 뻗어나가는 보성의 비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방사륵을 잇는 메시(mesh) 구조는 작품 전체에 균형감과 개방감을 주며 리듬감 있는 곡선의 형태는 감상하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준다. 밝은 미래를 향해 뻗어나가는 보성군의 힘찬 기상을 담은 본 작품은 벌교 태백산맥 꼬막거리의 풍성한 미래를 기원하는 작품이다.
1931년 6월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써 원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소화다리'라고 부른다. 이 다리는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서 6.25의 대격랑이 요동치면서 남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양쪽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이루어졌다.
흘러가는 구름도 스쳐가는 바람도/ 차마 볼 수 없었으리라/ 이유 없이 도륙 당한/ 몸서리친 죽음 앞에
하늘도 땅도 통곡해 버린 그 날/ 난간 없는 다리에서/ 뻥-뚫린 가슴으로 토해낸/ 네 애비들의 단말마도/ 듣지 못했으리라
구천을 떠돈 혼령들/ 아직도 씻김 받지 못한 채/ 허공에 머물러 있으니/ 망자의 빈 가슴 채울 길 없고
풍상에 깍인 몸 그때 그대로인데/ 너는 모르는 척 발 아래 모래톱에/ 시커먼 심장 묻어 놓고/ 숨죽여 우는거냐
이따금씩 이름 모를 물새들이/ 네 곁을 서성이니/ 비명에 간 네 애비들이/ 돌아온 듯하구나.
'나, 벌교 살아요', 벌교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듯
소설 '태백산맥' 책표지의 그림을 모형화했다. 야간에 불빛이 밝혀지면 멋진 조형물이 될 듯.
'태백산맥' 모형물 난간에 태백산맥 대사들이 적힌 표지판이 붙어 있다.
벌교를 빛낸 인물 5인을 소개하고 있다. '부용산'의 시인 박기동, 브리태니커 사장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을 창간토록 한 한창기, 소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민족음악가 채동선,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창시자 홍암 나철.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사장을 역임했고, 월간 문화종합잡지 〈뿌리깊은나무〉, 월간 여성문화잡지〈샘이깊은물〉를 발행·편집했다. 1976년 창간된 〈뿌리깊은나무〉는 한글전용, 가로쓰기, 일관된 문화적 시각 등 새로운 시도로 잡지계의 혁신을 일으켰으나, 1980년 8월 신군부 세력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한창기는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엔사이클로피디어브리태니커사에서 발간한 영문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한국에 보급해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1968년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0년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뿌리깊은나무〉가 폐간된 뒤 출판활동에 진력해 〈한국의 발견〉, 〈뿌리깊은나무 민중 자서전〉 등을 출간했으며, 전통음악의 맥을 계승하고자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다섯 마당〉, 〈브리태니커 팔도소리 전집〉등을 만들어 선보였다. 생전의 글을 모아 사후에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배움나무의 생각>을 펴냈다.(다음백과)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 관향은 나주.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를 거쳐 33세 때 징세서장의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곧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후 민족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중창한 대종교에는 다른 민족종교와는 달리 식자층들이 많이 끼어 있었고, 또 민족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국조를 신앙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04년 오기호(吳基鎬, 1865~1916)·이기(李沂, 1814~1909) 등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과 유신회를 조직했다. 그후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세우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간 그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청·일 3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서 부조하자"는 내용을 일본 정계에 전달하고, 3일간 금식농성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조약체결에 협조한 매국노를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한편 그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을 때 서울역 근처에서 백전이라는 노인으로부터 후에 대종교의 경전이 된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紀〉를 전해 받은 바 있었고, 1908년 도쿄[東京]의 한 여관에서 두일백이라는 노인을 만나 대종교의 중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단군교포명서를 받았다. 그해 12월 도쿄의 어느 여관에서 이기호·정훈모 등과 함께 두일백으로부터 영계를 받았다. 정치적 구국운동에 대한 좌절로 민족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돌린 나철은 마침내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이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이라고 한다.
당시 그와 함께 활약하던 인물들은 유신회 인물들이거나 호남 출신의 식자층 우국지사들이었다. 그래서 서민층 중심인 동학이나 증산교에 비하여 대종교를 양반종교라고도 한다. 교주인 도사교에 추대된 그는 밀계와 오대종지를 발표하여 교리를 정비하고 교단조직을 개편함으로써 교세확장에 주력하던 중, 당시 서울 북부지사교를 맡고 있던 정훈모의 친일행위로 교단 내 내분과 예상되는 일제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1910년 8월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그 뒤 일제의 종교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국외교포로 교단을 유지하고자 만주 북간도 삼도구에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에도 힘을 기울여 1911년에 〈신리대전〉을 간행했다. 1914년에는 교단본부를 백두산 북쪽에 있는 청파호 부근으로 이전하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확장에 주력하여 30만 교인을 확보했으나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교단 존폐위기에 봉착하게 된 그는 1916년 8월 15일 구월산의 삼성단에서 일제에 대한 항의표시로 49세의 나이로 순교조천하였다.(다음백과)
위쪽 부용교 입구 전봇대에 남파랑길 63코스 시작점 표지물이 붙어 있다.
뒤쪽에 부용산이 곡선으로 두 봉우리로 이어져 있고, 벌교천이 흐른다. 아래쪽에 남파랑길 63코스 안내도가 보인다.
왼쪽 건물에 부용산 허리가 가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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