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 찾으면 부처를 잃고 보살 찾으면 보살을 잃는다 / 종광 스님
스스로도 믿지 못하며
옛 사람 말만 따르려는
어리석음 경책한 임제
“문자에서 구하지 말라”
깨달음 구하려는 집착은
일없이 쉬는 것만도 못해
大丈夫漢이 不作丈夫氣息하야 自家屋裏物을 不肯信하고 祇麽向外覓하야
上他古人閒名句하야 倚陰博陽하야 不能特達이라 逢境便緣하며
逢塵便執하야 觸處惑起하야 自無准定이로다 道流야 莫取山僧說處하라
何故오 說無憑據하야 一期間圖畫虛空이요 如彩畫像等喩니라
해석) “사나이 대장부가 장부로서의 호기를 부리지 못하여
자기 집안에 있는 보배를 긍정하며 믿으려고 하지 않고
바깥으로 찾아다니면서 옛 사람들이 만든 부질없는 이름이나 문구에 휘둘려서
음에 의지하고 양에 매달려서 홀로 깨닫지 못한다.
경계를 만나면 거기에 얽매이고 어떤 물건을 만나면 거기에 집착한다.
접촉하는 곳마다 미혹을 일으켜 스스로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도 못한다.
여러분! 산승이 말하는 것을 취하지 말라. 어떤 이유에서인가?
내가 한 말도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다. 잠시 허공에 그림을 그린 것일 뿐이다.
마치 허공의 그림에 색칠을 해 보여주는 것과 같다.
강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불안감 때문에 밤을 세며 공부를 하다
정작 시험시간에 졸음을 참지 못해 시험을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이렇게 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확실하게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믿지 못합니다.
오히려 밖으로 돌며
부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듣거나 지니거나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불상에 예배를 하고 경전을 읽고 참선을 하는 것으로
깨달음에 한발씩 다가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다보니 불교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중요합니다. 하나라도 빠뜨리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림자만 봐도 집착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머리가 붙어 있는데도 항상 불안에 떨며 머리를 찾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임제 스님은 당당해지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부처임을 의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비유하자면 주머니에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밖으로 찾아 헤매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경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임제 스님의 가르침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님 말 또한 방편, 즉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안내문에 불과합니다.
채화상등유(彩像等喩)는 ‘능가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형태가 없지만 중생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방편으로
아름답게 그림을 그려 설명했다는 뜻입니다.
사과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종이에 사과를 그려 설명해도
그림 속 사과는 진짜 사과가 아닌 까닭에 향기가 없으며 먹을 수도 없습니다.
道流야 莫將佛爲究竟하라 我見猶如厠孔이요 菩薩羅漢은 盡是枷鎖며
縛人底物이니 所以로 文殊仗劍하야 殺於瞿曇하며 鴦掘은 持刀하야 害於釋氏니라
해석) “여러분! 부처를 마지막 궁극적인 경지로 삼아서는 안 된다.
나는 부처를 화장실의 구멍으로 본다.
보살 나한도 모두 목에 씌우는 칼과 발을 묶는 족쇄와 같은 것으로
사람을 속박하는 물건들이다.
그래서 문수보살은 칼을 쥐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죽이려 했고,
앙굴리마라는 칼을 들고 부처님을 해치려 한 것이다.”
강의) 임제 스님은 부처를 궁극적인 경지로 삼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만약 부처가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면 나의 밖에 내가 이뤄야 대상이 생기게 됩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부처는 나를 떠나 있지 않습니다. 부처는 내가 닮고 싶은 연예인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가 이미 부처입니다. 다만 모를 뿐입니다.
내가 부처임을 알고 체득하면 되는데 따로 부처를 만들어 목표로 삼게 되면
부처는 객관화되고 결국 밖에서 찾아야 할 어떤 것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영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보살과 나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수보살과 앙굴리마라가 부처님을 죽이려했다는 것은
실제로 부처님을 죽이려 했다는 말이 아니라 부처님에게 집착하는 마음,
또는 관념이 만들어 낸 부처님을 부수려했다는 말입니다.
道流야 無佛可得이니 乃至三乘五性과 圓頓敎迹은 皆是一期藥病相治요
並無實法이니라 設有라도 皆是相似表顯이요 路布文字니 差排하야 且如是說이니라
해석) “여러분! 부처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삼승과 오성과 원돈교의 흔적들도 모두 그때그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한 약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로 있는 법이 아니다.
혹시 무엇이 있다하더라도 모양만 유사할 뿐 실제가 아닌 광고이며
문자를 나열해 놓은 것으로 잠시 이해를 돕기 위해 설한 것일 뿐이다.”
강의) 임제 스님께서는 누누이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마음의 청정한 빛이 바로 부처(佛)이고 마음의 광명이 바로 법(法)이고
청정한 빛을 발하는 것을 도(道)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부처는 내 안에, 마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부처란 밖에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삼승이니 오성이니, 원돈의 위대한 가르침 모두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병에 따라 주는 약방문에 불과합니다.
그 속에 무엇이 있다하더라도 비슷하기만 할 뿐입니다.
콜라 광고는 콜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콜라는 아닙니다. 광고 속 콜라는 마실 수 없습니다.
경전이나 옛 조사들의 어록이 이렇습니다.
임제 스님의 가르침 또한 콜라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콜라에 가깝게 만든 광고일 뿐입니다.
아무리 비슷해도 결코 마실 수도 갈증을 달랠 수도 없습니다.
道流야 有一般禿子하야 便向裏許著功하야 擬求出世之法하니
錯了也라 若人이 求佛하면 是人은 失佛이요 若人이 求道하면
是人은 失道요 若人이 求祖하면 是人은 失祖니라
해석) “여러분! 어떤 모자란 스님들이 이런 것들을 향해 공력을 들여 출세간의 법을 구하려 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잃을 것이고,
도를 구한다면 도를 잃을 것이며 조사를 구한다면 조사를 잃을 것이다.”
강의) 많은 수행자들이 경전의 숲속에서,
조사의 어록 속에서 깨달음을 얻겠다고 남다른 공력(功力)을 들입니다.
임제 스님은 이런 것들이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서울에 있으면서 서울을 찾아 엉뚱하게 광주로 부산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서울에 있었는데 괜한 노력 때문에 오히려 서울에서 멀어지게 됐습니다.
부처를 구하려고 하면 부처를 잃게 된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원래가 부처인데 부처를 구하려는 망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大德아 莫錯하라 我且不取儞解經論하며 我亦不取儞國王大臣하며
我亦不取儞辯似懸河하며 我亦不取儞聰明智慧하고 唯要儞眞正見解니라
道流야 設解得百本經論하여도 不如一箇無事低阿師니 儞解得하면
卽輕懱他人하야 勝負修羅와 人我無明이 長地獄業이니라
如善星比丘가 解十二分敎호되 生身陷地獄하야 大地도 不容하니
不如無事休歇去니라 飢來喫飯이요 睡來合眼이라
愚人은 笑我호대 智乃知焉이로다 道流야 莫向文字中求니
心動疲勞하고 吸冷氣無益하니 不如一念緣起無生하야 超出三乘權學菩薩이니라
해석) “대덕 스님들이여! 착각하지 말라.
나는 그대들이 경과 논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국왕이나 대신이라고 해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그대들이 물 흐르듯 유창한 말솜씨를 가졌더라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총명하고 지혜롭다하더라도 취하지 않는다.
오직 그대들이 진정한 견해를 갖기를 바랄 뿐이다.
여러분! 설사 백권의 경과 논을 이해한다하더라도 한낱 일없는 스님만 같지 못하다.
그대들이 그런 것들을 좀 알면 곧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게 된다.
남과 다투는 아수라가 되고 나와 남을 분별하는 무명의 번뇌로 지옥의 업을 기르게 된다.
예컨대 선성 비구가 십이분교를 통달했지만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그러나 대지도 용납하지 않았으니 차라리 아무 일 없이 쉬는 것만 같지 못하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눈을 감으면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보고 비웃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 것이다.
여러분! 문자 속으로 향하여 구하지 말라.
마음이 움직이면 피곤하고 찬 공기를 마셔서 이익이 없다.
차라리 한 생각이 인연으로 일어난 것이며
본래 생멸이 없음을 알아 삼승의 방편학설을 배우는 보살을 뛰어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강의) 온갖 경을 찾아 읽고 알음알이를 내느니, 차라리 한낱 일없는 스님이 더욱 훌륭합니다.
일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번뇌와 망념 같은 잡념이 전혀 없는 투명하고 청명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임제 스님은 무엇인가를 좀 알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경멸하고 다투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와 남을 분별하는 무명의 번뇌에 사로잡혀 결국 지옥으로 가는 업을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성비구는 모든 경전을 두루 통달했다는 교만심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죄가 너무 커서 지옥을 품고 있는 대지까지도 그 몸을 받기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경전에 대해 왜 이렇게까지 혹독하게 비판을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임제 스님의 말씀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말씀일 것입니다.
경전만 파고드는 스님들이 너무 많아 이를 경책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있는 곳이 서울인지 몰랐다하더라도 서울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몰라도 가만히 있으면 서울입니다.
그런데 서울을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서울에서 어디를 향해 출발하더라도 결국은 서울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서울과는 더욱 더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임제 스님께서는 이 점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노력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일 없이 쉬는 것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한 생각 또한 인연으로 일어난 것이고 본래 생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방편으로 된 무수한 학설을 배우고 익히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2013. 04. 11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