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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동 희 (1890~1927)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의 아들이다.
1919년 삼일운동에 참여한 뒤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2년 7월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해외민족독립단체의 통합을 꾀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부위원장을 맡았고,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단체의 통합에 노력했다.
1926년 4월 중국 길림성에서 양기탁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만주 정의부와 국내의 천도교혁신파와 형평사가 연합하여 결성한 것으로서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하면서 이를 지원하는 국제연대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 결성 직후 상해로 건너가 김규식의 집에 거처하던 중, 위장병이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했다.
그 해 12월 고려혁명당 간부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이 악화되어 다음해 1월 38세로 요절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할 자료
1) http://search.i815.or.kr/ImageViewer/ImageViewer.jsp?tid=co&id=5-002026-000
고려혁명당사건연구(천도교, 형평사, 정의부) 고등법원검사국(日書)
2) 고려혁명당 강령 등 자료
http://search.i815.or.kr/ImageViewer/ImageViewer.jsp?tid=co&id=1-L000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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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제62회 연구발표회 /1998년12월5일
천도교와 코민테른
- 최동희의 활동을 중심으로 - 이준식 (연세대)
목차
1.머리말 - 민족해방운동과 천도교
2.천도교와 최동희
3.최동희의 민족혁명운동
1)1919년 여름까지 - 다양한 민족혁명운동의 모색
2)1919년 여름부터 1922년 말까지 - 민족혁명운동을 위한 국내 기반 다지기
3)1922년 말부터 1927년 1월까지 - 코민테른과의 연대를 통한 민족혁명운동의 추구
4.맺음말
1. 머리말 - 민족해방운동과 천도교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초의 민족해방운동은 내부의 분화를 배태하는 동시에 분화된 운동의 상호결합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통일전선운동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이 글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을 외적 조건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조건의 변화를 주체적으로 활용해 나가려고 한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통일전선운동의 경우 공산주의운동을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곧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공산주의운동 세력이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제창하면 여기에 민족주의운동 가운데 비타협적 세력이 호응해 통일전선운동이 벌어지는 것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통일전선운동은 코민테른이나 공산주의운동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고 한 민족주의운동 진영에서 통일전선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한 경우도 있었다.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천도교가 그러했다.
천도교는 민족해방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특히 통일전선운동을 둘러싼 논의에서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는 존재였다. 이 문제에 대해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신파’와 ‘구파’ 사이의 분열에 초점을 맞추어 천도교를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천도교 연구1)가 본격화되면서 천도교 안에서의 분열이 ‘신파’와 ‘구파’ 사이에서 한 차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1920년대 초에 혁신계열인 천도교연합회의 분리로도 나타난 바 있었음이 밝혀졌다.2) 그런 가운데서도 ‘신파’와 자치운동을 연결시켜 1923년 이후 ‘신파’=타협적 민족주의, ‘구파’=비타협적 민족주의로 구분하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이 구도로는 분열이 굳어졌다고 하는 1920년대 중반에도 최린 계열을 제외하고는 천도교의 모든 세력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 코민테른과의 연대 또는 공산주의운동과의 통일전선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구파’가 1926년 초부터 조선공산당과 함께 국민당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으며, 1927년 2월의 신간회 결성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신파’도 비슷한 시기에 공산주의운동이나 코민테른과 연대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레닌이 죽은 1924년 1월을 전후한 시기에 ‘신파’의 인물들이 포진해 있던 「개벽」에 자치운동과 문화운동을 부정적으로 보고 오히려 국내 공산주의운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글과 코민테른과 소비에트러시아의 앞날을 낙관적으로 보는 글이 집중적으로 실렸으며, 1925년 10월 ‘신파’의 외곽단체로 알려진 조선농민사의 결성에는 일부 공산주의 활동가가 참여했다.
더욱이 조선농민사는 1926년 초 코민테른의 외곽단체인 크레스틴테른과 비밀교섭을 가진 끝에 지부 자격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코민테른과의 연대에 가장 일찍부터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임한 것은 천도교내 혁신세력이었다.
이 글의 의도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전면적인 해명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천도교 혁신세력의 지도자였으며, 천도교 안에서 민족혁명을 위한 통일전선체의 결성 및 코민테른과의 연대를 처음으로 제창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최동희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 답의 일단을 찾아보려고 한다.
2. 천도교와 최동희
기존의 자료를 통해 볼 때 최동희는 베일 속에 가리워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최제우의 양손, 최시형의 장자, 손병희의 조카로서 동학․천도교의 60년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존재였다.
동시에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어져 내려오던 한 흐름 곧 농민적 입장에서의 민족혁명의 완수라는 이상을 고수하는 흐름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 흐름은 인내천을 절대평등, 계급해방으로 이해했으며 공산주의조차도 인내천주의 안에서 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평등과 해방이라는 측면에서는 ‘민족혁명-동양혁명-세계혁명’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그 대척점에는 서구․일본문명의 수용을 통해 부르주아적 근대화를 이루려고 한, 손병희를 정점으로 하고 최린 계열을 귀결점으로 하는 또 하나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두 흐름은 천도교의 종교적, 정치적 성격을 둘러싸고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대립했다. 그러나 큰 흐름은 손병희에서 최린으로 이어지는 세력이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최동희를 따르던 천도교내 혁신세력이 천도교연합회로 분리되고 ‘신파’와 ‘구파’의 주도권 다툼에서 ‘신파’가 승리한 이후 천도교의 역사는 ‘신파’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1930년대 초에 나온 「천도교창건사」에서는 최동희가 1921년 3월 최린, 이종린 등과 함께 손병희로부터 궐암(厥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는 기록 외에는 최동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천도교창건사」 이래 최근까지 최동희는 천도교의 역사서술에서도 배제되어 있었다.
최동희는 1904년 열 다섯 살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을 가서 191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할 때까지 톨스토이를 즐겨 읽는가 하면 당시 일본 사회를 풍미하던 민권사상, 사회주의 등에 접하면서 세계사조를 인내천주의에 접목시킬 수 있었다.
귀국 이후에는 민족혁명을 위한 기반으로서의 천도교의 혁신운동을 주도했고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코민테른과의 연대를 통해 민족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지위와 활동 내용에 비해 최동희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가운데 최동희가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언급한 몇 가지 자료가 있다. 이를테면 최형우는 「해외혁명운동소사」에서 1926년 고려혁명당 결성 이후 최동희의 행적에 대해 “실제 운동가람보다 조선 고급가정의 영랑으로 출세적 부로커적 행위”라는 세평도 있었음을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최동희는 출세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최형우는 다시 “최소수의 흉장(胸臟)에 경세의 포부가 없엇다곤들 누가 말하랴”라고 하면서 그의 병사를 “애석한 일”로 보고 있다. 1927년 2월 5일자 「동아일보」는 최동희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해내해외로 도라 다니며 조선민족을 위하는 모든 운동에 힘을 썼다”고 적고 있다.
3. 최동희와민족혁명운동
1) 1919년 여름까지-다양한 민족혁명운동의 모색
1914년에 귀국한 뒤 최동희는 민족운동에 대해 준비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손병희와 대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동희가 1918년 1월에 쓴 편지에서 “성사(곧 손병희) 항상 말씀하시기를 동희는…나의 뜻을 어기지 아니한다 말만 하고 행동은 조금도 순종함이 없으니”라고 적고 있는 데서 이러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최동희는 1916년 9월 손병희에게 “천도교내부를 개혁할 것, 시천교와 통합할 것, 갑오년 혁명 당시 산화한 영혼을 생각해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 등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손병희노선과 결별을 고하게 된다. 그리하여 먼저 시천교와의 통합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자 “십년을 활동하여 천하를 경동케 할 사업” 곧 민족혁명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1916년 늦가을 중국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최동희는 이후 3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통해 민족운동 진영의 여러 인물(상해의 문일평, 홍명희, 조동호, 이광수 등, 북경의 신채호, 만주의 유동열, 김좌진, 황상규 등)과 만나면서 무장투쟁, 의열투쟁, 외교운동, 문화운동 등의 다양한 운동방략을 모색했다.
주목되는 것은 1918년 말에 이루어진 유동열과의 만남이다. 유동열은 1918년 4월에 이미 노령에서 한인사회당 결성에 참여하고 군사부장이 된 바 있었다. 최동희는 유동열을 통해 볼셰비키와의 연대를 권유받았다. 그러나 최동희가 바로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2)1919년 여름부터 1922년 말까지-민족혁명운동을 위한 국내 기반 다지기
최동희가 자신이 꿈꾸던 민족혁명과 관련해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1919년 여름 무렵이었다. 이 해 9월 유동열과 함께 레닌을 만난 후 최동희는 코민테른과의 연대를 통한 무장투쟁․독립전쟁이 민족혁명의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최동희는 천도교가 민족혁명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1919년 11월 하순 3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에 돌아와서 민족혁명의 국내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최동희 음모사건’이다. 최동희는 1920년 8월 대구에서 영남의 부호인 윤홍렬, 최완 등과 함께 “1. 만주에 중립국을 건설해 독립을 도모할 것. 만주는 토지가 넓고 가격이 싸므로…대규모 조선인부락을 만들고 학교를 설립해 동지를 훈련양성해 일본과 개전할 준비를 할 것, 2. 노국 과격파와 서로 결탁해 무력침입을 할 것.…독립을 갈망하는 우리는 무력 즉 전쟁에 의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노국 과격파와 결탁해…돈과 무기의 공급을 받아 무력을 충실하게 할 것” 등을 협의했다. 그러나 최동희가 특히 주력한 것은 천도교의 혁신이었다.
이 시기에 천도교는 3․1 운동의 여파로 간부들이 모두 투옥되는 등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동희는 귀국하자마자 천도교 안에서 “교회제도 혁신, 인물선택, 교육장려, 해외포교, 재정정리” 등을 주장했다. 특히 해외포교를 강조하고 나선 것이 주목된다. 이는 그가 민족혁명의 근거지를 만주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손병희체제가 굳어진 천도교 안에서 교회혁신은 쉽게 성공할 수 없었다. 손병희체제 아래 육성된 정광조 등 새로운 지도층의 주류는 1919년 9월 천도교청년교리강구부(1920년 3월 천도교청년회로 개편)를 조직하고 1920년 6월 「개벽」을 발간하는 등 문화운동을 표방하면서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런 가운데 여전히 혁명적 노선을 고수하는 남접계열의 오지영 등과 공산주의에 친화적인 일군의 교도(김봉국, 이동락, 이동구 등)들은 교단의 비주류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에 최동희는 자신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천도교 지도층과의 접촉을 강화함으로써 교단혁신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기록이 남아 있는 1921년 한 해만 해도 최동희는 오랜 지기인 이상우를 비롯해 이증로, 박내홍, 손재근, 최석연, 이군오, 정계완, 지동섭, 김진팔, 윤익선, 김달현, 김기전, 이돈화, 최동오, 오지영, 그리고 11월부터는 3․1운동으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이종훈, 홍병기, 나용환, 나인협, 임예환, 박준승 등과 꾸준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정한 세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뒤 최동희는 1921년 4월부터 귀국 이후 세 번째로 교단혁신을 추진했다. 4월 5일의 천일기념일과 같은 달 6일과 7일의 부구(部區)총회를 통해 교단혁신을 주장했고 그 결과 상당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천도교의 혁신운동은 가속화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오지영, 윤익선 등이 신․구 사상의 연구를 표방하면서 사상연구회를 조직했고, 6월에는 최동희 자신이 천도교청년회에 가입함으로써 신진세력을 포섭해 교단혁신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본격화했다.
1921년 말이 되면 천도교의 혁신운동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최동희는 1921년 10월 11일 교우구락부를 발기하고 스스로 “신구 사상의 충돌을 조화하며 시대의 이세에 순응할 사”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강령 초안을 만들었으며, 이후 교우구락부를 원로회, 종법회로 발전시키면서 혁신운동의 추진체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홍병기, 이종훈 등 교단의 원로들이 혁신운동을 지지함으로써 일시적으로는 힘 관계가 역전되는 상황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1922년 1월에는 교단의 지방분권적 운영을 존중하는 신제도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혁신세력은 와병중이던 손병희가 1922년 4월 끝내 교단개혁에 반대하는 뜻을 밝히자 중앙의 주도권 다툼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며 손병희의 사후 실권을 장악한 정광조, 최린 등이 같은 해 6월부터 교단개혁의 요구사항 가운데 일부를 수용하자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최동희는 1922년 7월 14일 민족혁명운동을 추진할 교단내 비밀조직으로 고려혁명위원회를 결성했다. 고려혁명위원회의 구성원은 고문 이종훈, 위원장 홍병기,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 최동희, 비서 송헌, 해외조직부장 이동락, 해외선전부장 김광희, 국내조직부장 이동구, 국내선전부장 김봉국, 재정부장 박봉윤 등이었다. 최동희가 외교부장의 직위를 맡았다든지 해외조직부와 해외선전부라는 부서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고려혁명위원회가 대외교섭 곧 코민테른이나 중국혁명과의 연대를 중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려혁명위원회 결성 이후에도 혁신세력의 약화는 지속되었다. 그 결과 최동희가 다시 망명길에 오른 직후인 1922년 12월 말 혁신세력은 오지영을 중심으로 천도교연합회로 분리되었다.3)
한편 최동희는 만주에서 같이 활동한 바 있던 원우관을 비롯해 김한, 박일병 등 천도교 밖의 사회운동 세력과도 자주 접촉했다.4) 그런데 이들은 1920년 3월에 서울에서 결성되고 다음 해 5월에 부활한 ‘조선공산당’의 성원이었다. 따라서 최동희는 국내 공산주의운동 세력과도 연대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 이와는 별도로 최동희는 윤홍렬, 최완 등 운동자금을 댈 수 있는 인물들과도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했다.
이상에서와 같이 최동희는 1919년 말부터 1922년까지 만주를 근거지로 한 민족혁명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천도교의 혁신운동을 벌이는 한편 천도교 밖의 운동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최동희는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21년 한 해 동안 일기의 곳곳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영국의 광부파업, 미국의 배일문제, 일본의 중국진출 등)가 일본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었으며 특히 1921년 11월 11일의 태평양회의가 “일본에게 가장 불리하게” 귀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미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통치력이 약화되면 이를 기회로 코민테른과의 연대 아래 독립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태평양회의의 결과가 알려지자 최동희는 한 동안 일기를 쓰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단순히 국제정세의 변화에 기대하기보다는 코민테른과의 연대를 더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를 최동희가 1922년 말 다시 망명길에 오른 직후 소비에뜨러시아로 간 데서도 유추할 수 있다.
3)1922년 말부터 1927년 1월까지
-코민테른과의 연대를 통한 민족혁명운동의 추구-
1922년 말 이후 최동희는 해외에서 코민테른과의 연대 및 중국 국민혁명과의 공동보조를 통해 민족혁명을 완수하고 나아가 동양혁명과 세계혁명을 이룬다는 구상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사람을 파견하는가 하면 천도교 중앙총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개벽」 등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최동희는 이동휘와 한명세를 통해 코민테른과 그 간부인 가타야마, 이델슨, 파인베르그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코민테른의 지원을 요구했다. 그런데 1923년 말 이후 최동희가 접촉한 이동휘, 한명세, 파인베르그는 모두 코민테른 극동부 산하 꼬르뷰로의 위원이었고, 가타야마는 꼬르뷰로의 내분(이동휘 대 한명세․파인베르그 사이의 내분)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코민테른의 집행위원이었으며, 이델슨은 꼬르뷰로를 해산하고 고려공산당의 창당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전권대표였다. 따라서 최동희와 코민테른의 접촉은 상당한 정도의 공식성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편지 가운데서 가장 빠른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보낸 1923년 12월 27일자 편지는 이후 1년여에 걸친 코민테른과의 교섭과정의 기본적인 틀을 보여주고 있다.
이 편지에서 최동희는 ‘고려혁명’의 통일전선체 결성의 필요성을 먼저 강조한 뒤 천도교가 ‘상해파, 이시파, 국민회의파, 창조파, 개조파’ 사이의 투쟁에서 ‘불편부당’한 입장에 서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파벌투쟁과 관련해 최동희는 창조파에 ‘천도교 대표’로 참가한 신숙이 결코 천도교의 대표가 아님을 몇 차례나 지적하고 있다.
이어 같은 편지에 첨부된 ‘천도교의 혁명적 계단과 시국관’이라는 별도의 글에서 최동희는 천도교의 민족혁명운동론을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강조된 것은 천도교가 ‘제일혁명’(농민전쟁)-‘갑진재거’-‘기미운동’으로 이어지는 혁명전통을 계승해 제4의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그는 1923년 봄 천도교연합회와 천도교 중앙총부의 분열이 타협통일된 후 ‘내적 기관의 간부’에서 결정된 혁명의 준비방침에 대해 적고 있다. 그 방침이란 “자체의 확장보다는 자체를 공고하게 결속할 것, 천도교 밖에 제3단으로 별도의 소작인단체를 조직할 것, 중국과 노령의 동족을 통일체로 단결시킬 것, 일본 혁명가와 연락을 취해 일본 내란을 조성할 것” 등이었다.6)
이 편지에서 최동희는 ‘천도교혁명최고비밀간부’의 해외특파원을 자임하고 있었다.7) 이 조직은 관헌측의 자료나 천도교사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최동희에 따르면 1923년 봄에 ‘신구파의 타협’에 의해 출범한 ‘내적 기관의 간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해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천도교연합회와 천도교 중앙총부가 각각 별도의 대규모 모임을 개최한 사이에 ‘중간파’의 노력으로 재통합문제가 논의되었으나 중앙총부측 일부의 반대로 일단 결렬된 바 있었다. 재통합을 위한 움직임이 이후 어떻게 귀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구파의 타협’ 움직임이 있었던 것만은 확인된다.
한편 1924년 6월 15일자로 정우당(鄭愚堂)(鄭圭璇?)이 가타야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천도교비상혁명최고위원회최고간부’가 출범했으며, 그 간부로는 집행위원장 홍병기, 총무위원장 나용환, 내무위원장 윤익선, 외무위원장 최동희, 재무위원장 김진팔, 선전위원장 정계완, 사성(司省)위원장 이종훈이 선출되었고, 외적 기관의 간부로는 포덕과주임 이인숙, 서무과주임 최린, 경리과주임 최석연, 편집과주임 이돈화가 임명되었다고 하면서8) 최동희가 천도교의 대표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최동희는 1924년 1월 이동휘와 만나 천도교 종리원을 중심으로 공산당 야체이카를 조직하고 공산주의와 천도교사상을 연결해 혁명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기도 했다.9) 최동희가 이후 코민테른과의 접촉과정에서 여전히 파벌투쟁과 관련해 천도교의 불편부당함을 강조한 것이라든지 이델슨에게 쓴 편지에서 상해파가 고려공산당의 창립에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으로 보아 이동휘와의 교섭은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10)
1년여에 걸친 코민테른과의 접촉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동희는 1924년 12월 17일 소비에뜨러시아 정부에 고려인민혁명군의 결성과 관련된 비밀협정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11) 그러나 최동희의 기대와는 달리 1925년 1월 20일 ‘소일 상호관계의 기본원칙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었고 1925년 2월에는 최동희 자신도 소비에뜨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최동희는 김광희, 주진수, 이규풍 등과 함께 만주로 가서 국내외 동지를 규합해 새로운 통일체를 조직하려고 노력했다. 1925년 8월에는 이동구를 만주로 불러 국내의 동지들과 함께 동참할 것을 권유했으며, 이동구를 통해 천도교연합회의 김봉국, 송헌, 이동락, 천도교의 홍병기, 형평사의 오성환, 서광훈 등을 포섭했다.
그리하여 1926년 4월 천도교, 형평사, 정의부의 통일체로서의 고려혁명당이 창당된 후에는 재차 코민테른, 소비에뜨러시아, 중국 국민당과 연대를 맺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북경에서 소비에뜨러시아의 카라한, 상해에서 코민테른의 보이찐스키와 만났는가 하면 장개석, 장작림과도 만나 민족혁명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이와는 별도로 1919년부터 구상해 온, 만주의 집단부락 건설을 통한 무장투쟁의 전개라는 방침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국내의 천도교도를 만주로 집단이주시키기도 했다. 이 와중에서 병으로 쓰러진 최동희는 1927년 1월 상해에서 죽었다.
4. 맺음말
일제 강점기 천도교 안에는 농민적 입장에서 변혁을 모색하던 흐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흐름은 천도교연합회로 분리된 혁신세력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신파’와 ‘구파’에도 내재해 있었다. 천도교 안에서 나타난 바 있던 공산주의운동과의 통일전선 결성 움직임이나 코민테른과의 연대 움직임은 모두 이 흐름과 관련해 이해될 수 있다.
최동희는 천도교 안에서 민족혁명을 위한 통일전선체 결성과 국제적 연대에 입각한 무장투쟁(=독립전쟁)을 가장 먼저 제창했고 또 그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동희의 활동은 동학 이래의 혁명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최동희가 코민테른과의 접촉 과정에서 제시한 민족혁명 구상의 핵심은 세 차례 혁명의 전통, 그리고 천도교의 잘 짜여진 조직체계와 “350만 명”에 이르는 교세였다. 후자와 관련해 천도교 안에서의 주도권 쟁취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동희의 주요 지지기반인 혁신세력은 천도교연합회의 분리 이후 점차 약화되어갔다.
최동희의 활동과 죽음은 농민전쟁 이래 동학․천도교에 내재하던 농민적 입장에서의 민족혁명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최동희의 죽음 이후 천도교의 역사는 ‘신파’와 ‘구파’의 대립, 그리고 ‘신파’의 주도권 장악이라는 과정을 밟아 나갔다. 그런 가운데 계급해방, 절대평등, 민족혁명의 이상은 잊혀진 역사의 한 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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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의 연구성과로 李庸昌, 「1920년대 天道敎의 紛糾와 民族主義運動」(중앙대 석사 학위 논문, 1993); 金正仁, “1910 - 25년간 天道敎勢力의 동향과 民族運動,” 「韓國史論」, 32(1994); 曺圭泰, “1920년대 천도교연합회의 변혁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4집(1996); 윤해동, “한말 일제하 天道敎 金起田의 ‘近代’ 수용과 ‘民族主義’,” 「역사문제연구」, 창간호(1996); 鄭用書, 「日帝下 天道敎靑年黨의 政治․經濟思想 硏究」(연세대 석사 학위 논문, 1997) 등을 볼 것.
2) 1차 분열 당시에도 신파와 구파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2차 분열 당시의 신파와 구파만을 ‘신파’와 ‘구파’로 표기한다.
3) 여기서 최동희가 천도교연합회의 분리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문제와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최동희의 측근인 이상우는 천도교연합회에 참여한 데 비해 최동희의 장인이자 최대 후원자이던 홍병기를 비롯해 이종훈 등 원로세력은 잔류했다는 사실만이 확인된다. 그러나 최동희가 망명 이후 코민테른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천도교내의 통합을 강조하면서 천도교의 해외특파원을 자임하고 1924년에는 「개벽」 둥에 글을 게재함으로써 천도교 중앙총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자신은 천도교연합회의 분리를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4) 특히 원우관과 김한은 천도교의 혁신운동에도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최동희는 주종건, 나경석, 강택진 등의 공산주의 활동가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6) 이 가운데 소작인단체 조직에 관련된 방침은 이후 조선농민사의 결성과 관련해 시사적이다.
7) 최동희는 이후 코민테른과의 교섭과정에서 줄곧 이 직함을 사용했다.
8) 참고로 1924년 4월 임시종법회에서 선임된 중앙간부는 포덕과주임 최린, 서무과주임 이인숙, 경리과주임 최석운, 강도사 이종훈, 권동진, 나용환, 오세창, 홍병기, 오영창 등이었다.
9) 이 무렵 이동휘는 창조파의 국민위원회를 기반으로 한 인민혁명당 결성계획에 맞서 노동자․농민단체나 천도교 같은 국내의 유력단체와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동휘가 최동희와 만난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10) 그러나 이후 ‘신파’가 조선농민사의 결성이나 크레스틴테른과의 접촉 과정에서 상해파와 결합할 수 있었던 단초는 이때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11) 최동희가 제시한 비밀협정의 주요 내용은 “1. 소비에뜨러시아는 천도교에 의해 조직될 15개 혼성여단과 특수임무 및 일반임무를 띤 지원부대로 구성될 고려인민혁명군에 총기, 폭발물, 수송수단, 탄약 등을 제공한다, 2.소비에뜨러시아는 고려인민혁명군에 금광 지역을 제공한다. 고려인민혁명군은 이 금광의 수입으로 채무를 상환한다, 3.소비에뜨러시아는 인민혁명군이 하천, 철도, 해로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4.소비에뜨러시아는 인민혁명군의 후방부대가 자기 영토에 주둔할 경우 정기적인 피복제공과 급량을 책임진다, 5.소비에뜨러시아는 유능한 군사전문가를 인민혁명군의 교관으로 파견하고 인민혁명군의 병사 및 장교를 소련의 특수군사교육기관 및 해군교육기관에서 위탁교육한다, 6.소비에뜨러시아는 인민혁명군이 자기 영토내에 주둔하지만 적군의 통솔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군대로 인정한다, 7.소비에뜨러시아는 인민혁명군의 모든 병과의 지휘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학교를 설립하고 이를 위한 재정적 지원을 한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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