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헤르츨Teoder Herzl
(1860~ 1904)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으로 현대 시온니즘 초창기 주창자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에서 "유대 국가의 영적 아버지"로 불린다. 기자, 법률가, 작가이자 정치 활동가이다.
헤르츨은 헝가리 페슈트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신문기자 겸 작가로 활동했다. 빈에서 잠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신문,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Neue Freie Presse)의 파리 특파원이 되었다. 헤르츨은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이미 사회에 만연한 반유대주의를 목격했다가 프랑스에 파견된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이었다.
고대 시대 유대인의 탄압과 박해는 로마 제국(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에 기원되고 있다. 유대 독립 전쟁 이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계기가 되었다.
중세 유럽시대, 그리스도교 중심의 유럽 사회에서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낙인이 찍혀 공직 진출과 토지 소유가 금지되었으며, 강제로 특정 거주 구역(게토)에 격리되기도 했다.
근대에는 러시아의 포그롬 (19세기 말~20세기 초): 러시아 제국 등지에서 유대인 마을을 습격하고 학살·약탈한 반유대주의 폭력 사태가 수십 년간 이어졌다.
현대, 20세기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1933~1945년)까지 수천 년에 걸쳐 세계 각지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18세기부터 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줄어들었고 유대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 또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유대인 공동체가 유럽인에게 이질감을 주어 차별을 받는다고 여겨 가톨릭 혹은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유대 전통에 거리를 두는 등 유럽 사회에 동화되려는 태도를 가져왔다. 그렇게 몇 세대가 이어지며 유럽의 유대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박해지고 있었다.
사건의 피해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역시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막상 상황이 닥치자 유럽인들은 거리낌없이 유대인을 타자화하며 차별과 사회적 낙인으로 그들을 대했다. 이런 현실을 목격한 헤르츨은 유대인이 아무리 유럽인이 되려 해도 유럽인들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질 수는 없으며, 유대인에게는 그들의 살아갈 땅과 조국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반유대주의 사건들과 특히 *드레퓌스 사건을 목격한 뒤 그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후 유대인 생존 유지를 위한 ‘유대 국가’를 설립의 절대성과 필요성을 통찰하고 세우기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헤르츨은 1896년 2월, 『유대 국가: 유대인 문제의 현대적 해결 시도』라는 책을 펴냈다. 유대국가 설립 계획으로 같은 해 8월에는 오스만 제국의 황제 압뒬하미트 2세을 찾아가,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넘겨달라는 청원을 하기도 했다. 황제와의 면담은 실패했지만 이 일로 그는 일약 시오니즘의 정치적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시온주의자 세계대회는 그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 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한다." 라는 선언이 나왔다.
헤르츨은 1904년에는 교황 비오 10세와 만나서 시오니즘 운동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반유대주의자들이 우리의 가장 믿음직한 친구가 될 것이며, 반유대주의 국가들이 우리의 동맹국이 될 것이다.” 헤르츨은 반유대주의가 오히려 시오니즘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에 시달려야지만, 유럽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유대인들만의 국가에서 살기를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키시뇨프 포그롬(대박해) 이후 영국 식민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을 통해, 동아프리카 보호령에 유대인의 피난처를 만들려 하였다.
헤르츨은 이스라엘을 위한 큰 업적을 이룬 것과 달리, 가정사는 불행했다. 당시 시오니즘에 호의적이었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서민 계층이었던 탓에 헤르츨은 시오니즘 운동의 재정적 부담까지 홀로 감당해야 했다. 1897년 제1차 시온주의자 회의에 참가한 16개국 대표들의 참가 경비마저 헤르츨의 사비로 충당해야 했을 정도였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아내의 지참금마저 탈탈 털어쓴 헤르츨은 44세에 빈털터리로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남편 사후 3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큰딸은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둘째 딸은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아들[4]은 자살했으며, 둘째 딸의 아들(외손자)도 자살하여 헤르츨 가문은 완전히 대가 끊겨 버렸다.
1904년 심장병으로 숨진 탓에 생전 이스라엘의 건국을 보지는 못했지만, 빈에 묻혀 있었던 유해가 1949년 이스라엘로 옮겨져 안장되었고, 예루살렘에 위치한 이스라엘 국립묘지가 '헤르츨 산으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평가:
이스라엘에서 다비드 벤구리온,하임 바이츠만과 함께 국부로 추앙된다. 헤르츨이 없었다면 벤구리온도, 바이츠만도 없었을 것이다.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의 귀향을 이뤄내고, 민족국가의 기틀을 닦았다는 점에서 유대인 지도자 모세와 비견된다는 시각도 있다.
저서:유대국가(1896 출간):반 유대주의 극복,팔레스타인에 독립된 주권 국가 건설의 당위성을 주장한 시오니즘 사상 기반을 제시한 책...오늘날 이스라엘 건국의 길잡이가 되었다.
출처:위키백과
첫댓글 목록 '103번부터'의 인물들은 구약 시대 인물이 아니고 현대 이스라엘 건국 지도자들입니다. 이 자리에 올리는 이유는 그들이 주장하는 팔레스티나가 '자신들의 땅'이라는 성경 인용과, 그에 따르는 불행한 인류 역사 과정을 더 이해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 더 도움이 되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