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총장 어윤대)는 올해 입학한 2004학번 학생들부터 일정 수준의 한자를 익히지 못할 경우 졸업할 수 없도록 할 방침이라고 23일 밝혔다.
고려대는 학생들의 한자 실력 측정을 위해 재학생과 휴학생 중 신청자를 대상으로 27일 '한자 이해능력 인증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응시자들은 한자의 음과 뜻을 묻는 50문제와 한자 독해 50문제 등 100문제를 풀어 이 중 60점 이상을 받을 경우 졸업 자격을 얻게 된다. 고려대는 내년부터 이 시험을 연 4회로 확대하는 한편 일반인에게도 응시 자격을 줄 계획이다.
이 대학 교육지원부 김창배 부장은 "최근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해 한자의 중요성이 커지는 데 반해 우리 학생들은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한자 실력이 약해지고 있다"며 "국어의 활용능력과 전문적·학술적 용어에 대한 이해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한자 교육은 필수"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최근 한자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삼성이나 SK 등 주요 대기업도 신입사원의 채용에 한자 실력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는 교육인적자원부가 선정한 중·고교 기초한자 1800자와 자체적으로 선정한 교육용 한자 300자 등 총 2100자를 학생들에게 익히도록 할 방침이다.
제대로 된 한자교육이 국어사랑
민관식(閔寬植·85) 전 문교부장관 자택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늦어서였다. 그날따라 유달리 교통체증이 심했던 데다 근처에 이르러서도 골목을 헤맨 탓이었다. “길이 막혀 도착이 약간 늦어진다”고 미리 휴대폰으로 양해를 구했건만,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결례의 송구스러움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그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도대체 자네 뭐하는 사람이냐”는 눈초리가 자칫 쥐어박으려는 태세였다. 몇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는 뜻을 표한 뒤에야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는 기색이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기자의 명함을 받아들더니 또다시 퉁명스럽게 변했다. 집어던지듯이 명함을 옆으로 밀쳐놓는 모습에서 기자가 뭔가 단단히 실수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심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명함 바꿔”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그제서야 “아차” 생각이 떠올랐다. 한글로만 인쇄된 명함이었다. 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명예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그로서는 탐탁지 않았으리라.
역대 문교·교육부장관들이 한자교육 건의문을 냈다고 해서 얘기를 들려주십사며 인터뷰를 요청해 놓고는 덜렁 한글 명함을 갖고 갔으니…. 오히려 당연한 반응이었다. 기자로서의 무딘 감각을 탓해야만 했다. 앞으로 명함을 한자로도 표기하겠노라며 거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제서야 “아무렴, 그래야지”라며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장난스런 웃음이었다. 인터뷰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한자를 제대로 배우자는 것은 우리 국어를 잘하자는 얘기나 똑같은 거야. 우리 어휘의 70%가 한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게나. 영어 교육의 열풍에 한글이 소외당하고 망가지는 데 대해서는 모른 체하면서도 한자를 사용하자면 왜 그렇게 난리들 떠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자리에 앉자마자 첫마디에 한자교육의 당위성이다. 팔순 나이에도 목소리는 쩡쩡 울렸다. 얘기가 오가면서 조금 전까지의 험한 분위기는 어느새 지워져 버렸다. “자네, 우리 전통문화의 80~90%가 한자로 이뤄져 있다는 걸 아는가. 그런데 한자를 모르기 때문에 도서관 책들이 파묻히고 있다는 거야. 과거의 국한문 서적을 읽을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 그는 한자교육이 모자라 우리 문화정책에 전반적인 위기 상황이 초래되고 있음을 걱정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는 데 대해서는 더욱 마땅치 않은 듯했다. “당장 월드컵만 해도 그렇지. 손님들의 7할 5푼이 한자 문화권 손님이라지 않는가. 한자를 무시하면서 어떻게 손님들을 제대로 대접하겠다는 말씀들인지”. 그는 “한자교육을 앞당기는 데 반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도 했다.
이쯤에서 기자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장관들이 재임때는 뭘하다가 지금와서 그런 주장을 하느냐는 지적들이 있는데, 알고 계시느냐”고 물었다. 나름대로는 조금 전 혼난 데 대한 역공이었다. 그는 단박에 “그건 사실을 잘 모르는 소리”라고 되받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장관 재임시의 일화를 끄집어냈다. 그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문교장관에 발탁된 것은 1971년. 벌써 30년 전의 일이지만 그는 얘기에 막힘이 없었다.
“장관을 맡고 이듬해 연두보고때 일인데, 직원들이 브리핑 차트를 한글로만 써왔더라구. ‘한글 전용법’이 70년부터 시행됐거든. 한자를 섞어서 다시 만들라고 했더니 모두가 한목소리로 반대하는 거야. 장관이야 지나가면 그뿐이지만 문교부는 쑥밭이 된다는 거지. 그러나 결국 한자 차트를 만들어 브리핑을 하면서 박대통령 얼굴만 쳐다봤지. 브리핑이 끝나고 소감이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그러시더라구”
그는 현재 중·고교에서 배우는 기본 한자가 결정된 과정에 대해서도 무용담 삼아 자세히 소개했다. 첫번째 청와대에 올린 서류는 도중에 감쪽같이 증발됐다고 했다. “보통 사흘이면 결재가 내려오는데 1주일이 지나도록 내려오지를 않는 거야. 그래서 박대통령에게 서류 얘기를 꺼냈더니 자신은 보지 못하셨다는 거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빼돌렸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다시 서류를 올린 끝에 1,800자의 기본 한자를 관철시켰다고 했다. “전직 장관들이 이번 서명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냐”고 물었더니 “윤형섭 전장관은 한글 전용론자라서 빠졌다”는 대답이다.
질문을 평준화 조치로 돌려보았다. 그의 장관 재임중이던 74년에 고교 평준화 조치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요즘 평준화의 폐해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며 견해를 묻자 “그것은 69년에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면서 이미 예정돼 있던 사항”이라며 “그때로서는 망국병이던 과외열풍을 없애고 학생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킨 조치”라고 말했다.
“평준화 조치는 한마디로 ‘KS(경기고·서울대) 마크’를 없애자는 것이었는데 나 말고는 할 사람이 없었다”고도 했다. 자신이 경기고(제일고보) 출신이기 때문에 오해없이 추진할 수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가 경기고 재학 당시 고향인 개성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통학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런데도 장난이 심하다고 1년 낙제한 끝에 최규하 대통령과 같이 졸업했다”며 껄껄 웃어댔다.
그때 별명이 ‘개성 깡패’지만 그 뒤로 ‘불도저’ ‘민짱’ 등 몇가지가 추가됐다. “이봐, 혹시 별명을 쓰려면 ‘깡패’는 빼고 ‘젊은 오빠’라거나 ‘베리베리 싱싱’이라는 별명을 써주게나”. 그의 말처럼 그는 아직도 ‘젊은 오빠’다. 시력과 치아도 그대로다. “혹시 보청기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코웃음이다. 건강 유지에는 금연도 한몫을 했다. “78년 9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켄트 3대를 한꺼번에 피워 버리고는 지금껏 담배를 입에 댄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도 어김없이 헬스장에서 트랙을 돌거나 1주일에 두세번은 테니스 코트를 찾는다. 두해 전에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 여지껏 살아오면서 기억될 만한 온갖 물건들은 모아놓은 자택 지하의 개인 기념관을 둘러보는 것은 별다른 재미다. 사마란치, 연형묵 등이 함께 식사하면서 사인한 식당 메뉴판에서부터 조오련 선수가 기증한 금메달, 기념 배지, 골프장 마크 등등. 박대통령이 하사금을 보내온 누런 봉투들도 액자에 걸려 있기에 “박통께서는 얼마나 보내셨냐”고 물었더니 “그때마다 액수가 달랐다”는 답변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지나온 삶을 회고록으로 엮어내는 것. 그러나 너무 바쁘기 때문에 자료를 정리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 국회 부의장까지 지낸 정계 원로로서의 한말씀을 부탁했더니 “요즘 우리 정치, 사회에는 페어플레이 정신이 없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려는 기자에게 그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여보게, 앞으로 누구와 만나든지 시간 약속은 제대로 지켜야 하네”
우리 사회의 갈등 중에는 애당초 대립점을 잘못 잡아서 서로가 자기 주장만 되풀이해대는 경우가 많다. '한글전용 대 한자교육'의 다툼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한글전용론은 문자생활의 규범에 관한 주장이요, 한자교육론은 교육의 내용에 관한 주장이다. 논리적으로 별개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생산적인 논쟁이 처음부터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충돌할 이유가 충분하다. 한자교육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급하는 방법은 한자를 혼용해서 친숙하게 만들 뿐 아니라 한자를 안 배우고는 문자생활을 제대로 못하도록 강제하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한자교육을 아예 안해버리면 사람들이 좋든 싫든 한글전용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둘 다 편의 위주의 접근이지 진지하게 대화하려는 자세가 아니다.
***한자 몰라도 글 읽을 수 있어야
나는 한자교육이 초등학교 때부터 상당히 폭넓고 지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그 수단으로 한자를 본문에 노출시켜 쓰자는 혼용론은 반대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둘만 짚어보겠다.
첫째로 한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 큰 불이익을 주는 차별행위가 된다는 점이다. 한자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도 소리 내서 읽을 수는 있어야 하고 국어사전에서 들춰볼 수 있는 권리를 지녀야 하지 않는가. 한글은 '우리 것'이니까 한글만 써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논리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한글만 깨치면 누구나 최소한의 문자생활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논리다.
둘째로 한자를 굳이 '남의 것'이라고 배척하지 않더라도 한국어에서 한자말의 비중을 줄여나가는 것은 중요한 과제인데, '혼용'은 이에 역행하는 조치다. 한자의 조어(造語) 능력이 탁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토박이말을 밀어낼 뿐더러 비슷비슷한 소리가 나는 짧은 단어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한국어의 변별력을 감퇴시키는 부작용이 크다. 이 부작용을 지식인의 문자생활에서는 한자혼용이 해결할 수 있지만, 모두가 함께 쓰는 입말에서 한국어가 알아듣기 힘들고 생소한 낱말투성이의 언어가 되는 사태를 막아주지는 못한다. 결과적으로 영어 등 변별이 잘 되는 외국어의 범람에 일조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 말한 두 가지 모두가 한자교육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이유와도 통한다(한자교육의 필요성 역시 이들 두 가지밖에 없다는 건 아니다).
첫째, 한자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 한국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곧 언어생활상의 민주적 평등권 차원에서도 광범위한 한자교육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실제로 한자교육에 부정적이고 최소한의 한자를 괄호 속에 써넣는 것조차 반대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한글을 한자로 변환할 줄 알기 때문에 한자를 못 배운 사람들의 헛갈리고 답답한 사정을 몰라주는 경우가 흔하다.
둘째, 한자말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한국어의 표현력과 소통능력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한자를 잘 알아야 한다. 한국어와 한문을 두루 연구한 전문가들의 공헌도 물론 중요하지만 한국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의식적.무의식적 협동 또한 필수적인 것이다.
***괄호 속에 쓰는 건 막을 이유 없어
이렇게 보면 '한글전용 대 한자교육'으로 갈려 싸울 이유가 없음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두 개의 논쟁이 따로 있고 그 해답은 비교적 쉽다고 봐야 한다. 즉 한자교육이 필요하냐 안 필요하냐는 논쟁과, 한자를 노출시키는 것을 국가의 공식 방침으로 삼을 거냐 말 거냐는 논쟁인데, 여기서 한자교육은 필요하고 노출은 곤란하다는 결론을 내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물론 한자를 괄호 속에 쓰는 것조차 배제할 건가 하는 전용론 내부의 논쟁이 남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한글전용론이라면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추가해 제공하는 것마저 막을 까닭이 없다. 그리고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획일화 압력을 경계한다면 공문서나 교과서가 아닌 여타 기록물에서 한자와 외국어를 내놓고 섞어 쓰건 반대로 한글 아닌 것은 아라비아 숫자마저 한글로 바꿔 쓰건 각 개인의 선택과 사회의 자체조절 기능에 맡겨야 할 것이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평론가
2004.10.13 18:50 입력 / 2004.10.14 08: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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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달웅 (dujwsong) 추천 : 1
10-14 11:20 '한글전용'과 '한자교육'이 지금 싸우고 있다는 생각은 낡은 사고에서 출발한 우맹입니다. 지금 사회의 어디에서도 '한글전용'과 '한자교육'이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서로 화합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문제는 신 세대들이 한자가 어려워 안 배우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히려 한자교육을 받고 한 발 더 나아가 중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백낙청 교수님, 아직도 상당히 먼 과거에 사시는 것 같습니다.
자라나는 세대 한자교육 강화해야
게재일 : 2004년 07월 27일 [29면] 글자수 : 1623자
기고자 : 박명식 중앙일보 디지털 국회 논객
지난 4월 이산가족 상봉 때 북한은 통일부 한 관계자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천출' 발언을 문제삼았다. 통일부 관계자가 금강산에 있는 '천출(天出) 명장 김정일 장군'이란 글귀를 보고 '천출(賤出)은 천민이란 뜻도 있다'고 말해 일어난 일이다. '천 '자를 잘못 해석해 오해를 불러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엔 한 대학의 기초 한자시험에서 신입생들이 낙제점을 받은 것으로 보도됐다.
지금 초·중등생들에게 한자 교육을 확대하느냐를 두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한글의 우수성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한글이 독립적으로 쓰이는 것보다, 한문과 함께 사용될 때 구어적으로나 문어적으로 그 표현이 최고조를 이룬다는 데 있다.
요즈음 한창 언론에 회자되는 '북핵 6자 회담(北核 6者 會談)'을 예로 들어 보자. 이 문장을 우리말에 가장 가깝게 표현해 보면 "또 다른 우리나라 사람들이 터지면 버섯구름 모양으로 사람을 많이 다치게 하는 것을 만들려 하는데 걱정이 되어 이웃의 여섯 나라 사람들이 모여 나누는 이야기"정도가 될 것이다.
적절치 않은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6자로 충분하던 표현이 자그마치 64자로 늘어났다. 마찬가지로 이화여대(梨花女大)를 '배꽃 동산 처녀들의 큰 배움터'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의 말과 글에 한자가 없으면 구어적·문어적 표현이 상당히 까다롭게 된다. 또한 현실적으로 이러한 긴 한글 표현법으로 신문이나 모든 문장을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어의 70% 이상은 한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마 축약된 한문과 숙어(熟語) 문장이 없다면 우리 신문이나 서적 지면은 현재 분량의 몇 십배를 더 발행해야 하는 낭비와 수고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한글 사랑을 앞세워 한자를 배제하는 풍토는 한글 표현법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다듬어진 한글 보급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2000여년을 써 온 것을 '구식 옷'이라 하여 버리자고 해서는 안 된다.
한자를 배척하기에 앞서 날로 늘어나는 무분별한 국적불명의 신조어를 비롯해 합성어나 난해한 외래어와 같은 언어 파괴의 현상을 더 경계해야 한다.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가 지형학적으로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기록과 표현의 수단에 있어 한문이 배제된다면 서예나 역사의 학문적 연구에 접근할 수 없다. 우리의 정서상 한자에 대한 이질감은 크지 않다. 그만큼 한글과 한자의 병행은 자연스럽게 우리 말과 글의 일부로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우리의 자라나는 학생들이 한자로 할아버지·할머니, 또는 부모님의 성함은 언제 어디서나 쓸 줄 알아야 한다. 일부 대기업과 활자 매체인 신문사의 신입사원 입사시험 정도에서나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현실은 심히 우려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도 '한문'으로 된 국보이지 않은가. 바뀌거나 새로운 것이 모두 개혁(改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대안 없이 한자 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은 미래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경남 지역에 사는 고3 학생이다. 4월 10일자 사설 '學科를 학교로 읽은 서울대생'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극히 일부 학생의 경우를 부풀려 발표한 것은 아닌지 자료의 신빙성부터 의심이 갔다. 최상위 2%만 갈 수 있는 서울대 학생이 과연 그럴까 쉽게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처럼 성적이 중간인 학생이라도 최소한 '學科'(학과)와 '學校'(학교)는 구분할 수 있다.
이런 믿기 힘든 사실을 근거로 중·고교 과정에서의 한자 수업을 강화하자는 주장에는 쉽사리 동의하지 못하겠다. 요즘 한자 교육에 대한 관심이 급작스레 증가한 것은 동북아 국가 간의 경제교류가 활성화하는 추세라 현재의 학생들이 나중에 불편없이 중국·일본 사람과 문자로나마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하지만 중·고교 과정에서 한자 공부를 지금보다 열심히 한다 해도 그 목적은 달성하기 힘들 것 같다. 왜냐하면 중국에선 새로운 한자가 계속 생겨나고, 쓰기 불편한 한자를 약어로 줄여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본한자를 익혀봤자 중국어 간판이나 명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정책 당국자들이 정말 학생들의 한자교육이 잘못됐다고 판단한다면 아예 초등교육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