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영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봉건제도 붕괴 이후 국가 부는 ‘중상주의’라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비옥한 토지가 중요하다는 중농주의적 입장에서 무역을 위한 화폐가 중요하다는 중상주의적 입장이 자리매김을 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농작물도 하나의 상품으로 보기 시작했고 이를 상업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지주 등 재력이나 힘이 있는 사람들은 토지를 상업화시키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모직물 재배에 몰입하게 된다. 모직물 재배를 위해서는 양이 필요했고, 양이 먹을 목초지가 필요했다. 목초지 운영은 양을 관리할 수 있는 소수의 목장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에 인건비는 많이 들지 않지만 수입은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너도 나도 목초지를 만들기 위해서 울타리를 치는 일이 많아졌다. 울타리는 당시 힘 있는 영주나 지주 등이 자신의 땅 뿐만 아니라 이와 근접해 있는 미개간지 · 공유지 등도 함께 포함시켜서 사유지로 만들었다. 이러한 행동은 17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힘없는 농부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 숫자가 너무 많아지자 큰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리고 다수의 농민은 배고픔으로 굶어죽었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보고 토마스 무어(1477.2.7 ~ 1535.7.6)는 ‘유토피아’라는 책을 통해 ‘양이 사람을 잡아 먹었네’라는 글로써 표현한다. 이것은 인클로저 운동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양이 직접 사람을 잡아 먹은 것이 아니라 당시 양이 먹을 목초지 때문에 결국 사람이 먹을 농작물이 없어서 죽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국가적으로 처음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법령이 마련된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빈민제도와 관련한 법령을 최초로 마련한다. 하지만 빈민제도는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빈민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었다. 당시 왕을 포함해서 국가 지도자들은 빈민을 게으르고 무지한 사람으로 보았다. 이것은 빈민의 문제가 심각해 국가가 개입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빈민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노력이고 현재의 가난은 개인의 노력 부족이기 때문이므로 국가나 사회적 책임성은 시혜적 차원으로 밖에 머물 수 없게 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인식이 영국과 미국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